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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음악의 공유를 통해 만드는 순간의 완벽: 서울시발레단 더블빌 ‘한스 판 마넨 X 허용순’

공연비평

Vol.123-1 (2025.11.5.)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세종문화회관


 

〈캄머발레〉

  

〈언더 더 트리즈 보이시스〉

 

서울시발레단이 올 시즌 마지막 공연을 한스 판 마넨과 허용순의 더블빌로 마무리했다. 한스 판 마넨의 〈캄머발레〉와 허용순의 〈언더 더 트리즈 보이시스〉 두 작품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4회차의 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나란히 올려지며 개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캄머발레〉에서는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던 김지영이 지난해에 이어 출연은 물론 스테이저로 안무를 지도하고, 〈언더 더 트리즈 보이시스〉에서는 독일에서 활동 중인 허용순과 강효정이 안무가와 무용수로 조우하며 한국의 해외진출 1세대부터 3세대까지의 무용수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뜻 깊은 무대가 마련되었다. 한국 발레의 계보를 재확인하는 역사성이 깃든 자리가 된 덕분에 공연이 더욱 화제가 되면서 발레단 측에서는 언론과 평단을 위한 프레스 리허설 무대를 긴급 편성하는 등 추가 대응에 나서야 했다. 


모든 논리를 초월하는 사랑


〈언더 더 트리즈 보이시스(Under The Trees’ Voices)〉는 지난해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초연된 허용순의 최신작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에지오 보쏘의 교향곡 2번을 바탕으로 안무하며 표제어를 그대로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


작곡가이자 지휘자, 더블베이스 연주자, 그리고 스스로 ‘필요할 때는 피아니스트’라고 칭했던 에지오 보쏘는 협주곡이나 실내악과 같은 전통적인 형식에 현대적인 요소를 접목하며 클래식과 현대음악이 어우러진 음악세계를 추구했고, 클래식은 물론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장르와 형식을 아우르는 독특하고 절충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정교한 구조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서정적인 선율미로 감싸여 있는 그의 음악은 깊은 감정과 소통하는 힘, 다면적인 영향력을 특징으로 하며 청중에게 지적인 자극과 폭 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크게 사랑받았다.



보쏘의 교향곡 2번은 이탈리아 북부 트렌티노 지역에서 열리는 자연음악축제인 수오니 델레 돌로미티 페스티벌의 의뢰로 작곡되어 발 디 피엠메의 울창한 전나무에 헌정되었다. 발 디 피엠메는 트렌티노 지역의 대표적인 산악 계곡이다. 2010년 7월 페스티벌에서 교향곡이 초연된 후 지역사회는 세계적인 음악가에게 부여하는 영예의 의미로 보쏘에게 음악의 숲에 있는 나무를 헌정한 바 있다.


2020년 신경퇴행성 질환으로 투병하던 보쏘가 48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허용순은 그의 음악과 생애를 기리며 교향곡 2번 중에서 2악장과 5악장을 사용해 〈언더 더 트리즈 보이시스〉를 안무했다.


작품은 크게 두 개의 파트로 나뉜다. 1장에서는 보쏘와 깊고 복잡한 우정을 나눈 이탈리아 배우 알바 파리에티와의 관계를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파리에티와의 교감을 통해 영혼의 울림을 얻은 보쏘의 음악세계가 펼쳐진다. 파리에티는 보쏘를 자신이 경외심을 느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그와의 관계를 “모든 논리를 초월하는 사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보쏘 생전에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연인 사이임을 공표한 적은 없었고, 파리에티는 둘 사이에는 “복잡하고, 고통스럽고, 위험하고, 반복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아꼈다.


나무의 목소리를 들어라


작품의 구성은 매우 영화적이다. 공연은 블루, 레드, 버건디, 핑크, 브라운, 화이트의 색색 의상을 갖춰 입은 무용수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후반부에서 보쏘의 음악 세계를 표현할 영감이자 음표이고 선율이지만 이 순간엔 보쏘의 음악에 공감하고 애정을 표하는 예술적 동료이자 청중이다. 이들이 보쏘를 추모하고 물러나면 무대는 곧 보쏘와 파리아티가 교감을 나누며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던 과거로 돌아간다.



보쏘 역은 발레단 시즌 무용수인 이유범이, 파리에티 역은 이 공연에 객원 수석으로 참여한 강효정이 맡았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빈국립발레단을 거쳐 이번 시즌부터 드레스덴젬퍼오퍼발레단 소속으로 활동하는 강효정은 오랜만에 국내 관객들과 만나는 무대에서 정교한 테크닉과 섬세한 연기로 인물의 내면과 관계의 깊이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난이도 높은 리프트와 순간적인 축의 이동과 날카로운 회전, 진득한 호흡의 파트너링 등 쉽지 않은 움직임이 쉬지 않고 이어지는 동안 춤은 음악과 일체화되며 객석에 전율을 안긴다.


1장이 끝나면 지휘봉을 든 보쏘가 무대에 홀로 남아 음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전달한다. 1장과 2장 사이의 막간극처럼 펼쳐지는 이 솔로 무대에서는 이유범의 몸짓과 함께 무대 양옆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보쏘가 남긴 금언이 자막으로 전해진다.


“나는 음악을 위해 삽니다. 음악은 경이롭습니다. 음악은 우리 자신이며 음악을 공유할 수 있음은 큰 행운입니다. 음악은 삶과 같아서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가능하죠. 그것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중략) 끝으로 완벽함이란, 완벽한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순간을 붙잡아 완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시작하시죠, 마에스트로!”


마지막의 ‘자, 시작하시죠, 마에스트로!’라는 지시는 다시금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 보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수도, 공연이 진행되는 이 자리에서 음악을 공유하는 관객들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보쏘의 지시에 따라 무대로 다시 나온 무용수들은 무대 뒤편에 영상으로 송출되는 거대한 나무 이미지를 배경으로 역동적인 안무를 이어나간다. 무용수의 움직임은 악장의 제목처럼 자라나는 나무와 인간 사이에서(허용순이 안무를 위해 채택한 두 개의 악장, 2악장과 5악장의 제목은 각각 ‘나무처럼 자라나며’와 ‘인간과 나무 사이에서’이다)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삶과 죽음을 은유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작은 방 안에서 역동하는 관계들


한스 판 마넨의 1995년 작 〈캄머발레(Kammerballett)〉는 지난해 발레단의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한국 초연 및 아시아 초연으로 올려진 뒤 이번 공연에서 재연으로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제목의 ‘kammer’는 영어의 ‘chamber’에 해당하는 단어로 ‘방’을 의미하는데, ‘캄머발레’는 제목처럼 대형 클래식 발레와 대비되는 ‘작은 방에서 벌어지는 실내적인 발레’로 완성된다. 공연은 블랙, 옐로우, 오렌지, 다크커피의 색색 의상을 입은 여덟 명의 무용수들이 각자 스툴을 들고 무대에 등장하며 시작된다. 무대 바닥에는 흰색 원이 그려져 있고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대부분 이 원 안에서 이루어지거나 벗어나더라도 원에 근접해서 이루어진다.




이 제한되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 안에서 무용수들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연기한다. 스카를라티, 케이지, 카라예프 등 시대도, 나라도, 문화도, 사상도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이 콜라주되어 움직임과 결합한다.


판 마넨 작품의 안무적 특징은 ‘관계성’, ‘단순성’, ‘음악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캄머발레〉는 그의 이 같은 특징이 매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즌제로 무용수를 운영하고 있어 초연의 무용수가 일부 바뀌었으나 무용수들은 예민한 긴장감과 긴밀한 호흡으로 공연의 밀도를 유지했고, 김지영은 관록과 여유로 무게중심을 잡으며 무대의 완성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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