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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닿을 수 없는 이상을 향한 순백의 비극: 탈리오니의 오리지널리티를 복원한 라코트의 <라 실피드>

공연비평

Vol.123-1 (2025.11.5.) 발행


글_ 이희나 (춤평론가)

사진제공_ MAMT


 

Karina Zhitkova

 

낭만주의 발레의 원형인 <라 실피드(La Sylphide; Сильфида)>는 발레의 존재론적 질문을 수반한다. 현실적 한계 내에서 미학적 이상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적 동경과 현실 도피라는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다.


1832년 필리포 탈리오니(Filippo Taglioni)가 자신의 딸 마리 탈리오니(Marie Taglioni)를 위해 안무한 <라 실피드>는 낭만주의 발레의 시작을 연 역사적 작품이다. ‘공기의 정령’이라는 뜻을 지닌 실피드의 모습을 현현하기 위해 발레리나가 발끝으로 서는 포인트 슈즈를 신고 공연한 최초의 발레로 알려져 있다. 바닥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착시를 주는 포인트 슈즈의 착용은 낭만 발레의 기술적 전환점이었다. 또한 <라 실피드>는 무겁고 기다랗던 치마를 발목이 보이도록 잘라서 발레리나의 발이 드러나는 로맨틱 튀튀를 처음 시도함으로써 요정의 가벼운 움직임과 현란한 발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마리 탈리오니가 구현한 공기의 정령 ‘실피드’의 모습은 이후 낭만 발레의 표준 미학이 되었고 종 모양의 흰색 로맨틱 튀튀(romantic tutu)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상징이 되었다. 발레리나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치마는 환상성을 자아내며, 포인트 슈즈 위에 서 있는 발레리나는 무게감이 없이 부유하는 듯한 요정의 모습 그 자체이다.


 

ⓒ Karina Zhitkova

 

덴마크의 안무가 오귀스트 부르농빌(August Bournonville) 원작 안무가 탈리오니의 허락을 받지 못해 1836년 헤르만 뢰벤스키올드(Herman Løvenskiold)의 새로운 음악에 자신만의 안무를 가미하여 새로운 <라 실피드>를 창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전 세계 대부분의 발레단이 공연하는 것은 바로 이 부르농빌 버전이다. 이 작품은 원작과 동일한 배경과 내러티브를 갖고 있으나, 부르농빌 특유의 안무색이 짙게 묻어있다.


역사 속에 사라졌던 탈리오니의 원작은 프랑스의 발레 역사학자 피에르 라코트(Pierre Lacotte)의 치밀한 고증 작업을 통해 1972년 복원되었다. 라코트는 탈리오니의 서신, 악보, 당시의 무대 디자인 자료, 당대의 평론과 무용수들의 일기 등을 바탕으로 원형의 낭만적 구조와 미장센을 재구성해냈다. 장-마들렌 슈나이츠회퍼(Jean-Madeleine Schneitzhoeffer)의 음악과 함께 마리 탈리오니의 역할을 재현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르농빌의 버전에서 제임스의 약혼녀인 에피는 천상으로 날아오르는 실피드와 대비되는 현실세계의 인간을 강조하기 위해서 포인트슈즈가 아닌 캐릭터슈즈를 신고 있는 반면, 이 버전에서는 에피에게도 포인트 슈즈를 신겨 춤적인 테크닉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 복원 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재현을 넘어, 낭만 발레의 형식을 현대 무대에 재확립하였다는 비평적 의미를 지닌다. 이 버전은 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단과 함께 러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스타니슬랍스키 네미로비치-단첸코 극장의 발레단이 계승하여 공연하고 있다(2011년 피에르 라코트의 지도로 초연, 이후 2021년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로랑 일레르(Laurant Hilaire)의 연출로 재공연).


 

ⓒ Karina Zhitkova

 

올해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에서는 지난 9월 19-20일과 10월 29-30일에 이 작품이 공연되었다. 9월 19일 공연에서 실피드 역은 아나스타샤 리멘코(Анастасия Лименько)가 맡았다. 그녀는 신비로운 환영이 아닌,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중적 캐릭터를 구현했다.  그녀의 실피드는 잡을 듯 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면서도 장난기 넘치고 질투하며, 결국 자신과 제임스, 에피의 운명을 파멸로 이끄는 비극적 인물이었다. 리멘코는 등장부터 물리적 중력을 거부하는 듯한 가벼움을 보여주었고, 빠른 발놀림과 점프, 턴 동작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초월적 존재감을 입증했다. 환상적인 앙트르샤와 시간을 늘여놓은 듯한 에샤페, 실피드의 상징적 포즈는 마치 과거 마리 탈리오니의 환영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모든 캐릭터를 압도할 만큼의 무대 장악력을 보여주었다.


1막은 벽난로 옆에서 잠든 제임스를 보고 사랑에 빠진 실피드, 그리고 그녀의 환상에 홀린 제임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제임스는 에피와의 결혼식 당일까지 실피드를 좇고, 결국 결혼반지를 낚아채 도망치는 실피드를 따라 사라진다. 2막의 무대는 공기의 정령들이 사는 숲이다. 제임스는 실피드와 환상적인 춤의 향연을 벌이지만, 마녀에게 받은 스카프를 선물한 순간 비극이 펼쳐진다. 복수를 꾀한 마녀의 마법으로 실피드는 날개를 잃고 죽어가고, 절망에 빠진 제임스 뒤로 에피와 친구의 결혼 행렬이 지나간다.


 

ⓒ Karina Zhitkova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 작품의 분위기는 낭만주의 예술의 본질을 보여준다. 1막 결혼식 파티에서 펼쳐지는 제임스, 에피, 실피드의 삼인무는 이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갑자기 무대가 어두워지고 셋을 제외한 모든 이가 멈춰 선 가운데, 셋의 춤이 시작된다. 현실에서는 제임스와 에피가 춤을 추고 있지만 제임스에게는 환상의 캐릭터인 실피드를 느낄 수 있다. 한 손은 에피를 잡고 있지만 반대쪽 손을 잡고는 실피드가 아라베스크를 하고, 실피드를 받치고 있는 제임스의 뒤로 에피가 다가온다. 에피와 마주 안고 있는 제임스의 어깨 위에 실피드가 올라타 있는 장면은 의무로 상징되는 현실과 욕망으로 상징되는 환상이 뒤섞여 충돌하는 세계관을 시각적 은유로 보여준다. 부르농빌 버전에서는 없는 장면이지만, 캐릭터들의 갈등 관계와 낭만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바를 응축하여 효과적으로 구현해 낸 부분이었다.


2막 정령들의 숲에서 펼쳐진 실피드의 휘몰아치는 춤은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고전 발레 작품의 내용이 때로는 허무맹랑하거나 개연성이 부족해 서사가 가볍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 공연에서는 리멘코의 탁월한 연기력이 그 한계를 완전히 극복해 냈다. 제임스의 배신에 상처 입은 실피드가 날개를 하나씩 잃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 순간은 그야말로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라 실피드>를 보았지만, 이번 공연만큼 깊이 몰입하고 감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 Karina Zhitkova

 

 

ⓒ Karina Zhitkova

 

<라 실피드>는 단순한 비극적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이 작품은 도달 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라는 낭만주의의 핵심 세계관을 무대화한 것이다. 라코트의 복원 작업은 과거의 형식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낭만주의 발레의 기술적, 구조적, 철학적 가치를 오늘날 관객에게 전달하는 살아있는 예술로 되살려냈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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