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3-2 (2025.11.20.)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무용단
안무가. 이젠 안무작가가 되어야 한다. 생각과 움직임, 어떻게 융합할 것인가. ‘작가적 방법론’과 ‘안무적 방법론’이 같이 가야한다: 국립무용단 <안무가 프로젝트>

국립무용단의 <안무가 프로젝트>를 통해 3인의 신작을 만났다(2025.11.6.-11.9, 국립극장 달오름). <안무가 프로젝트>는 국립무용단의 대표 창작 플랫폼이다. 박인건 국립국립극장장은 프로그램북의 지면을 통해서 “젊은 안무가들이 전통춤의 언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하며 새로운 한국춤을 제안하는 실험의 장”이라 했다.
<안무가 프로젝트>, 고심과 합심의 결과물
김종덕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단장은 “젊은 안무가들의 발굴과 육성뿐만 아니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창작무용의 방향성 제시와 확장성 제고(提高)를 위함”이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 안무가와 연습실에서 함께 땀 흘렸을 무용수들”을 시작으로 “항상 최상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을 제작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국립무용단의 <안무가 프로젝트>를 한 줄로 평한다면 “고심(苦心)과 합심(合心)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불철주야(不撤晝夜)란 말이 있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세 개의 작품에 일단 경의를 표한다. 이 공연을 본 관객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모든 관계자의 열정과 노력을 곳곳에서 느꼈을 것이다.
<안무가 프로젝트>, 수작과 가작 사이
올해의 <안무자 프로젝트>는 이렇게 서로의 칭찬과 격려로 끝내야 할까? 타이틀이 다르고 시스템이 좀 다를지라도, <안무가 프로젝트>는 사반세기(25년) 계속됐다.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2001-2012)와 <동동2030>(2003-2009)을 아는가. 돌이켜보면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계속 서로 칭찬해 왔다. 형식적 칭찬보다 더 중요한 건, 내용적 점검이다. 올해의 공연을 되짚으면서, 이 프로젝트의 한계와 가능성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안무가 프로젝트>로 무대에 오른 세 작품을 각자 나름대로 평해보자. 나는 ‘수작과 가작 사이’에 세 작품이 존재한다고 말하겠다. 셋 다 빼어난 수작(秀作)이라 하긴 어렵다. 대체로 ‘잘 된 작품’인 가작(佳作)이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앞서 말했듯이, 국립극장과 국립무용단에 관계한 많은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합쳐졌다. 따라서 이렇게 ‘고심과 합심의 결과물’이기에 ‘수작과 가작 사이’로 자리매김한다.
세 작품의 순위를 나는 정할 수 없다. 내게 세 작품은 똑같이 ‘1등 없는 2등’이다. 세 작품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특징도 분명하고, 한계도 분명하다. 묘하게도 ‘특징이 곧 한계’이기도 하다. 더욱 묘한 건 또 이번 작품에선 ‘한계가 곧 가능성’이 될 거라는 앞으로의 기대감마저 생긴다.
지난 20세기의 고전적인 표어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다. 3인의 안무자에게 이 말을 명심하고, 염두에 두길 바란다. 세 작품은 잘 된 것도 많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꽤 있다. 그걸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취한 것에 만족하지 말고, 부족한 것, 더 나아가 잘못된 것을 스스로 잘 찾아내길 바란다. 그것은 지금은 ‘실패’이지만, 훗날에는 ‘성공’이 될 것이라 믿는다. 실패를 찾아내고 그것의 해결점을 찾아낸다면, 3인은 앞으로 21세기의 훌륭한 안무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세 작품 모두, ‘인간’으로 귀결한다
세 작품 모두 주제 곧 키워드가 분명했다. 첫 번째 박수윤 안무 〈죽 페스 Festival of Dance & Goodbye〉(이하 ‘일작’)는 죽음, 이지현 안무 〈옷 beneath the cloth〉(이하 ‘이작’)는 옷, 세 번째 정소연 안무 〈너머 Beyond〉(이하 ‘삼작’)는 AI를 내세웠다. 주제가 아주 선명한 건 세 작품의 강점이다. 이런 작품은 관객에게 모호함을 주지 않는다. 관객들이 안무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춤꾼들의 몸과 춤을 통해서 작품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세 작품은 이렇게 각각 죽음, 옷, AI로 접근했지만, 결국 인간(사람)의 존재성을 향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일작은 무덤으로 느껴지는 공간에서 시작해서 죽음을 통해서 삶을 다시금 바라보게 했다. 이작은 옷이라는 사람의 겉에 드러나는 허울 속에 숨겨진(beneath)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착의와 탈의의 반복 속에서, 인간의 심리적 이중성을 재미있게 지적하는 듯 싶기도 했다. 삼작은 가장 지금의 세태를 적극 반영했다는 점에서 크게 인정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마치 ‘인간과 AI의 관계는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세 작품 모두, 시작은 신선했다
세 작품 모두 도입부는 좋았다. 일작과 이작이 특히 그랬다. 일작은 발을 부각했다. 발은 신체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나, 실제 춤 공연에서 몸을 지탱하거나 달리는 역할에 그친다. 발에게 마치 ‘손과 같은 역할과 의미를 부여’한 게 무척 선선했다. 그건 작품에 비추어서, 삶과 죽음처럼 대비되었다. 말하자면 손이 생(生)이라면 발은 사(死)처럼 다가왔다.
이작은 실루엣 장면으로 시작한다. 암전 속에서 무용수는 제 자리를 지키면서 2D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무용수’, 곧 ‘사람이 옷’이었다. 무용수마다 ‘옷’이라는 글자를 몸으로 만들어냈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도입부였다.
일작과 이작 모두 도입부는 매우 공을 들였으나, 다소 길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흠은 아니었다. 일작과 이작이 다소 정적인 것에 비해서, 삼작은 도입부에서 운동성이 꽤 느껴졌다.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작품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던져 주려고 했다.
“대한민국에 참 좋은 무용수가 많구나”. 세 작품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장점이다. 세 작품 모두 안무의 기본은 반복과 변화 또는 결합과 해체가 근본을 이뤘는데, 무용수들이 이런 의도를 잘 만들어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모든 무용수들이 ‘다’ 잘하지만, 그 중 ‘더’ 잘하는 춤꾼이 잘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이 춤꾼의 인프라가 든든한 건 명맥한 사실이다. 따라서 안무가 더 발전한다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춤의 강국이 될 수 있다.
세 작품 모두, 뒷심이 부족했다
세 작품 모두, 안타깝게도 뒷심이 딸렸다. 안무의 시작은 뜨거웠으나, 안무의 끝은 미지근했다고 해도 될까. 오히려 그 반대였으면 어떨까?
일작은 중반으로 치달으면서 안무보다는 춤꾼의 능력이 더 보였다. 주어진 공간과 구조물 사이에서 저마다의 춤을 잘 살려내는 모든 무용수가 매우 찬란하게 느껴졌다. 이작 또한 무용수들이 작품을 잘 살려내고자 하는 단합된 의지가 전달되었다. 일작이 개인기라면, 이작은 앙상블이었다. 세 작품 중에서 이작은 무용수가 똑같은 동작을 소화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여기서 서로의 호흡이 잘 느껴졌고 깔끔했다. 그러한 이작이 과연 어떻게 정점을 향할까 더욱 궁금해졌는데, 끝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났을 때 관객의 박수가 이를 말해주었다.
이지현 안무 <옷>
삼작의 시작은 노 세트였다. 따라서 달오름의 공간을 무용수들이 아주 넓게 활동하는 듯 시원했다. 7인의 무용수가 각자의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면서, 저마다 서로 다른 춤을 보여주면서 특이했다. 초반부에서의 안무력은 돋보였다. 7인의 무용수를 통해서 매우 다층(多層)적 시각이 느껴져서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고 레이저광선을 사용하는 시점부터 무용수의 동작이 객석에 잘 전달되지 않았다. 안무자가 만든 동작이 좋았고, 이를 잘 소화해내는 무용수들의 춤적인 완성도가 꽤 많이 묻혀버린 상황을 초래했다. 무대가 그러하니, 이 작품에서 처음의 강한 메시지를 포함 무용수의 독특한 운동성도 후반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다. 무척 안타깝다.
<죽 페스>, 라이브음악이라는 ‘뜨거운 감자’
일작에서의 라이브음악은 ‘뜨거운 감자’라고 해야 할까. 무용 공연에서 춤과 음악은 어떠해야 할까? 춤과 음악은 서로 동등하게 존재해야 하지만, 결국 춤이 주가 되는 무대다. 따라서 51:49가 될 수밖에 없다.

음악이 라이브일 때, 관객의 시선은 아무래도 분산되기 쉽다. 거기를 아무리 암전시킨다고 해도 관객은 거길 의식한다. 거기서 기계장치의 발광체가 계속 보인다. 연주자의 움직임을 인식하게 된다. 일작은 음악 자체는 좋았으나, 춤꾼들이 들리는 음악을 뚫고 나오는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라이브 음악을 듣는 생생함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음악에 따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춤이 아쉽게도 그만큼 ‘생생한 날 것’ 같진 않았다. <죽 페스>라는 춤의 페스티벌 같았어야 함에도.
세트의 이동, 비(非) 무용적인 결함
일작에서의 세트는 중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시선을 끌었으나, 나중에는 이것이 무용수에게도 관객에게도 매우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다. 산소를 연상하게 하는 초록이 주조를 이루는 구조물은 점차 분해된다. 무용 공연에서는 무용수가 이런 세트를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뮤지컬 공연에서는 이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여기서 참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뮤지컬 공연에서는 배우들의 세트의 움직임은 매우 ‘무용적’이다. 일작에서 세트 전환은 어떠했을까. 무용수들이 세트를 전환할 때의 움직임은 춤이 분명코 아니었다. 빨리 그걸 움직이고 나서, 다음의 주된 동작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보였다. 구조물을 옮기는 그들은 무용수가 아니라, 오히려 스텝처럼 보였다. 따라서 춤이 살지 못했고, 관객의 시선도 분산되었다.
그러함에도 이 작품에서 무용수들의 연습량과 숙련도에는 진정 커다란 박수를 보내야 한다. 높이도 일정하지 않고, 재질도 어떤지 모르는 그 구조물을 춤추며 오르고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라도 다치면 어떨까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관객이 나 혼자만은 아닐 듯 하다.
남성춤꾼은 능동태, 여성춤꾼은 수동태
작품이 진행되면서 젠더적 관점에서 거슬리는 장면도 보였다. 작품에서 남녀의 역할이 너무 분명하다. 클래식발레 혹은 20세기 현대춤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그랬다. 무대에서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 너무도 갈려서 매력적이지 않았다.
능동태(能動態)의 남성과 수동태(受動態)의 여성으로 갈렸다. 한쪽에선 붙잡고 들고 던지고 올리고, 또 한쪽에선 매달리고, 들려지고, 던져지고 올려졌다. 이런 장면들을 내가 너무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질문하면서 보게 되었다.
<옷>, 20세기 창작춤과 20세기 창작춤의 정겨운 교집합
이작은 전체적으로 무용수가 가장 잘 보였다. 일작과 삼작에 비해, 모든 무용수의 여러 동작이 그대로 전달된다. 때론 보면서 따라서 하고픈 동작도 있었다. 아쉬운 점은 암전(블랙)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21세기에 비해서, 20세기의 공연에 블랙이 더 많다. 언제부턴가 서구의 연극은 전혀 암전이 없이 진행되기도 하고, 우리쪽 공연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장면 전환용의 암전이 공연의 내용적 연결을 단절하는 건 사실이었다.
의상이나 무대, 암전이나 조명 등에서 20세기의 수작을 21세기의 신작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한 것과 같은 인상도 받았다. 이것은 단지 그랬다. 나와 같이 20세기의 공연물을 많이 본 사람의 입장에선 이 작품이 분명 뭔가 사람 냄새도 나고 인간적인 교감이 느껴지는 건 분명했다.
<너머>, 뭔가를 강하게 보여주고픈 강박
삼작은 매우 시의적절한 작품이고, 무대의 구성력이나 개개인의 개성을 부여하면서도 전체적인 안배가 느껴지는 안무력을 높이 살만하다. 음악과의 조화도 괜찮았다. 국악적인 리듬을 살린 부분과 재즈적인 리듬을 살린 부분이 모두 살아나면서, 전체적으로 ‘그루브한 매력’이 강점이었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면서 전체적으로 주제의식이 흐려졌다. 후반부에는 레이저 조명이 많아지면서 정작 춤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타까웠다. 후반부에서는 안무가가 뭔가를 보여주려는 의식이 너무도 강했다.
자신의 작품이 세 작품 중 엔딩이기에, 뭔가 강력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했을까. 전체적으로 관객들에게 매우 어필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정작 이 작품의 묵직한 주제와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실제 춤과는 꽤 유리된 느낌이다.
오랫동안 한국의 전통춤과 창작춤을 익힌 이가 그것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터득해서 자기화된 동작들이 앞부분에서는 꽤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뒷부분에선 그런 것들을 정교하고 치열하게 풀어가기보다는, 후반부에서 뭔가 강력한 것을 보여주면서 쇼업(show up)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춤꾼 하나는 경사된 무대를 내려가서, 객석으로 내려가서 관객을 보고 무대를 보기도 했다 또한 무용수들은 모두 무대 앞부분에 도열을 해서 몸속에 숨겨둔 종이 가루 같은 것을 객석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역시 지나치게 뭔가를 드러내 보이려는 쇼업(show up)이었다. 춤으로 작품을 풀어내기보다는, 행위(퍼포먼스)로 작품 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이 보였다.
무용의 무대에서 조명은 더욱 중요하다. 조명은 ‘보임’의 역할도 하지만, 조명이 적게 존재하는 공간을 통해서 ‘감춤’의 역할을 한다. 또한 조명의 정도에 따라서 ‘덜 보임’과 ‘더 보임’으로 구분한다. 무대는 순간에 따라 보여야 할 것이 있고, 감춰야 할 것이 있다. 잘 보여야 할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세 작품은 ‘보임/안 보임’, ‘더 보임/덜 보임’과 연관해서, 각각의 작품의 한계가 있고,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일작은 “안 봤으면 하는 것이 보였다”
세트 구조물의 이동이다. 그 구조물을 운반하는 무용수들이다. 세트를 이동하는 무용수는 각각의 역할에 급급했다. 세트를 밀고 난 후, 제 타임에 맞게 춤을 춰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이 전해졌다. 이것이 관객의 입장에서도 편치 않았다. 세트가 조명으로 모두 보이거나 감춰질 순 없는 것이겠지만, 안무자는 이것에 대해서 좀 더 정교한 전략이 있어야 했다.
이작은 “너무 곧이곧대로 보였다”
21세기의 새로운 신작이라는 느낌은 덜 했다. 나와 같이 20세기 작품에 대한 애정이 많은 입장에서는, 20세기적 무용의 특징과 매력이 무용수를 통해서 전달되는 기쁨이 있긴 했다. 이 작품에 참여한 무용수는 특히 즐거웠을 거다. 다소 위험한 상황을 접하는 것도 아니었고, 애써 춤추는 자신의 모습이 객석에 잘 전달되지 않을 염려도 없기에 그렇다. 객석에서 자신을 잘 볼 수 있다는 기쁨도 있었을 것이고, 무용수 사이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통해서 흠뻑 행복감을 느꼈을 것 같다.

삼작은 “보여야 할 것이 때때로 안 보였다”
이 글에도 너무나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레이저 조명 탓이다. 이런 분위기가 AI 시대와 연결하는 역할을 충분히 했지만, 안무가 스스로도 이런 장면이 너무 장시간 노출되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까? 무용수의 움직임이 매우 매력적이었기도 했고, 무용수 간의 공간적 긴장감도 꽤 존재했는데, 이 모든 것이 레이저 조명과 어두운 조명으로 인해서 객석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쇼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춤은 생각거리를 유도한다
<안무가 프로젝트> 프로그램북에 실린 국립무용단 김종덕 예술감독의 글에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한 가지 크게 걸리는 것이 있다. ‘다양한 볼거리 제공’이란 구절이다. ‘기존의 동작을 반복, 변화, 발전, 왜곡, 해체하는 등 차별화된 어법을 통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리라 믿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조금은 안심이긴 하다. 김종덕 예술감독이 쓴 ‘다양한 볼거리’가 ‘춤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볼거리로 이해할 수 있겠다.
춤이란 뭘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춤인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건 쇼(show)다. 춤 공연에선 ‘춤’이 보여야 한다. 춤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국립무용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볼거리에 치중하는 추세가 강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많은 춤 단체의 공연에선 ‘춤’이 보이지 않고, 춤 이외의 것들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그런 것에 쏠려서 모인 관객을 ‘춤’ 자체로, 방향으로 잘 유도하는 숙제가 있다.
그러함에도 오히려 더욱더 볼거리에 치중하는 작품으로 치닫는 현상도 보인다. 춤은 뒷전으로 물러났고, 오직 비주얼적인 관심 끌기에 혈안이 되는 기현상에 대해서, 앞서서 반기를 들어야 할 사람은 이 땅의 춤꾼이어야 한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안무자 프로젝트>에서도 3인은 무의식적으로 그 저변에 볼거리에 대한 일종의 강박이 보였다.
이런 현상은 분명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식어갈 것이다. 훗날 대한민국의 국립무용단을 비롯한 많은 우수한 단체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무대의 중심에 춤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어쩌면 국립무용단에서 일찍이 시작한 ‘볼거리에 대한 강박’을 이제 국립무용단이 앞장서서 극복해 나가면 어떨까. 장르를 떠나서 훌륭한 작품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볼거리’가 아닌 ‘생각거리’이다.
“춤 공연에서 볼거리에 치중한 것은 지양해야 한다.” 요즘 같은 현실에서, 이 말은 하고 또 할 필요가 있다. “춤 자체를 볼거리로 생각하는 시각도 옳지 않다.” 춤은 몸을 통한 예술이다. 훌륭한 춤은 몸을 통해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춤을 통해서 생각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대한민국의 춤은 앞으로 더욱 사유의 영역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안무가는 작가다! 움직임엔 생각이 공존해야 한다
<안무가 프로젝트>의 세 작품을 보면서, ‘안무가가 작가’여야 함을 확실히 깨닫는다. 세 작품 모두 작품 전개상의 취약함이 보인다. 관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은 어떻게 완결되어야 할까? 30분이란 시간 동안 관객은 ‘동작의 변화’에 관심을 둘까? 아니다. 30분 동안, 주제에 맞게 춤을 보면서 생각하고 싶다. ‘생각의 지속’과 ‘생각의 변화’를 동시에 느끼고 싶은 것이다. 관객의 이러한 요구를 세 작품이 충족시켰을까?
‘춤작가’라는 말이 존재한다. 1987년부터 시작된 말이다. 이 용어의 시작과 함께 유의미한 말로 정착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춤작가’가 어떤 의미일까? 한국현대춤협회에서 시작한 ‘춤작가’란 단어 속엔 ‘무용계의 실험적 작가 정신의 고양’이 담겼다. 춤에서 ‘작가 정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 되고, 더 깊이 살피면 춤을 통해서도 ‘작가적 사고관’과 ‘작가적 방법론’이 매우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안무가’에서 ‘안무작가’로
춤작가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춤을 추는 사람이듯이, 안무작가도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안무를 하는 사람이다. 안무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국립창극단 <창극 작가 프로젝트>와는 전혀 다르다. 창극 작가는 곧 창극을 만들기 위한 대본 작가를 말한다.
안무작가는 대본작가가 아니다, ‘안무작가’는 ‘안무가’의 또 다른 이름 혹은 안무가의 또 다른 지향이다. <안무작가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춤에서도 ‘작가 정신’을 요구하는 시점에 와 있다. ‘작가적 사유’를 전제로 해서 ‘작가적 방법론’을 터득한 후에 만들어진 안무작가의 작품은, 지금과 같이 안무력에만 거의 의존한 작품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이번 <안무가 프로젝트>의 3인은 안무가로서는 출중하겠지만, 그들을 작가로 인정하기엔 주저함이 있다. 동시대 예술로의 시대적 소임과 연결해서도 그렇고, 하나의 작품을 전개하기 위한 자기만의 능란한 방식 면에서도 그렇다.
안무가에게 요구되는 드라마투르기
‘안무작가’란 무엇일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무가에게 요구되는 것이 ’드라마투르기‘이다. 생각과 움직임은 같이 가야 한다. 세 작품을 보다 보면, 생각은 멈췄는데 움직임은 계속되는 느낌이 든다. 춤꾼의 움직임에 생각이 든든하게 받쳐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만약 세 안무가가 “춤(안무)이 잘 풀리지 않았다면” 그건 ‘안무의 부족’이 아니다. 그건 사고의 부족이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드라마투르기’를 모르거나 서툴기에 그렇다.
세 작품 모두 시작점에서의 아이디어는 번득이고 돋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밀고 나가는 ‘창작력’ 혹은 ‘작가정신’이 안타깝다. 그들은 좋은 안무가라고 할 순 있어도, 능숙한 안무작가라고 할 순 없었다. 안무가의 아이디어(idea)는 안무작가에 의해서 아이디얼(ideal)을 향해야 한다. 아이디어가 잠시 번득이는 재주에 머물면 곤란하다. 작품을 만드는데 현실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그 작품을 왜 만들고자 하는지에 관한 이상적 접근은 ‘아이디어를 여러 방식으로 변화시키면서 밀고 가는 추진력’에서 나온다. ‘안무가’는 이제 ‘안무작가’가 되어야 한다. <안무가 프로젝트>도 그렇게 업그레이드 되어야 한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