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3-2 (2025.11.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LG아트센터
올해 11월은 공연예술계에서 가장 바쁜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공연 캘린더가 비어 있는 날 없이 촘촘히 채워지며 각양각색의 다양한 작품들이 관객들을 공연장으로 불러들였다. 특히 11월 둘째 주에는 LG아트센터, 국립현대무용단, 국립무용단, 서울시무용단 등 대기업 문화재단과 국공립단체들을 비롯해 김보람, 이해니, 권세현, 조진호 등 중견 및 신진 안무가들의 공연이 한꺼번에 몰려 더욱 선택의 고민을 깊어지게 만들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이렇듯 많은 공연들이 컨템퍼러리 댄스에 집중되면서 ‘지금’ ‘여기’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창발시켰다는 점이다. 본 리뷰에서는 이들 공연 가운데 LG아트센터의 기획공연 무대에 올려진 피나 바우쉬의 〈카네이션〉과 국립현대무용단이 더블 빌로 꾸민 윌리엄 포사이스의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과 김성용의 〈크롤〉의 세 작품을 우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분량의 문제로 리뷰는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25년 만에 다시 피어나는 9000송이 카네이션
탄츠테아터 부퍼탈 피나 바우쉬(이하 ‘부퍼탈’)가 〈카네이션〉(11.6.-9.,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으로 오랜만에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피나 바우쉬의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올려지는 것은 지난 2017년 이후 8년 만으로, 이번 공연은 LG아트센터 개관 25주년을 맞아 개관 기념작이었던 〈카네이션〉을 25년 만에 다시 선보이는 뜻깊은 무대가 되었다.
2000년 당시 LG아트센터 측과 개관작을 논의하던 피나 바우쉬는 이 작품이 새롭게 문을 연 공연장에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담아 〈카네이션〉을 추천한 바 있다. LG아트센터는 이후 바우쉬의 작품을 국내 무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며 관객들과의 접촉면을 넓혀 왔다. 바우쉬는 센터 측 제안을 받아들여 제작한 2005년 국가·도시 연작 시리즈의 13번째 작품 〈러프 컷〉을 통해 한국 문화와 사람들을 담아내며 긴밀한 파트너십을 증명하기도 했다.
2009년 바우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에도 LG아트센터는 기획공연 무대에 단체를 꾸준히 초청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카페 뮐러〉, 〈풀 문〉, 〈스위트 맘보〉 등의 작품이 바우쉬 사후 무대에 올려지며 관객들의 아쉬움과 그리움을 다소나마 해소시켜 주었다.

관객들이 객석에 입장해 처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넓은 무대 한가득 펼쳐진 9000송이의 카네이션이다. 이 장면은 1980년 바우쉬가 남미 투어 중에 들른 칠레 안데스 산맥에서 마주한 카네이션 들판의 장관을 재현한 것으로, 아름다움과 폭력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과 폭력은 공존한다
바우쉬는 2000년 국내 초연을 앞두고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 작품은 젊음과 아름다움이 상징하는 ‘희망’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이라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무대에 펼쳐져 있는 카네이션 들판은 젊음과 생명력, 아름다움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구둣발에 짓밟히고 흩어지며 현실의 폭력을 은유한다.
공연 초반 무용수들은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비슷한 형식의 ‘1, 2, 3, 태양(Un, deux, trois, soleil)’ 게임을 하며 유년 시절로 돌아간 듯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렇듯 유쾌한 감상에 젖을 수 있는 것은 잠시뿐이다. 무용수들은 곧 서로를 쫓아가고 쫓겨 다니며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중년 남성이 등장해 여권을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최근 과격한 이민 단속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며, 서로 의자를 빼앗기 위해 다툼을 벌이거나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어 앉는 모습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권력 다툼을 비춘다.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무용수들의 한국어 내레이션이다. 무용수들이 서툰 발음으로 들려주는 자기고백은 국경을 넘는 울림으로 무대를 채우며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무용수들이 어떻게 무용을 하게 되었는지 각자의 경험담을 들려주고 나면 중년 남성 무용수가 관객들을 향해 자리에서 일어나달라고 부탁하고, 공연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관객들이 따라 하는 일체화된 경험과 함께 마무리된다.
포스트 바우쉬 시대의 미래상은
바우쉬 사후 부퍼탈은 도미니크 메르시와 로베르트 슈투름(2009–2013), 루츠 푀르스터(2013–2016), 아돌페 빈더(2017–2018), 베티나 바그너-베르겔트(2019–2022), 보리스 샤마츠(2022–2025) 등 후임 예술감독들이 단기간에 교체되며 리더십 혼란기를 겪었고, 샤마츠가 떠난 뒤 후임 예술감독을 쉽사리 선임하지 못한 채 다니엘 지크하우스가 예술감독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포스트 바우쉬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무엇보다 바우쉬를 바우쉬로 특징 지우는 그의 안무 방식이 무용수와의 소통과 교감을 중요시하는 만큼, 그와의 작업 경험이 없는 젊은 무용수들로 세대교체가 될 때 바우쉬 없는 바우쉬 작품의 레퍼토리화에 대한 우려 또한 존재한다.


이번 공연에 출연한 19명의 무용수 가운데 2000년 국내 초연 무대에도 올랐던 안드레이 베진과 아이다 바이네리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17명은 모두 2019년 입단해 바우쉬와는 접점이없는 젊은 무용수들이다. 그러나 함께 출연하는 베진과 바이네리 두 무용수 외에도 에디 마르티네즈와 실비아 파리아스가 리허설 디렉터로, 김나영은 리허설 어시스턴트로 공연에 참여해 지난 무대의 경험과 영감을 나누며 세대가 다른 무용수들을 아울렀고, 젊은 무용수들은 공연에 신선함과 활기를 더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듯 ‘보존성’이 강해진 레퍼토리 작품으로 동시대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반짝이는 생명력을 가진 ‘가능성’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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