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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언어로서의 테크놀러지- 로베르 르빠주의 <바늘과 아편>



 캐나다 퀘벡 출신의 작가 겸 연출가요, 배우인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 1957~)의  <바늘과 아편>이 2003년 <달의 저편>과 2007년 <안데르센 프로젝트>에 이어 세 번째로 내한했다. 다매체 공연이 현실적으로 녹록치 않은 한국에서 르빠주의 첫 내한은 작품의 성격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사건이었다. 미디어가 무대에 개입하는 정도를 넘어 미디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낸 공연을 보며 당시의 관객들은 황홀해 했다. 기술에 놀라고 이야기에 감동했다. 전통적인 플롯을 탈피한 이미지 배열로 극적 긴장을 만들어 내는 그의 작업은 “새로운 무대 쓰기”의 사례로서도 부각되었다. 첨단기술이 주체가 된 이야기 구성이라는 점에서 로버트 윌슨의 이미지 연극에서 한층 심화된 다매체 연극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분석이 이루어졌다.


 깜깜한 공연장에서 마치 영화를 보듯 감상해야 하는 르빠주의 연극은 테크놀로지의 환상적인 매력만큼이나 플롯(다중적 플롯)이 강점이다. 이야기의 파편들이 뒤엉키면서도 관객의 심금을 자극하도록 끌어가는 그의 연극은 마술처럼 관객을 흡입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의 원천은 그가 지향하는 매체 언어의 광활한 소통이다. 그러나 <바늘과 아편>은 르빠주를 빛낸 전작들과는 좀 다르다. 여러 겹의 플롯만큼이나 작가의 혼돈과 혼란이 겹쳐지면서 길을 잃은 듯 흡사 미제사건처럼 남겨진다. 이것은 단순히 열린 미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20년 전 작품의 리바이벌이 남긴 묘한 흔적인지도 모른다.




 1991년 초연, 2013년에 재공연 했는데, 이야기만 그대로 옮겨 희곡을 다시 썼다고 한다. 르빠주는 1949년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을 방문한 장 콕도(프랑스 시인, 영화감독)와 파리를 방문한 마일즈 데이비스(미국 재즈 연주자)의 비슷한 사연과 묘한 인연을 발견하고 이 작품을 구상했다. 두 사람은 각각 실연의 아픔을 겪었고, 약물 중독에 시달렸다. 40년이란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공간에 등장한 자전적 인물 로베르 역시 실연의 상처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며 치료를 결심한다. 르빠주는 자신의 아픔이 배인 이 작품에 대해 “사랑의 중독과 아편의 의존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예술가의 고통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시공의 차이를 두고 세 사람의 이야기는 상실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마치 한 인물이 세 개의 자아로 분열된 것처럼 보인다.


 르빠주는 “창작은 자신을 치유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는데, 이 작품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장 콕도가 미국 체류의 경험을 쓴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미국에 대한 매력과 환멸을 드러내는데, 이 대목에서 퀘벡 사람 르빠주의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주변인으로서의 정서를 읽을 수 있었다. 퀘벡연극 연구자 이선형은 “르빠주를 키운 건 8할이 퀘벡”이라며 “전쟁의 패배와 식민지의 경험, 프랑스에 대한 열등의식, 이중 언어로 인한 소외와 우울감이 팽배”했던 시기를 극복해낸 퀘벡의 역사가 르빠주의 작업 경향에 미친 영향을 언급했다. 르빠주의 인물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극복을 위해 노력했듯 <바늘과 아편>도 역시 실연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드러내지만, 언어와 인종 그리고 문화적 차이 때문에 겪는 소외의 경험을 공유하게 했다.
원래는 솔로 공연이었으나 20여 년 후의 재공연에서는 두 사람을 더 등장시켰는데 이에 대해 르빠주는 “군중 속에 있을 때 고독이 더 잘 표현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고독은 상당히 수다스럽게 표현되어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았다. 사각무대를 잘라 매달아 놓은 마름모형 상자 안에서 벌어지는 미디어의 향연은 전통적인 상자 연극과 관극의 경로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느라 여유가 없는 관객들은 영상으로 비치는 커다란 주사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밤하늘, 색소폰 연주 등 시청각적 이미지의 황홀경에 빠질 뿐 편안하게 작품이 주는 감흥을 얻기는 어려웠다. 무대 진행도 매끄럽지 않아 등퇴장의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고 배우들이 상자 아래로 빠져나가는 힘겨운 모습이 어슴푸레 노출되는 등 실망스러운 상연이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의 상처를 읽어내는 일은 아주 일차원적인 접근이라 할 것이나 좀 더 들어가 그를 점거하고 있는 상처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고 배열되었는가를 거론한다면, 르빠주는 아마도 “평론가들은 늘 존재하지도 않는 숨은 의미를 찾으려 하지”(<바늘과 아편>에 나오는 대사)라며 질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늘과 아편>은 여전히 진행 중인 퀘벡인의 치유 과정임이 분명하다. 르빠주가 염려하듯 “자아탐닉에 빠져있는 것”으로 오해받지 않고, 치유라는 목적이 쉽게 노출되지 않기 위한 장치로서의 다중적 플롯으로 관객들에게 필요이상의 두뇌 훈련을 해야만 했다.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트루기)
사진_ LG 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