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문화재단 비평활성화지원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된 리뷰임.
공연비평
Vol.127-2 (2026.3.20.) 발행
글_ 염혜규(춤평론가)
사진제공_ 댄스프로젝트 뽑기

댄스프로젝트 뽑끼의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이하 아무도)>(2025.12.19.-12.20, 대학로극장 쿼드) 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특정하지 않고 이르는 말인 '아무'와 부정어인 '아닌'이 각각 두 번씩 쓰인 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제목이다. 말장난처럼도 보이는 이 제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니, '아무'는 누군가이고, '아무것'은 무엇인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규정할 수 없는 누군가이고, 무언가이다. 무와 유 사이의 경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안무가 이윤정은 본작을 통해 가능성과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아직은 아무것도 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는 그곳을 보여주고자 한다(공연소개 참조).
일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닌 상태라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잠자는 상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자다’는 ‘행위’가 아닌 ‘상태’이다. 잠을 자는 상태는 일반적으로 의지에 의한 활동도, 의식 활동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하지만 사람은 자는 동안 몸을 움직인다. 그뿐만 아니라 꿈을 꾸기도 하고 잠꼬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잠을 잘 때 나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혹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아무도>는 바로 잠을 자는 상태를 춤으로 구현한 듯한 작품이다.


공연은 사방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 위에서 시작된다. 5명의 무용수가 무대 위에 듬성듬성 간격을 띄워 각기 다르게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다. 그렇게 무용수들은 한참 동안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상태로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움직임이 관찰된다. 무용수들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는 과학이론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숨을 쉰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무용수들은 천천히 흐트러진 자세를 유지한 채 움직임을 확장해 나간다. 호흡의 흐름 타고 허리나 등을 편다거나, 반쯤 누운 채 몸통의 방향을 트는 식이다. 마치 우리가 수면 상태에서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듯 혹은 TV를 보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꾸듯 우리가 일상에서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다. 팔은 힘이 빠진 채 어깨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데 공간을 부유하는 느낌이다. 실제로 무용수들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혹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하품을 하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운 자세가 갖는 수면 상태의 평면성을 3차원으로 입체화시킨 듯한 구성이다. 선 채로 잠이 든 사람이 균형을 잡지 못하듯 무용수들은 바닥에 발을 붙인 채 시계추처럼 몸을 앞뒤로 왔다 갔다 움직인다. 점점 미세한 움직임의 폭이 커지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두 무리로 나뉜 무용수가 엇갈려 가다 어깨가 부딪히지만 피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한다. 서로의 어깨가 받는 저항으로 다리가 앞뒤로 벌어져가며 아래로 쓰러져간다. 마치 프레임 구조물이 물리법칙에 의해 쓰러지는 현상을 보는 듯하다.


지금까지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몸의 움직임을 보여줬다면, 후반부에서는 반대로 의지와 결합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쓰러진 몸들은 차렷 자세로 무대바닥 위로 이리저리 이동한다. 사지의 움직임이 제한된 몸통의 움직임은 이동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로봇같이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구른다’기 보다는 직육면체의 사물이 모서리를 넘겨 가며 무게중심을 옮겨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위에 눌렸거나, 꿈속에서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용수들은 천천히 팔을 양옆으로 휘두르는 동작을 반복하며 일어선다. 팔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고 어느 순간 복싱선수처럼 힘찬 팔동작을 빠르게 지속한다. 이제까지 잠을 자듯 ‘하지 않음’ 속에 흩어져있던 에너지들이 하나로 모여 발산되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아무 것도 아니었던 움직임들이 그 무언가가 됨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아무도>는 의식하지 않은 움직임, 의지가 배제된 움직임, 의지가 반영된 움직임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각각은 쉬는 상태, 잠자는 상태, 꿈꾸는 상태를 연상시키는 구성이기도 하다. 미세하게 들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바람 소리, 톡톡 물건 부딪히는 소리 같은 짧은 리듬의 반복 등 음향효과는 움직임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준다.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소리들이다.
<아무도>는 전반적으로 느린 호흡과 느린 움직임으로 보는 이의 인내를 요한다. 빠른 속도만큼이나 더 많은 성과와 생산성을 요구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생산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잠을 무용하다고 여긴다. 잠뿐 아니라 쉬는 시간조차 의미있고 유용하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이 수면 부족으로 건강 문제를 호소하거나 번아웃 증후군을 겪는다. <아무도>는 바로 그런 현대인을 향해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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