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7-2 (2026.3.20.) 발행
글_ 손현철(작가, 前 KBS 다큐 PD)
사진_ 18th ARKO SELECTION ⓒSang Hoon Ok

제목에 끌려서 볼 공연을 선택하는 일이 가끔 있다. 수 댄스 컴퍼니의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그런 경우이다. 개에게 물려본 사람은 안다, 잊을 수 없는 그 고통과 공포를.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제목에 걸맞게 근원적 아픔의 체험에 관해 무슨 얘기를 들려줄 것인가 기대하며 자리에 앉았다. 프로그램 소개지를 펼쳤다. 웬걸 거기에는 원형 감옥 판옵티콘, 규율, 감시, 거대한 눈 같은 프링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즐겨 사용한 용어들이 가득하다. 푸코가 개에게 물린 적이 있던가? 궁금증이 일었다.
춤이 벌어지는 공간의 디자인, 무대 미장센이 눈길을 끌었다. 무대 양편에 4단, 3단, 2단, 1단으로 줄어드는 구조로 쇠 파이프를 엮어 놓은 비계(飛階)가 서 있다. 맨 앞쪽의 4단은 감시탑처럼 계단이 놓여있다.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검은 양복의 감시인 또는 간수 4명이 위치한다. 역시 검은 양복에 기다란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채증하는 두 남자가 무대 위를 어슬렁거린다. 조명에 반사되는 쇠 파이프 비계와 검은 양복의 감시자들은 비인간적인 원형 감옥, 감시 체계의 분위기를 한껏 담아낸다.


무대 앞 중앙 바닥에 설치된 커다란 조명 앞, 거울을 들여다보듯 모인 10명, 감시의 눈길 앞에서 묶인 삶의 표현을 시작한다. 말미잘의 촉수처럼 양팔을 들어 흐느적거리면서. 이후 비트 강한 전자 퍼쿠션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은 격렬한 저항의 몸짓을 뽑아낸다. 두 팔을 크게 휘젓고 몸통을 비트는 길거리 춤의 과격한 몸짓으로 ‘크럼프’ 같은 댄스 배틀을 진행하듯 춤판을 벌인다. 비계의 감시자들은 스패너 같은 도구로 속이 빈 쇠 파이프를 두드리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전통춤 전공 무용수들이 일관성 있는 음악의 톤 & 매너에 맞춰 성큼성큼 걷는 큰 스텝, 몸짓이 큰 춤사위를 잘 버무려낸다. 춤만으로 보면 근래 보기 드문 힘 있고 강렬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뭔가 개념을 설명하려는 장면이 끼어들면서 이런 춤의 흥과 역동성이 깨져 버린다.
4명의 간수가 두 대의 모니터 스탠드를 밀고 들어온다. 무대에 설치된 카메라 연결 화면이 뜨고 그 안에서 손그림자 놀이가 진행된다. 공론의 장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굳이 설명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더스트리얼 앰비언트 장르의 느린 템포 음악이 나오고 회전하는 원형무대에서 무용수들이 느린 춤이 이어진다. 춤을 멈춘 무용수들이 하나, 둘씩 동작을 멈추고 오른쪽 파이프 구조물의 4단 꼭대기를 쳐다본다. 거기엔 온몸에 녹색 분말 물감을 묻힌 반라의 남자가 조명을 받으며 서 있다. 지상 무용수들의 시선은 그쪽을 향한다.
노끈인지 실타래인지 몸에 덕지덕지 붙인 남자는 비계의 계단을 서서히 내려온다. 무용수들은 이제 비계에 매달리고, 검은색 양복의 간수, 카메라를 든 사람 등 다섯 명이 무대 가운데 선다. 천천히 원형무대 위로 들어오는 녹색 인간. 뒤바뀐 권력,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말하려는 것인가?
무용과 연극, 미디어 아트의 요소가 어설프게 섞여서, 무대 미장센의 힘, 춤과 음악의 역동성을 잡아먹고 막이 내린다. 시답지 않은 ‘개념’한테 춤이 물리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현대무용의 안무 방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무용수의 감각과 신체 경험에서 출발해 움직임을 발견해 나가는 귀납적 방식이다. 몸의 충동과 리듬이 먼저 생기고, 그 움직임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나 정서를 형성한다. 다른 하나는 특정한 철학적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먼저 설정하고 그것을 무대 위에서 풀어가는 연역적 방식이다. 이때 춤은 하나의 아이디어를 시각화하거나 구조화하는 도구가 된다. 사회적 메시지나 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무용 작품들이 개념 중심 안무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개념에서 출발하는 연역적 안무의 난점은 명확하다. 추상적 관념을 먼저 세우고 그 의미를 무대 위에서 풀어내려 할 때 춤은 종종 설명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개념은 언어의 질서 속에서 작동하지만 춤은 몸의 리듬과 에너지 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 두 체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언어다. 그래서 개념이 지나치게 앞서면 안무는 몸의 발견이 아니라 아이디어의 번역이 되어버린다. 몸의 필요가 춤을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 ‘권력’, ‘균열’ 같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춤이 호출된다. 그 순간 춤은 살아 있는 사건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도식으로 굳어버린다.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진 작품이다. 무엇보다 무대 미장센의 조형감이 인상적이다. 쇠 파이프 비계 구조와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감시자들의 배치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감시 체계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에 강한 전자 퍼쿠션 비트와 함께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큰 동작과 집단적인 움직임은 억압된 에너지의 폭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쉬움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이미 무대 이미지와 몸의 움직임이 감시와 통제의 세계를 충분히 암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다시 개념을 설명하려는 장면들을 덧붙인다. 감시자들이 끌고 들어온 모니터 화면이나 메시아적(?) 인물의 등장은 춤이 스스로 만들어낸 생생한 현장성을 잠식한다. 비계를 해체하거나 춤을 통해 비계를 감시와 억압의 장치가 아닌 자유와 해방의 수단으로 바꾸는 방식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개념 중심의 안무, 그 추상성을 극복하려면 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춤의 고갱이, 생명력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진심과 배짱이 더 필요하다.
수 댄스 컴퍼니가 이미 보여준 강렬한 무대 이미지와 역동적인 신체 에너지를 강화하고, 개념의 서사보다 몸의 드라마를 더욱 밀도 있게 구축해 나간다면 관객들은 앞으로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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