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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서울교방의 춤, 텍스트인가 레퍼런스인가: 여섯 명의 춤꾼을 통해 본 스타일화(Stylization)된 무대춤

공연비평

Vol.127-2 (2026.3.20.)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서울교방



2026 서울교방 6인전 <공화 空化 - 허공에 핀 꽃>

2026.03.13.-03.14. 서울남산국악당


이 글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글이다. 평론가란 원래 그런 속성의 사람이라 여기면서, 그 불편함은 여기서 토로한다. 누군가는 이런 불편함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걸 내가 한다고 생각한다. 왜 불편함에도 얘기를 하는가. 솔직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교방’의 동인들은 그 어떤 단체보다도 정직한 춤을 춘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정직함이 ‘춤꾼 자체의 춤’에서는 느껴지지만, 그 춤꾼들이 들고나는 그 ‘제’ 또는 ‘류’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평론가는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고, 예술가는 ‘문제해결’을 하는 사람이라는 믿음 속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내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제 서울교방의 춤을 김수악의 춤, 장금도의 춤, 조갑녀의 춤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서울교방에게 질문하려 한다. 이렇게 확실하게 갈라서 질문을 하고 솔직한 답을 듣고 싶다. 서울교방에게 김수악(金壽岳, 1926-2009), 장금도(張今桃, 1928-2019), 조갑녀(曺甲女, 1923-2015)는 ‘텍스트’인가? ‘레퍼런스’인가?


모든 춤이 다 가치가 있고, 이번 공연에선 모두 다 춤을 잘 추었다. 그러나 그 춤이 내겐 불편했다. 내게는 레퍼런스처럼 보이는 춤인데, 서울교방 그리고 춤꾼들은 모두 텍스트처럼 인식하고 춤을 추기에 그렇다. 서울교방 김경란 대표의 공연소개 글을 옮겨와서 말하자면 “서울교방에서 십수 년간 함께 닦아온 만만치 않은 수련”은 매우 숭고하게 느껴졌지만, 과연 이 춤이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 선생의 지난했던 춤 인생’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모두 춤을 잘 추고 그 춤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지만, 그건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와는 별개로 느껴졌다.


1. ‘텍스트’와 ‘레퍼런스’, 평가의 기준이 달라진다. 


여섯 개의 춤 중에서 ‘안’ 불편하거나, ‘덜’ 불편한 춤이 딱 하나였다. 승무였다. 여기엔 김경란 작(作)이라고 붙였다. 이 춤에서만이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를 떼어놓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춤을 액면(額面) 그대로 볼 수 있었고, 그걸 그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의 각각의 춤에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를 대입시키면, 이 춤에 대한 평가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내 시각으론 이건 그들을 ‘텍스트’로 삼은 춤이 아니고, ‘레퍼런스’로 삼은 춤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체계에서도 그렇듯이, 레퍼런스는 맨 뒤에 붙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서울교방과 서울교방의 춤판에서는 이제는 ‘레퍼런스’가 되어버린 이름을 너무 전면(前面)에 내세우고 있다. 이를 그대로 지나친다는 건 평론의 역할이 아니고, 한 시대의 한 예술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려는 평론가라면, 그것을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논의의 장’으로 끄집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섯 개의 춤 중에서 불편하지 않았던 춤이 딱 하나였으니, 정희선의 승무였다. 왜일까? 여기엔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의 이름 혹은 그분의 춤과 결부되지 않았기에 그렇다. 뒤에서도 한 번 더 말하겠지만, 이 춤은 잘 짜였고, 또 정희선이 ‘김경란 작 승무’를 매우 잘 드러냈다. ‘드러냈다’란 단어를 택했다. ‘춤을 잘 추었다’보다, ‘춤을 잘 표현했다’보다, 춤을 잘 ‘드러냈다’고 했다. ‘드러나다’와 ‘드러내다’란 무엇인가. ‘가려져 있거나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거나 보이게 하는 것이고,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보이거나 밝혀내는 것이다. 정희선의 춤은 김경란작 승무의 본질을 매우 잘 드러냈다. 


그럼 다른 춤은 어떠한가.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의 춤이 잘 드러났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 분의 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분들 자신에 의해 이미 잘 ‘드러난’ 춤이다. 그런데 ‘서울교방’에서 만난 세 분의 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이미 잘 알고 있고 잘 보여졌던 것들이 오히려 ‘가려진’ 느낌이다. 이러하기에 난 ‘텍스트’와 ‘레퍼런스’를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교방춤에서 중시해야 할 세 인물: 김정연, 김계화, 장녹운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과는 벗어나지만, 교방 혹은 교방춤에 관해서 이 얘기도 필요할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춤계에서 교방춤을 얘기하면 위의 세 분에 한정된다. 그러나 실제 교방춤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이 세 분 외에 김정연(1913-1987), 김계화(1925-1998), 장녹운(1930-1995)을 빼놓을 수 없음을 내친김에 말하려 한다. 김정연은 평양권번 계통의 교방춤이요, 김계화는 나주권번 계통의 교방춤이요, 장녹운은 전라남도의 정서를 바탕으로 해서 교방춤에 극장춤이 합쳐진 형태이다. 같은 교방춤이라고 하지만, 김정연의 교방춤은 마치 그가 들려주는 <관산융마>처럼 서늘하고, 김계화의 교방춤은 ‘남도민요’의 사설처럼 살갑고, 장녹운의 교방춤은 ‘동편제’ 판소리처럼 서슬이 있다. 교방춤 혹은 교방문화에서 출발한 것이 그 지역과 그 사람에 의해서 정립(定立)된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김수악, 장금도, 조갑녀의 교방춤도 세 분의 춤에서도 의식과 무의식의 결부 속에서 이분들만의 춤의 특성이 있고, 그것 또한 정립(定立)되어 있어 보였으나, 아쉽게도 이번 춤판에서는 그간 정립되었다고 생각되었던 그 춤들이 보이지 않거나 희석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교방’이라는 단체의 정체성이다. 첫 번째의 질문은 ‘교방’과 연관된다. 교방과 교방춤의 전승과 그것의 서울교방 스타일로 ‘정립’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와 같은 시각에서 보면 3인에게 한정되는 건 분명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의 질문이 더 본질적인 질문이다. 서울교방은 동인(同人)인가? 이런 질문이다. 서울교방의 현재 모습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건 ‘동인’이라기보다는 ‘김경란 춤방’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나의 이런 질문을 통해서, 둘 중 어느 쪽으로 가든지 보다 확실해지길 바랄 뿐이다. 서울교방이 동인의 의미를 보다 더 확실하게 춤판을 통해서 드러내든지, 아니면 김경란 춤방이 되어서 김경란 춤이 출중한 춤꾼들에 의해서 어떻게 정립되어가는지를 확실하게 보고 싶고, 그것에 따라서 평론의 잣대를 대고 싶은 것이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해둘 것은 이제 지금과 같은 형태의 ‘구음검무’와 ‘논개별곡’ 공연에서 김수악의 이름을 연결하는 것은, 오히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두고 싶다. 현행 무대에서의 구음검무와 논개별곡의 예술적 가치를 나 또한 매우 존중하지만,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이 춤과 음악을 ‘김수악’이란 이름과 결부시키기에는 거리감이 너무도 있다는 걸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평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내 글을 서울교방을 오직 불편하게 만들거나, 공격적인 글로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서울교방이 솔직하게 자기정체성을 얘기할 때 서울교방의 춤은 더욱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서울교방의 춤은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이라고 분명히 말해도 좋겠다. 그럼 오히려 더 편할 것 같고, 서울교방 춤의 가치가 더 분명해질 것 같다. 다시 서울교방의 솔직한 답을 듣고 싶어 하며 질문한다. 서울교방에게 세 분의 춤은 텍스트(Text)인가? 레퍼런스(Reference)인가?


3. 6인의 춤꾼, 여섯 개의 사이


① 유영란의 민살풀이춤: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알았다.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느껴졌다. 유영란은 이 춤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간 이 춤에 익숙한 춤꾼보다 오히려 ‘조갑녀’의 태(態)가 느껴졌다. 춤태는 좋았고, 춤집은 아직 부족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춤세가 느껴졌다. 적당한 긴장감을 통해서 관객을 끌어당기는 기세가 있었다. 노련함과 편안함은 상대적으로 적을지라도, 이 춤이 어떤 춤인가를 알고 추는 춤이 갖는 서늘함에 조금 감동했다. 서울교방 스타일의 익숙함도 있겠지만, 다시금 장금도 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나로선 참 의미가 깊었다.


② 정승혜의 구음검무: 짜임과 엮음 사이



이 작품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수악의 유작 구음에 진주검무의 춤사위를 얹어 1인 독무로 만든 작품.” 과연 지금의 구음을 김수악의 유작 구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구음이 갖는 독특한 매력과 예술성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 구음은 김수악의 구음도 아니고, 경상도적인 느낌도 아니다. 하기에 이젠 설명에서조차 김수악이란 이름을 빼야 하지 않을까. 구음도 그렇지만, 검무도 그렇다. 이건 철저하게 21세기 서울교방의 김경란에 의해서 만들어진 춤이다. 더 이상 김수악을 연결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이 춤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가능하다.


정승혜는 정확한 동작으로 추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그런데 이것이 상대적으로 관객에게는 흥을 가져오지 못한다. 뭔가 춤의 교칙본이 있고, 그것에 따르려는 느낌이 강했다. 아쉬운 건 계속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거다. 검무 특유의 낭창낭창함이 아쉽다.


정승혜의 춤을 보면서 ‘짜임’과 ‘엮음’을 생각했다. 정승혜는 ‘짜임의 춤꾼’으로서는 좋으나 ‘엮임의 춤꾼’으로서는 아직 부족하다. 이 두 말을 확연하게 구분해서 써야 한다. 국어학적인 어원과 실제 공학적 원리나 공예적 원리에서도 그렇다.


짜임(Structure / Texture)은 실이나 대나무 따위를 가로세로로 교차시켜 어떤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베를 짜다’, ‘가마니를 짜다’가 그렇다. ‘짜임’은 설계와 조직(Organization)의 개념이다. 일정한 규칙에 따라 씨실과 날실이 맞물려 들어가는 체계적인 상태를 말한다. 정승혜는 ‘짜임’의 춤꾼이었다. 춤에서 견고함, 질서, 계획성이 드러난다. 동선이 정확하고, 흔들림 없는 형식을 갖추었다. 짜임새가 좋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였다.


정승혜의 춤은 짜임이 강해서일까, 엮음(Interweaving / Networking)이 느껴지지 않았다. 엮음이란 무엇일까. 엮음이란 끈이나 새끼 따위로 여러 물건을 하나로 묶거나 잇는 것, 혹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서로 연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굴비를 엮다’, ‘이야기를 엮다’라는 표현이 있다. 정승혜의 춤은 말하자면 학교 선생님의 설명 같은 춤이었지만, 반 친구의 이야기 같은 춤이 아니었다.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엮음’은 관계와 연결(Connection)의 개념이다. 서로 다른 독립된 개체들이 어떤 고리나 인연에 의해 얽히고설키는 상태를 말한다. 엮음은 유연함과 가변성에서 나온다.


정승혜의 구음검무에선 춤꾼의 몸에 힘이 단단하게 들어간 느낌이다. 엄격하지만 유연하지 못했다. 이 춤은 마치 ‘인연의 실타래’(엮음)처럼 춤을 추는 게 더 좋을 텐데, 정승혜는 마치 건축물의 골조(짜임)를 더 많이 보여주려는 느낌이었다.


③ 정희선의 승무: 종교성과 예술성 사이



“그 많던 승무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다. 일제강점기의 권번 예인은 검무와 승무가 기본이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검무와 승무를 추었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승무는 마치 몇 개의 표준화된 교칙의 춤으로 정착했다. 이제 우리는 그 많던 승무를 ‘근거 있는 상상력’으로 복원해야 한다. “김경란 작 승무”가 그런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승무를 다 본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본 춤 중에서는 정희선의 춤이 가장 좋았다. 예술적으로 우수하지만, 정희선의 춤에는 오히려 지금의 승무에서 느껴지지 못하는 ‘종교성’이 느껴진다. 진정 승무를 잘 추려고 추는 춤이라기보다는 ‘구도의 자세’와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앞부분의 태평소 부분에서 특히 그러했다. 무대에서 추는 승무가 아니라, 절에서 재를 올릴 때 추는 승무와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참 좋았다.


내 시각에선 이번 공연에서의 최고의 수확이다. 김경란의 의도를 정희선이 너무도 잘 살려냈다. 정희선은 북을 꽤 잘 다루었다. 오히려 다소 과잉된 장구의 밑장단이 정희선의 북의 매력을 반감할 때도 있었다. 리듬을 탈 줄 알고 완급조절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김경란 대표가 글에서 썼듯이 정희선은 무심(無心)이 무엇인가를 안다.


④ 성윤선의 교방굿거리춤: 아티스트와 엔터테이너 사이



성윤선의 춤은 관객이 가장 좋아했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이 춤은 대다수가 좋아한다는 걸 전제로 해서 이 춤꾼을 얘기하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두가 yes인데, 한 사람만 no를 했다’고 치자. 그 한 사람이 윤중강이고, 그렇게 전제해야 내가 이 글을 솔직하게 쓸 수 있다. 성윤선은 관객을 의식한 과한 흥을 자제해야 한다. 성윤선의 춤에서야말로 무심(無心)이 절실하다.


성윤선과 같은 춤에는 늘 ‘흥’을 연결한다. 한국춤의 주요한 요소인 ‘흥’을 무대에서 매우 잘 구현하는 것으로 얘기한다. 나는 ‘한국춤’의 본질이 이런 형태의 흥은 아니라고 본다. 이건 과거 ‘민속춤’의 형태에서의 ‘흥’이라고 생각한다.


성윤선에게 지금은 고인이 된 두 분의 명언을 전해주고 싶다. 김소희 명창이 말했다. “무대에서 창자(소리꾼)는 우는 것처럼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관객이 울어야 한다. 소리꾼이 울어서는 안 된다.” 감정의 절제이고, 예술적 승화란 이런 것이다. 이분은 평생 관객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관객을 다가오게 했다. 그래서 김소희 명창이 매우 독보적이다.


‘춤’의 발행인이기도 한 조동화 선생은 생전 ‘민속춤’을 크게 인정하지 않았다. ‘민속춤’이 싫어서일까? 전혀 아니다. 민속춤을 추는 이들의 춤을 대하는 태도, 춤판에서 뭔가 발산(發散)하려는 발상(發想)을 경계한 것이다.


성윤선의 춤을 보면서 1980년대의 명무전이 겹쳤다. 그 시절 지역에서 활동했던 명무는 관객의 반응이 너무 뜨겁다 싶으면 오히려 춤을 멈췄다. 손 하나 올리고 발 하나 들고 가만히 계셨다. 그러고 나서 열기를 식히고 나서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그거야말로 ‘고급진’ 흥이다.


춤은 ‘발산’이 아니다. 리듬과 장단을 가져와서 흥으로 연결하는 건 예술적인 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진정 그렇게 객석 위까지 올라갈 필요가 있을까? 앞에 있는 관객을 일으켜 세워서 춤을 추어야 할까? 춤꾼이 자신에게 집중해서 춤을 추면서 그것 자체로 감동을 줄 순 없을까. 나는 늘 아티스트로서의 성윤선이 보고 싶은데, 종국에는 ‘엔터테이너’가 되어버린 춤꾼을 평한다는 건 진정 곤혹스럽다. 내가 지금까지 본 성윤선의 춤에서는 ‘논개별곡’이 좋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무대에 집중했고, 춤에 집중했기에 그렇다.


⑤ 장인숙의 민살풀이춤: 김경란과 장인숙 사이



연행하는 춤꾼이 있고, 연구하는 춤꾼이 있다. 장인숙은 확실히 후자다. 그동안 연구했던 것이 무대에서 드러난다. 나는 ‘나이가 드러나는’ 춤이 좋다. 산조가 그렇듯이, 그 나이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장인숙에게서는 분명 연륜(年輪)이 느껴졌다. 어떤 면에서 자신의 나이보다도 더 많은 – 마치 김경란의 나이에서 추는 춤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오늘 무대에 오른 6인의 춤꾼 가운데서 김경란을 가장 많이 아는 춤꾼은 단연 장인숙이었다. 어느 부분에서 놀랄 정도로 김경란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걸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 지금 장인숙은 ‘김경란과 장인숙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이렇게 김경란을 완전히 마스터 했으니, 이제 지금부터는 장인숙이 될 것 같다. 장인숙에게서는 ‘밀고 가는’ 힘이 느껴진다. 이건 밀어붙이는 것과도 다르다. 춤이 수직적으로 잘리는 게 아니라, 춤이 수평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산조를 잘 타는 사람이 이러한데, 장인숙의 춤도 그랬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에너지를 축적해 갔는데, 자진모리 앞부분이 좋았다. 교방춤의 앉은반(앉은 놀음)이 이런 것이란 걸 보여주었다. 사실 교방춤이란 것이 무대춤화 되어 동선도 넓어지고 동작도 커지지만, 실제 방안 춤 형태의 교방춤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많은 에너지를 축적한 가운데 동살풀이에서 순차적으로 ‘장단을 타고’ ‘가락(사위)을 푸는’ 방식이 좋았다. 확실히 음악을 아는 춤꾼임이 분명하다. 나의 시각으로 볼 때 이번 공연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춤꾼은 정희선이지만, 앞으로 가장 기대되는 춤꾼은 장인숙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아주 분명하게 해둘 게 있다. 과연 이 춤이 ‘장금도제’일까. 나는 확연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장인숙이 추는 교방굿거리춤에는 분명 ‘김수악’이 존재한다. 그러나 민살풀이춤은 아니다. 이 춤은 김경란을 본(本)으로 삼은 장인숙의 춤이다. 춤태에서 춤집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이 보였다.


⑥ 김부경의 논개별곡 : 춤과 음악 사이



김부경은 감정으로 춤을 추지 않는다. 김부경은 이성으로 춤을 추지도 않는다. 김부경은 느낌으로도 춤을 추지 않는다. 김부경은 동작으로도 춤을 추지 않는다. 그럼 김부경은 어떻게 춤을 추는가. 몸 자체가 춤이었다. 굉장한 안정감이 있다. 특히 이번 무대를 통해서 더욱 그런 것이 느껴졌다.


나는 논개별곡의 음악이 논개별곡의 춤과 딱 부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논개별곡이 교방춤이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또한 논개별곡의 서사성을 인정하지만, 이런 서사가 확연하게 드러날 때 이 춤이 시대착오적인 신파조가 될까 봐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김부경은 이런 ‘서사의 과잉’과 ‘신파의 우려’를 깔끔하게 씻어주었다. 지금까지의 논개별곡도 저마다 특징이 있었지만, 이 논개별곡은 가장 고상하고 품격 있는 논개별곡이었다. 


논개별곡을 잘 추기 위해선 자신이 논개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지금 논개를 추모하는 자리이고 그런 느낌을 살려서 추어야 할까? 나는 둘 다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내게 김부경의 논개별곡은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고, 춤꾼으로서의 존재감을 품격 있게 살려냈다.


그런데 확실하게 해둘 말이 있다. 오늘 김부경의 춤은 좋았지만, 그것이 음악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과거에는 25현 가야금 하나로 족했는데, 여기에 대금까지 등장하니 음악이 어수선했다. 이건 연주곡으로는 좋을진 몰라도, 춤 반주로서는 아니다. 대금은 훌륭한 연주자이지만, 실제 춤과는 유리(遊離)된다. 춤의 호흡을 생각하지 않고 불었다. 중간에 대금이 잠시 쉬는데, 난 그 부분에서 안도의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김부경이 대단한 건 이런 음악 속에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춤을 계속 끌고 간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이 작품이 좋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김부경은 ‘자신 호흡이 분명한 춤꾼’이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었다.


보통 민속악 중심의 반주를 듣다가 25현 가야금의 ‘논개별곡’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진정 <논개별곡>을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25현 가야금 독주건, 이렇게 앙상블로 하건, 실제 춤꾼과 악사(반주)가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면서 다시 음악을 만들 필요가 있다.


5. 맺음말: 계보와 무관한 독창적 스타일의 정립


서울교방의 춤은 이제 전승(Transmission)이란 말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서울교방의 춤은 너무도 스타일화(Stylization)되었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그래서 걱정도 된다.”


서울교방의 춤은 이미 다른 미학적 층위로 이동했다. 서울교방에게 지금 필요한 건 ‘말의 정직성’이 아닐까. 서울교방의 춤은 내 시각에선 계보를 잇는 춤은 아니다. 교방춤이 텍스트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 시각에선 동시대적 혹은 소극장 춤으로 스타일화 된 춤이다. 교방춤이 레퍼런스로 작용하기에 교방춤과 연관된 지역성과도 별개다. 서울교방춤은 오히려 계보에서 솔직해질 때, 서울교방은 더욱더 훌륭한 단체로 우리 곁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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