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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댜길레프의 유산, 볼쇼이발레단이 되살린 포킨의 발레

공연비평

 

Vol.127-2 (2026.3.20.) 발행


글_ 이희나(춤평론가)

사진제공_ 볼쇼이극장



프랑스인 마리우스 프티파는 유럽의 발레를 러시아로 가져왔고 러시아를 고전 발레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 후로 몇십 년 지나지 않아 미하일 포킨을 비롯한 니진스키, 카르사비나, 파블로바 등의 발레 예술가와 베누아, 박스트, 골로빈 등의 미술가,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의 음악가들은 러시아의 발레를 유럽과 미국으로 다시 전파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세르게이 댜길레프(Сергей Дягилев)라는 대단한 임프레사리오(impressario)가 있다. 댜길레프는 러시아의 예술을 서방 세계에 알리고자 예술 이벤트를 기획하고 작품을 제작하였던 비평가이자 선구적인 기획자, 프로듀서였다. 20세기 초, 러시아 출신의 무용가들과 예술가를 모아 ‘발레 뤼스(Les Ballets Russes)’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며, 이 발레단은 오늘날 몬테카를로 발레단(Les Ballets de Monte-Carlo) 등 여러 단체로 계승되었다. 고전 발레의 틀을 깨고 당시에 만들어진 획기적인 작품들은 발레사에서 ‘혁신’과 ‘파격’의 대표적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의 예술적 성취는 가히 혁명적이며 응축적이었다. 발레의 역사에서 이 시기만큼 새로움을 갈망했던 순간은 드물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댜길레프를 소환한다. 발레가 예술의 선두에 섰던 영광의 시대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문화 교류가 단절된 지금, 러시아 예술을 개방하고 세계와 연결하려 했던 댜길레프의 시대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아닐까.

 

러시아 시즌 공연을 위한 특별제작 커튼 ⓒ 이희나

 

공식적으로 ‘발레 뤼스’라는 명칭을 달기 전, 댜길레프가 이끄는 공연의 이름은 ‘러시안 시즌(Les Saisons Russes)’이라는 뜻의 ‘루스키 쎄조늬(Русские Сезоны)’였다. 러시아에는 댜길레프의 업적을 기리며 당시 공연했던 작품들과 이에 영감을 받은 창작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We need Diaghilev(Нам нужен Дягилев)’ 프로젝트가 주기적으로 열린다. 이와 별도로 볼쇼이극장에서는 작년(2025) 여름 ‘러시아 시즌’의 주요 작품을 묶어 공연하는 ‘스트라빈스키 발레’라는 기획이 있었다. 장장 4시간 반에 걸쳐 〈결혼(Свадебка; Les Noces)〉과 〈봄의 제전(Весна священная; Le Sacre du printemps)〉 (마린스키발레단), 〈페트루슈카(Петрушка; Petrushka)〉와 〈불새(Жар-пти́ца; L'Oiseau de feu)〉 (볼쇼이발레단)를 한 무대에 올리는 대대적인 공연이었다. 무용사 서적으로만 접했던 역사적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마주하자, 마치 20세기 초 파리의 공연장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었다.

 

<결혼>  Фото Павла Рычк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봄의 제전>   Фото Павла Рычк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이 기획의 연장선으로 볼쇼이발레단은 2025년 11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데(Шехеразада; Scheherazade)〉를 다시 제작하여 〈페트루슈카〉 〈불새〉와 함께 ‘포킨의 발레’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올렸다. 필자는 지난 2월 24일 했던 공연을 관람하였다(2.24.-2.25. 공연). 모든 작품들은 베누아(А. Бенуа)와 골로빈(А. Головин), 박스트(Л. Бакст)의 스케치, 과거 볼쇼이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현재 공연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안드리스 리에파(Андрис Лиепа)가 보유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복원되었다.


〈페트루슈카〉는 봄을 맞이하는 마슬레니차 축제가 열리는 19세기 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성미 가득한 무어인과 그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발레리나, 그리고 발레리나를 사모하는 소심하고 보잘것없는 페트루슈카의 이야기가 주축을 이룬다. 무어인은 마초적이고 과장된 움직임으로 춤을 추고 발레리나는 유려한 파드부레(pas de bourrée)로 진짜 인형과 같은 매력을 발산한다.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뾰족하고 튀는 듯한 연주에 맞춰 꼭두각시 페트루슈카는 우스꽝스럽게 뚝딱거리며 점프를 하는데, 어느 한 부분에서도 전혀 영웅적이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전형을 보여주어 오히려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세 명의 캐릭터와 별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 저잣거리에서 열리는 서커스와 인형극, 민속춤과 민속가면 등 러시아적인 색채가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봄맞이의 활기참과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페트루슈카>  Фото Михаила Логвин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불새>  Фото Павла Рычк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불새〉 역시 지극히 러시아적인 소재의 단막 발레다. 불꽃같은 깃털을 지닌 불새는 〈곱사등이 망아지(Конек-горбунок)〉와 같은 러시아 전래동화나 슬라브 전설에 종종 등장하는 캐릭터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새다. 발레의 스토리는 매우 단순하다. 밤의 정원에서 불새를 포획한 이반 왕자는 불새를 풀어주는 대가로 깃털 하나를 받는다. 여기서 마법에 걸린 아름다운 공주와 마왕 무리를 만나 위기에 처하지만 깃털로 소환된 불새가 그 영험함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도움을 준다. 스토리의 단순함은 불새의 독보적 카리스마로 보완이 된다. 비상(飛上)하듯 무대를 가로지르는 불새의 점프와 에너지는 다른 모든 캐릭터의 매력을 압도할 만큼 부각되었다. 


이날 공연된 세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셰헤라자데〉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이국적인 음악에 맞춘 화려하고 관능적인 아라비아 하렘의 무대가 30여 분간 지속되었는데 그 역동성과 긴장감은 숨이 멎도록 아름다웠다. 프렐류드-발라드-아다지오-피날레로 진행되는 네 개의 악장은 애초에 『천일야화』에 기반을 둔 모험 이야기들의 테마로 설정되었으나 포킨은 이를 사랑과 배신, 질투와 분노의 이야기로 변모시켰다. 술탄 샤리야르가 사냥을 나간 사이 하렘에서는 난교 파티가 벌어지고 왕비 조베이다는 황금노예와 사랑을 나눈다. 사냥에서 돌아와 이를 목격한 샤리야르는 현장에 있던 모든 아내와 노예를 처형하고, 결국 조베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발레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 후 샤리야르는 혼인을 하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줄줄이 아내를 죽이게 된다. 그와 혼인을 하게 된 셰헤라자데는 지혜를 발휘하여 매일 밤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렇게 천 하루 밤을 함께하게 되며 결국 사랑을 얻게 된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천일야화’이며, 정작 셰헤라자데가 등장하지 않는 발레 〈셰헤라자데〉는 ‘천일야화’의 서곡인 셈이다.


새로 연출된 〈셰헤라자데〉는 박스트가 디자인한 무대막이 닫힌 상태로 약 10분간의 서막이 연주되면서, 시선이 이동하듯 조명이 무대막을 훑는다. 막에 그려진 아라비아의 산세, 폭포수,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동물들, 벼랑에 설치한 정자에서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 사냥을 다녀오는 왕의 행렬의 모습은 작품의 전개를 암시하며 관객의 궁금증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막이 열리자 펼쳐지는 원색의 현란한 무대는 공연장 전체를 이국적 향연의 장으로 만든다. 화려한 하렘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조베이다와 황금노예의 에로틱한 춤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어지는 왕비와 노예들, 무희, 그리고 조베이다와 황금노예가 교차하며 방탕한 파티의 절정을 맞이하면 곧바로 샤리야르의 처형이 이어지며 끝을 맺는다. 이 짧고도 강렬한 단막극의 춤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깔끔한 흐름과 맺음이었다. 휘몰아치는 군무는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공(Князь Игорь)〉의 2막에 삽입된 포킨의 안무 ‘폴로비치안 댄스’의 장렬하고 아름다운 춤을 연상케 했다.


 

<셰헤라자데>  Фото Дамира Юсуп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이날의 캐스팅은 크리스티나 크레토바(Кристина Кретова)의 조베이다와 블라디슬라프 란트라토프(Владислав Лантратов)의 황금노예였다.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가장 빛난 순간은 이 둘의 이인무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분 차이와 금지된 비밀스러운 관계만큼 에로티시즘의 강력한 소재도 없을 것이다. 크레토바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욕망으로 파트너를 유혹하며 다스리는 왕비의 매력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거나 노예의 몸을 훑는 움직임, 팔다리를 꼬고 황금노예를 홀리는 듯한 손짓과 긴 목선 등의 에로틱한 몸짓이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감탄스러웠던 춤은 란트라토프의 황금노예였다. 탄탄하게 단련된 몸은 남성적이면서도 관능적이고, 힘이 있지만 거칠지 않았다. 손목과 팔을 부드럽게 꺾으며 상체를 뒤로 젖히는 포즈, 중심을 낮추고 몸을 굽혀 앉아서 올려다보는 눈빛은 초연 당시 사진에서 본 니진스키의 황금노예의 느낌 그대로였다. 고전 발레에서 나타났던 영웅적 남성상에서 벗어나, 남성이 욕망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안무를 맡았던 포킨의 기록에 따르면 니진스키 황금노예의 매력은 야성적이지만 남성성이 빠진 섬세한 아름다움이라 하였는데(프로그램북), 란트라토프가 구현한 황금노예가 딱 그러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듯 여리지만 끊이지 않는 바이올린 솔로의 아다지오 선율에 맞추어 상대를 유혹하는 느린 몸짓은 곧이어 폭발적 점프와 유려한 턴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며 느릿느릿 교차하는 움직임은 야수의 동물적 본능을 일깨운다. 바닥에 누워 허리를 활처럼 젖히는 황금노예의 몸 위에 손을 갖다 대며 멈추는 긴장감 넘치는 끝맺음까지,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준 씬이었다. 아라비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포킨의 안무는 동양적 움직임이나 실제 그들의 춤과는 관련이 없는 오리엔탈리즘적 색채를 띤다.

 

<셰헤라자데>  Фото Дамира Юсупова Большой театр.

 

이 모든 감탄과 놀라움의 끝에 마주하는 건 결국 창작자들의 힘이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작품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파격적인 움직임 언어를 만들어 낸 포킨과, 박스트·베누아·골로빈의 예술적 상상력, 스트라빈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천재적 음악, 댜길레프의 기획력과 선구안이 어우러져 시대를 대표하고 역사에 남는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한 세기 전 파리에서 시작된 이 예술적 실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복원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 무대는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발레가 한때 얼마나 대담한 예술이었는지를 다시 환기한다. 볼쇼이의 이번 무대는 그 유산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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