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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공동체의 시간, 춤으로 번역하다: 국립무용단 <2026 축제>

공연비평

Vol.128-2 (2026.4.20.) 발행


글_ 최해리(본지 발행인)

사진제공_ 국립극장


 

<고무악>

 

설과 대보름이 다가오면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거대한 이동이 시작된다.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 행렬,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풍경, 그리고 명절을 맞아 공연장을 찾는 문화적 이동까지.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은 단순한 명절 풍경을 넘어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세시풍속의 현대적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세시풍속은 액운을 물리치고 새로운 기운을 맞이하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공동체적 의례였으며, 동시에 삶의 굴곡을 풀어내는 사회적 약속이기도 했다. 민족미학자 채희완이 말했듯 세시풍속은 우리 민족이 함께 만들어 내는 ‘민중적 미의식의 근원’이다.


국립무용단의 명절 레퍼토리 <축제> 시리즈는 이러한 집단적 문화 기억을 춤으로 환기하는 프로젝트다. 김종덕 예술감독은 2024년 ‘신을 위한 축제’, 2025년 ‘왕을 위한 축제’에 이어 올해 ‘백성을 위한 축제’로 시리즈의 마지막 장을 완성했다. 이번 공연은 정월대보름에서 동지에 이르기까지 한 해의 절기와 세시풍속을 따라 민속춤 레퍼토리를 배치하며 공동체의 삶과 염원을 무대 위에 다채롭게 펼쳐냈다.


공연의 시작은 정월대보름을 상징하는 송범의 <강강술래>였다. 짙은 밤하늘 아래 둥근 달을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서 여성 무용수들이 원을 그리며 확장하는 군무는 공동체적 연대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전통 강강술래의 놀이 요소를 조형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마치 집단 산조를 보는 듯한 흐름 속에서 차분한 ‘정(靜)’의 미학으로 공연의 서막을 열었다. 특히 무용수들의 발디딤이 만드는 일정한 리듬은 대지를 깨우는 기원(祈願)의 몸짓으로 읽혔다.


한식의 <살풀이춤>과 사월초파일의 <승무>는 독무로 알려진 전통춤을 군무 형식으로 재구성한 무대였다. 박영애와 채향순의 재구성은 원형의 리듬과 춤사위를 유지하면서도 군무 특유의 조형성과 호흡을 강조했다. <살풀이춤>의 섬세한 발디딤과 <승무>의 장삼놀음은 고요 속에서 움직임이 피어나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개별적인 슬픔과 수행을 공동의 위로와 승화로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단오를 기점으로 공연의 에너지는 절제된 선의 미학에서 역동적인 신명의 장으로 전환된다. 정길만 안무의 <군자지무>가 단오의 기품과 절도를 남성 군무로 표현했다면, 장현수의 여성 군무 <검무> <장고춤>은 유두와 백중의 세시 의미를 경쾌한 리듬과 역동적인 동선으로 풀어냈다. 특히 <장고춤>에서 검정 비로드 저고리에 녹색 치마를 두른 여성 무용수들이 장고의 리듬을 맵시 있게 변주하자 무대의 에너지는 한층 고조되었고, 관객의 호흡 역시 자연스럽게 공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장고춤>

  

이번 공연에서 특히 주목할 지점은 국립무용단 중견 단원들의 안무 역량이다. 그동안 외부 연출가들과 협업하면서 축적된 세련된 미의식과 집약적인 군무 동선이 이들의 안무 속에 자연스럽게 체화된 모습이었다. 이는 세시풍속이 지닌 또 다른 특징인 ‘전복성’과도 맞닿아 있다. 명절의 축제 속에서 민초들이 양반의 권위를 풍자하며 판을 벌이듯, 무용수들이 안무가로서 전통을 재창조하는 주체로 등장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즐거운 전복이었다.


공연 후반부는 추석을 상징하는 박재순의 <보듬고>와 피날레인 동지의 <고무악>으로 이어졌다. 진도북춤과 승무의 북가락을 변주한 남성 북춤 군무는 무대 전체를 울리는 강렬한 리듬으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공연의 에너지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남녀 혼성의 북춤은 오고무와 칠고무가 만들어 내는 겹겹의 울림으로 고대 제천의식의 영고(迎鼓)를 연상시키며 집단적 신명의 장을 형성했다. 여성적인 ‘땅의 길’에서 남성적인 ‘하늘의 길’로, 그리고 다시 인간의 길로 이어지는 천지인(天地人)의 사유가 춤의 흐름 속에 스며 있었다.

 

<군자지무>

  

<강강술래>

 

이번 공연이 열린 하늘극장은 원형 구조의 공간이다. 자칫 사각지대가 생기기 쉬운 구조지만, 김종덕 감독은 악사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배치하고 무용수들의 등퇴장을 객석 통로까지 확장함으로써 공간의 한계를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마치 마당의 연희적 에너지가 극장 공간으로 확장되는 듯한 생동감을 주었고, 관객을 단순한 관람자를 넘어 축제의 일원이 되도록 만들었다.


세시풍속의 생명력과 공동체적 신명을 춤의 언어로 재현해 낸 이번 무대는 한국춤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조망해 보는 의미 있는 성취였다. 결국 <2026 축제>는 세시풍속이라는 시간의 구조를 춤의 구조로 번역한 공연이었다. 이 무대는 전통춤이 박물관의 유산이 아니라 공동체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현재형의 예술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검무>

  

<보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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