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8-2 (2026.4.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박용휘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이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초 공연예술 분야 우수 신작을 발굴해 제작부터 유통까지 창작 전 과정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 1월부터 3월까지 연극, 무용, 음악, 전통예술, 창작오페라, 창작뮤지컬 6개 부문에서 총 34편의 신작이 관객들과 만났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박용휘가 제작 프로듀서를 맡아 선보인 전통예술 신작 <봄을 안고 온 아이>(3.20.-3.22,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창작진의 면면부터가 ‘믿고 보는’ 조합으로 구성되었다. 글과무대의 작가 진주, 연출 이인수, 음악그룹 나무의 음악감독 최인환,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소리꾼 박인혜, 천하제일탈공작소의 탈꾼 이주원, 장해솔, 이정동, 김시은이 의기투합했고, 연주자로는 최인환(베이스) 외에 황민왕(북과 장구), 오초롱(생황과 피리), 김범식(아쟁)이 함께했다.
아이는 첫눈이 오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까
<봄을 안고 온 아이>는 사랑하는 아가씨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이가 주인공인 구원과 모험의 이야기다. 공연의 줄거리는 ‘영웅의 여정’의 익숙한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다. 3막으로 구성된 이 구조는 세분화해서 보통 12단계로 분석하지만, 여기서는 ‘떠남-시련-귀환’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만 추출해 이야기해도 충분할 것이다.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는 아주 먼 옛날, 거지 아이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언젠가 매질을 막아준 적 있는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키워가고 있다. 아가씨의 병이 깊어진 걸 알게 된 아이는 약으로 쓸 꽃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한다. “첫눈이 오기 전에 돌아올게요”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기고. (떠남)
아이는 농부, 욕쟁이 할멈, 낚시꾼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관계를 맺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다.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집에 머무르게 해준 욕쟁이 할멈은 아이를 떠나지 못하도록 감금하고, 할멈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아이가 꽃밭으로 가는 강을 건너려 하자 수상해 보이는 낚시꾼이 위험을 경고하며 만류한다. (시련)
그러나 아이가 겨우 꽃을 구한 순간,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첫눈이 오기 전에 아가씨에게 돌아간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아이는 늦게라도 꽃을 안고 아가씨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만, 병든 아가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다. 아이는 아가씨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죽은 아가씨는 꽃잎을 휘날려 돌아온 아이를 반겨준다. 아이는 아가씨의 병을 낫게 하진 못했지만, 아이의 정성은 아가씨에게 전달된 것이다. (귀환)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의 성별이 바뀔 때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4회차의 공연이 2회차는 소년 버전, 2회차는 소녀 버전으로 설정되어 젠더 프리로 운영된 것이다. 이 같은 운영에 대해 연출을 맡은 이인수는 창작산실 기자간담회에서 “모험담이나 성장담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소년을 상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에서 소녀가 주인공이라면 어떨까, 그 두 버전을 모두 보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바뀌는 인생의 행로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똑같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주인공만 소년 혹은 소녀로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놀랍게도 인물 간 관계성이나 시련에 대한 감각, 장면의 분위기 등 공연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이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관객들 역시 이러한 요소의 변화에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해 받아들이게 된다.
성별의 변화로 인해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아가씨와 아이의 관계성이다. 소년의 이야기에서 소년이 모험을 떠나는 동기는 아가씨에 대한 연정이다. 이성애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공주를 구하는 기사의 모험담으로 쉽게 치환해 이해한다. 반면 소녀의 이야기는 좀 더 다층적인 결을 지닌다. 관계를 이성애로 읽는 것이 편한 관객들이라면 이들의 관계성을 우정이나 연대로 해석할 것이고, 퀴어 서사에도 열려 있는 관객들이라면 이들의 관계성 역시 성애적으로 읽을 것이다. 또한 두 버전 중 어떤 버전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서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시련을 당하는 이가 소년인지 아니면 소녀인지에 따라서도 정서적 반응이 다르게 도출된다. 소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소녀의 모험담에서, 소녀가 당하는 시련은 한층 불편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특히 극중에서 감금의 주체가 할멈으로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할멈으로 분한 출연자는 덩치 큰 남성이며, 그가 남성임을 인지한 채로 공연을 보는 관객들에게 감금된 어린 소녀라는 이미지는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삶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는다
아이가 욕쟁이 할멈을 만나는 장면에서 공연은 갑자기 제4의 벽을 깨고 이것이 무대 위의 이야기이며 출연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아니라 연기자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욕쟁이 할멈을 상대하던 아이 역의 배우는 갑자기 탈을 벗고 무서워서 연기를 못 하겠으나 다른 인물로 바꿔 달라고 하고, 출연자들은 탈을 바꿔 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연기를 이어 나간다.
출연자 네 명이 여러 인물을 소화해야 하기에 공연은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출연자가 탈을 바꿔 쓰고 다른 인물을 연기하며 전개되지만, 이 장면은 젠더 프리극을 표방한 공연 안에서 극중극으로 다시 한번 젠더 벤딩을 시도하며 성별 역할 구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한 번 더 뒤집는다. 출연진 전원이 탈꾼이라는 점을 이용한 재치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아이의 눈물이 꽃을 피워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결말은 여운을 길게 남긴다. 전통 설화에서는 바리데기가 생명수를 구해와 죽은 아비를 되살리고, 서구의 기사 신화에서도 기사가 성물로 병든 왕을 치유하고 공주와 결혼하는 결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 결말에 아쉬움을 느낀 관객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창작진은 공연 소개에서 “소중한 것은 노력과 희생 없이는 얻어지지 않으며, 삶이 언제나 그에 따른 보상을 약속하지는 않는다”라고 써놓고 있는데, 이 문장을 읽고 결말을 곱씹는 관객들은 아이가 맞이한 해피엔딩에 안도하며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하고도 원하는 보상을 얻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자신의 현실에 투영해서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연은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는 가족극 성격을 갖지만 그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가깝다.
작창을 맡은 박인혜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최민환은 <종이꽃밭: 두할망본풀이>, <판소리 쑛스토리> 등에서 호흡을 맞추며 총체극으로서의 음악극이 얼마나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어내지 익히 증명한 바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장면 전환이나 인물의 동선 등에서 다소 어수선해질 수 있었던 무대를 음악의 힘으로 채우며 관객들을 끝까지 몰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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