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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믿음으로 일궈낸 사유의 기세, 그 몸의 기록: 노해진 <맥(脈): 몸에 새긴 춤>_ 2026. 04. 11. 서울남산국악당

공연비평

Vol.128-2 (2026.4.20.)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노해진무용단 Ⓒ 양동민


 


1. ‘춤을 잘 춘다’는 말


‘춤을 잘 춘다’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춤을 잘 춘다’고 한다. 춤을 잘 춘다는 건, 우선 춤의 기본기를 잘 갖추고 있는 것이고, 또한 어떤 춤에도 적응력이 뛰어난 경우를 말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해진은 분명 ‘춤을 잘 춘다’. 일단 ‘기본’이 되어 있다. 여기서 기본은 한국 전통춤의 기본이요, 또한 국수호춤의 기본을 동시에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노해진에게 ‘춤을 잘 춘다’고 말하는 게 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춤을 잘 춘다는 건 늘 ‘동작’과 ‘움직임’을 연상하기에 그렇다.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를 많이 알 것이다. 노해진은 동작과 움직임이 좋지만, 노해진이 추구하거나 지향하는 바는 이러한 ‘동작과 움직임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언제부턴가 춤을 잘 춘다는 게 거의 ‘기술’을 뜻하게 되었다. 기술과 예술, 혹은 기교와 정신은 마치 두부를 칼로 자르듯이 두 조각으로 구분할 순 없겠지만, 기술은 있어도 예술이 부족하고, 재주라고 말할 수 있는 기교는 충만해도 그것을 품격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사고의 기반을 갖추지 못한 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말을 바꾼다면, ‘기본은 없고 기교만 있는’ 춤 또한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나는 노해진이 춤을 잘 춰도, ‘노해진은 춤을 잘 춘다’는 말이 조심스럽다. 그 말이 노해진의 춤의 기술과 기교를 말하는 것으로도 들릴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또한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춤이 ‘사유적 깊이가 충만한 예술적 행위’라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이런 춤꾼이 정작 무대에서 ‘기본이 부족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고, 또 어떨 땐 그 도가 좀 지나쳐서 일종의 배신감 같은 걸 느끼게 되기도 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춤을 잘 춘다’는 건 무엇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지금은 ‘춤은 믿음’이라고 답하고 싶다. 잘 추는 춤, 감동의 춤을 보면 공통적인 걸 발견한다. 바로 춤꾼이 ‘무언가에 대한 믿음’의 확고함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건 분명 첫째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다음은 자신이 추고 있는 춤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2. 과장과 과시를 넘어선 ‘신중한 과감함’


노해진의 이번 춤판 <맥(脈): 몸에 새긴 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이번 춤판은 ‘믿음의 결과물’이다. 거기엔 노해진이란 춤꾼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또 자신이 지금까지 오래도록 추어 온 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예술이건, 종교이건, 생활이건, 무언가에 ‘진정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 거기엔 과장도 없고, 과시도 없다. 진심만 있다. 그런 진심에 충실하다. 예술 장르 중에서, 특히 춤에 대한 평가는 매우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이번 노해진의 춤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지 간에, 이번 춤판을 보고 다수가 공통으로 하는 말은 분명하다. “노해진의 춤에는 과장과 과시가 없다.”


다시 진정 춤을 잘 추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앞에서 한 내 말을 정리해 보자.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자신의 춤과 자신의 춤 계보에 믿음이 있다. 그러한 춤에는 과장과 과시가 없고, 춤을 추는 사람의 진심이 보인다.”


노해진의 <맥(脈): 몸에 새긴 춤>엔 과장과 과시가 없고 대신 ‘신중함’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신중함’을 잘 이해해야 한다. 흔히 신중함은 ‘조심스러움’과 연결이 된다. 그러나 노해진은 그 반대였다. 노해진이 여러 차례의 리허설을 거친 후, 실제 ‘단 한 번뿐인 본 공연’에서 보여준 건, ‘자기 자신과 자신감이 있는 신중함’이었다. 


노해진은 이제 춤의 내면을 보여주는 단계에 분명히 이르렀다. 그런 내면을 보여줌에 있어서 ‘심리적 부담감’ 또는 ‘정서적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히 난 조금 놀랐다. 나는 그간 국수호 명무와 관련된 춤판을 비교적 오래 깊이 보아왔는데, 노해진이 이토록 ‘내공’을 갖춘 춤꾼이라는 걸 잘 몰랐다.


3. 입춤: 배우고 익힘(學而時習)의 공력


유튜브 영상 중에 ‘국립무용단 기본’이 있고, 노해진의 시범이다. ‘한국춤의 교과서’와 같은 이 춤을 노해진이 보여주고, 이 영상은 많은 한국무용 전공자에게 ‘춤동작의 교과서’처럼 알려졌다. 이 유튜브 영상 댓글 중 하나가 이렇다. “기교 없이 단아하고 진짜 기본에 충실한 춤이다. 요즘은 국립 기본무를 호흡도 너무 넣고 기교도 넣어서 추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 그대로 교과서 기본무 답게 단아하고 깔끔하다.”


노해진의 내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진정 기본을 기본답게 출 수 있는 노해진의 능력은 무엇과 연관이 있을까. 노해진은 국수호 명무 문하에서 30년을 넘게 춤을 수련해왔다. 노해진의 춤을 보면서 공자가 한 말이 그대로 떠올랐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또한 때때로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다시 노해진에게로 돌아가 보자. 이번 춤판을 다시금 복기(復棋)하듯 더 깊이 살펴보자. 또한 국수호 문하를 떠올려보자. 국수호 문하에서 춤을 ‘배운’ 사람은 무수히 많다. 그들이 국수호춤을 ‘배운’ 사람이다. 국수호춤을 ‘익힌’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익힘’에도 편차는 분명하다.


이번 무대에서 노해진이 첫 번째로 보여준 ‘입춤’은 배운 춤이 아니고 익힌 춤이었다. 앞의 국립무용단 기본 영상의 예를 들었듯이, 노해진은 ‘기본에 충실한 춤’을 추는 춤꾼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기본에 충실한 춤을 춘 세월이 꽤 되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내가 공력이란 말을 쉽게 쓰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 경우는 꼭 들어맞는 말인 듯하다. 노해진의 입춤을 보면서 확신이 생겼다. “이번 공연은 이후가 어찌 되었든 ‘성공의 춤판’이겠구나.”



4. 섬세함을 넘어선 ‘기세(氣勢)’의 춤


과연 이런 노해진이라는 춤꾼을 어떤 단어와 문장으로 얘기하는 게 바람직할까. 나는 먼저 “다른 사람은 노해진의 춤을 어떤 단어를 가져와서 글로 표현할까”가 궁금했다. 노해진에 관해서 글을 쓴 사람이 노해진의 춤을 높이 평가함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단어의 선택 등에 있어선 나와 꽤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따라서 내 글은, 그 글을 쓴 사람이 사용한 단어나 표현을 가져와서 그것과 다른 내 입장을 얘기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이 내가 노해진의 춤을 보는 시각을 바르게 알리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노해진이라는 춤꾼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럿이라는 걸 알리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이는 노해진의 춤을 ‘섬세함’과 연결했다. 사실 ‘섬세함’이란 단어는 춤과 관련된 글에서 너무도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때로는 이렇게 글쓴이에게 오히려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당신이 본 춤에서 섬세하지 않은 춤은 어떤 것인가.” 춤에서의 섬세함은 기본이 아닐까.


노해진을 섬세함과 연결해 보자. 이렇게 질문해 보자. “노해진은 섬세함을 보여주려고 이 춤판을 준비했을까?” 분명 아니다. 노해진의 춤에서 어떤 부분이 섬세했는지는 몰라도, <맥: 몸에 새겨진 춤>은 섬세함을 지향한 건 아니다. 섬세하거나 섬세하지 않거나는 모두 동작과 움직임과 연결되어 있다. 노해진은 이번 춤판에서 동작을 보여주기보다는, 노해진 자신이 춤을 추고 있는 내면을 보여주고, 또한 보여지길 희망했다.


노해진의 춤동작과도 연관해 보자. 과연 노해진의 춤은 섬세하기만 했을까. 분명 아니다. ‘섬세함’이란 표현보다는 ‘과감함’이 어울렸다. 그런 과감함은 과장됨이 아니었다. 노해진이 춤꾼으로 살아온 세월의 ‘기세’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기세는 참으로 ‘섬세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다. 이번 노해진의 춤판을 높이 평가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노해진의 춤판에는 오래도록 쌓아와서 이제는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노해진 춤의 기세’가 있었다.


노해진의 이번 춤판은 입춤(立舞)으로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국수호 문하에서 추었던 춤을 바르게 세우려는 의지가 보였다. ‘춤은 몸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란 생각과 태도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런 노해진을 보고 또한 어떤 이는 ‘내면의 집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좀 다르다. 이번 춤판에서 노해진은 내면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 내면을 여과 없이 바깥으로 끄집어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신중함’과 ‘과감함’이 동시에 존재했다.



5. 몸이 장단이다. 


춤을 볼 때, 나는 늘 자연스럽게 ‘춤과 음악과의 상호 관련성’을 보고 듣는다. 이번 노해진의 춤판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노해진은 장단에 ‘맞추려’ 하지 않았다. 노해진은 장단을 ‘느끼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추는 춤을 어떤 이는 춤을 잘 춘다고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오히려 ‘수가 낮다’ 또는 ‘공력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나와 같은 사람이 한국춤을 보면서 곤혹스러운 점은, 무대 위의 춤꾼이 ‘전통 장단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전통 장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추는 춤이다. 장단은 맞추는 것도 아니고, 장단은 느끼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몸이 곧 장단’이어야 한다. 밖에서 들리는 장단에 내가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장단을 끄집어내서 춤을 추어야 한다. 이번에 노해진이 딱 그러했다. 사실 이렇게 추는 춤꾼은 의외로 많지 않다. 노해진을 좋은 예로 들면서, 대다수의 춤꾼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장단을 들으면서 반응하지 않는다. 자신의 안에 있는 장단을 끄집어낸다.” 노해진이 딱 그런 단계에 이르렀다.


노해진의 ‘입춤’(立舞)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한 호흡으로 갔다. 장단의 변화를 춤으로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번 무대에서 보여준 것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노해진의 입춤은 틀린 동작, 버릴 동작, 어설픈 동작, 지나친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공연의 타이틀을 <몸에 새겨진 춤>이라고 진정 붙일 만했다.




6. 남도살풀이: 살풀이는 충족, 남도는 부족 


두 번째 <남도살풀이>는 상대적으로 내겐 아쉽다. 여기서도 그간의 여러 ‘살풀이춤’에 관한 부정적인 사례를 들어 보자. 살풀이춤을 볼 때 다음 두 가지가 참으로 곤혹스럽다. 첫째, 살풀이춤을 출 때 어떤 춤꾼은 자신이 무당이 된 듯 춤을 춘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선무당’처럼 춤을 추는 경우다. 마치 스스로 접신을 한 듯싶지만, 그렇게 느끼는 관객은 많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배우처럼 연기하듯 춤을 춘다. 본인은 감정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춤을 보면서 ‘삼류 배우’의 표정을 연상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살풀이춤은 무당의 접신도 아니고, 배우의 연기도 아니다. 살풀이춤을 그저 한 또는 흥과 연관하는 시각도 문제가 있다. 살풀이춤은 언제 이러한 감정적 측면에서 벗어나서 사유적인 춤의 세계로 안착할 수 있을까. 노해진의 <남도살풀이>가 매우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으나, 적어도 춤의 무대에서 ‘식상할 대로 식상한 살풀이춤의 클리셰’는 조금도 없다는 게 반갑다면 반가웠다.


노해진은 살풀이춤을 품격을 지키면서 사유의 영역으로 가져온 듯싶기는 한데, 뭔가 부족했다. 특히 ‘남도’라는 말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노해진은 분명 남도(광주) 출신의 춤꾼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남도살풀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건 왜일까. 내가 잘못 본 것일까. 나 스스로도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데 나도 그렇지만, 노해진 자신이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7. 국수호와 노해진은 왜 다를까


노해진은 남도(南道)의 춤을 잘 출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이번 춤판에서도 춤을 잘 췄음에도 내겐 ‘남도’란 생각은 별반 들지 않았다. 그건 국수호 명무와는 반대다. 국수호 명무는 많은 춤에서 이건 ‘남도춤’이고 ‘전북제’이고 ‘호남춤’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춤을 추는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춤을 보는 관객이 이런 특성을 감지하고 있다면, 그것이 올곧게 전달된다. 이건 일단 “정자선 정형인 국수호”의 춤맥이기도 하겠지만, 국수호라는 개인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고향(故鄕) 혹은 귀소(歸巢)는 매우 분명한 것 같다. 비유컨대,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노해진의 경우는 어떤가. 노해진 스스로도 생각해야 할 화두이다. 전라도의 춤맥을 잇고, 전라도 춤을 잘 추기 위해서 말이다.


8. 아가: 과장되지 않은 위엄 


노해진의 세 번째 춤 <아가(雅歌)>는 역시 좋았다. <아가>는 이미 자타 공히 노해진의 춤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포스터가 바로 ‘아가’라는 것도 많이 알 듯싶다. 이 춤은 부채산조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배경음악으로 삼아서 부채를 들고 추는 춤이다. 판소리에서의 부채, 부채춤에서의 부채, 또한 국수호의 명작무 <장한가>의 부채는 저마다 성격이 다르겠지만, 모두 ‘요긴하다’란 단어가 적용된다. 꼭 필요하고, 참 중요하다.


나는 ‘부채산조’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아가>를 얘기하면서 ‘교방춤’을 얘기하려 한다. 나는 교방춤 자체를 낮게 보거나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송화영이나 임이조에 의해서 시작된 교방춤 혹은 교방과 연관된 춤을 무척 좋아하고 응원한 한 사람이다. 문제는 요즘의 교방춤이다. ‘교방–기생–교태’의 클리셰를 우려하는 것이다. 교방 혹은 교방춤이라는 이름을 걸고 추어지는 춤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도 다양한 여성 군(群)이 존재했다. 그간 한국춤에서도 그런 다양한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서 춤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서 김문숙의 <대궐>이나 최현의 <남색 끝동>은 한국의 전통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여성상의 한 일면을 춤을 통해서 느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요즘의 교방춤은 어떠한가. 교방춤은 꼭 주연(酒宴)에서만 추는 춤일까. 어느 교방춤을 보면 늘 주연에서 추는 춤 같아서 부담스럽고, 어느 교방춤을 보면 이름만 교방인 듯싶어서 걱정스럽다. 이런 춤은, 춤을 추는 사람은 의식하지 못해도 알게 모르게 한국의 전통 여성상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아가>가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 춤에는 ‘과장되지 않은 위엄(威嚴)’이 느껴진다. 점잖음과 엄격함이다. 국수호의 ‘장한가’는 왜 명작무가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한량무와 차별화가 첫 번째 요인이 아닐까. 국수호의 장한가는 흥청거리지 않는다. 한량을 주연(酒宴)과 여흥에서 구해냈다. 한량을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아가>도 마찬가지다. <장한가>와 <아가>에 나의 자의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춤이 좋은 이유는 둘 다 ‘지식인의 사유’가 느껴지기에 그렇다. 아가도 ‘글을 아는 사람’의 춤이다. 가야금산조로 추는 춤이라고, 교방춤이라고 늘 간드러짐과 흐드러짐으로 추는 춤일까.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는 그렇게 추어선 안 된다. 김죽파의 삶과 예술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노해진의 아가가 좋은 이유는, ‘황진이가 추는 춤이 아니라 신사임당이 추는 춤’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9. 바라승무: ‘전통의 전승’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텔링’ 


이번 춤판에서 노해진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건 <바라승무>였다. 다소 냉정하게 본다면, 노해진의 춤 세계는 ‘승무’가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지 않다. 이른바 입춤, 수건춤, 부채산조와 같은 춤은 노해진에게 딱 맞다. 노해진에게 배울 점이 많다. 정갈하면서 서슬이 느껴진다. 그러나 승무는 좀 다르다. 이번에 노해진이 춘 <바라승무>는 박금슬의 춤을 국수호가 이어받은 것이고, 이를 노해진이 이어받아서 추는 춤이다. 불교 계통의 여러 춤 중에서 박금슬의 춤이 가장 불교적인 의식과 부합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박금슬의 삶과 예술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의 춤의 현실이다. 이 바라승무의 가치는 매우 대단하지만, 과연 이러한 춤이 현대의 관객과 얼마만큼 소통할지에 대해선 미지수이다. 국수호의 많은 춤은 그 안에 많은 인문학적 기반이 든든하고, 또한 춤 안에서 저마다 서사성을 느끼게 해주는 장점이 있지만, 아쉽게도 <바라승무>는 그렇지 못하다. 불교적인 의미는 깊지만, 그것 이외의 어떤 인문학적 층위가 느껴지는 건 아니다. 또한 춤 동작 면에서도 ‘의식성’에 경외감을 갖게 되지만, 그 이외의 정서가 느껴지는 건 아니다. 이 춤이 지향하거나 춤꾼이 이 춤을 통해서 성찰하는 것이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기도 힘들고, 또한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라고 하는 것도 다소 무리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 박금슬–국수호 계보의 <바라승무>는 두 트랙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춤에 ‘스토리텔링’이 입혀져야 한다고 본다. 나는 오래전 노해진의 창작춤을 보고 많은 걸 느낀 적이 있다. 춤의 여운이 꽤 길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춤도 잘 춰서 그러하겠지만, 그 춤의 내면에서 여러 서사가 발견되었다. <바라승무>가 그래지길 바란다. 바라승무 자체를 올곧게 전승하는 것과 함께, 이 ‘바라승무’를 가지고 ‘스토리텔링’이 느껴지는 ‘작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는 노해진이 이를 잘 할 것 같다. 지금의 <바라승무>에선 노해진이 비구니라는 느낌이 적으나, 만약 노해진이 갖고 있는 춤의 ‘전통성’과 ‘창작성’이 만나게 된다면, 노해진은 자신을 비구니로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춤의 서사를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이 또 다른 승무 혹은 바라승무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춤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번 공연에는 무동(舞童)에 정지욱, 하슬라 정백(河瑟羅 精魄)에 이동하, 화랭이춤에 유재성이 함께 했다. 모두 훌륭하게 춤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춤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의 장이 마련되길 바란다.


10. 노해진 춤: ‘인고의 춤’이자 ‘영접의 춤’ 


많은 춤판이 있다. 그런 춤판에선 지향하는 바가 너무 드러난다. 내가 전통춤을 계승하고 있다거나, 내가 누구의 춤을 잇는 적자(嫡子)라는 식이다. 이번 노해진의 춤판은 아니었다. 자신 안에 있는 전통춤을 자연스럽게 꺼내 보였다. 그 춤은 국수호 문하에서 오래도록 배우고 익힌 결과물로서 참으로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국수호의 춤은 ‘사유의 춤’이다. 국수호의 문하에는 출중한 춤꾼이 참으로 많다. 그중 노해진은 오랜 연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익힌 ‘사유의 춤’임이 틀림없었다.


노해진의 춤을 가리켜 누구는 “한국 전통무용의 정서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이는 수정해야 한다. 노해진은 애써 현대적 감각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 안에 있는 전통을 그대로 드러냈을 때, 그런 전통이 이 시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추는 춤꾼이다. 국수호의 춤 순서를 잘 알고 국수호의 춤태를 잘 알아서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국수호의 춤생각, 국수호의 춤마음을 자신 안으로 끄집어와서 그걸 드러낼 줄 알았다. 내가 노해진을 인정해서 글을 쓰는 이유는 딱 여기에 있다.


한국의 전통춤을 얘기할 때, ‘한을 풀어내는 서정적인 표현’이라고들 한다. 이는 노해진의 춤에 맞지 않다. 노해진에게는 뭔가 깊이 있는 인고(忍苦) 같은 것이 있다. 괴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겹겹이 쌓아 둔 세월이 거기에 있었다. 노해진의 춤이 선이 아름다울 수는 있어도, 노해진은 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무용가는 아니다. 노해진은 오랜 시간을 수련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몸에 체득되어 있었다.


노해진의 춤에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어는 영접(迎接)이다. 그의 춤은 ‘전통의 영접’, ‘국수호의 영접’, 혹은 ‘그분’의 영접이라고 할 수 있다. 노해진의 춤은 ‘인고’의 춤이고, ‘영접’의 춤이다. 남에게 쉽게 말할 필요도 없고, 내면에 깊이깊이 고이고이 쌓아 둔 ‘삶의 서사’ 혹은 ‘춤의 서사’가 있다. 그것이 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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