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8-2 (2026.4.20.) 발행
글_ 이희나(춤평론가)
사진_ Дониты Се. ⓒ 볼쇼이극장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Спящая красавица)〉는 ‘고전’이다. 차이콥스키의 무결한 음악에 마리우스 프티파의 정교한 안무가 만나 1890년 탄생한 작품이다. 예술 사조로서의 고전발레(classical ballet)의 정점에 놓여 있음과 동시에, 100년이 넘도록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온 고전적 작품(the Classic)이기도 하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이 클래식 발레의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이 작품을 레퍼토리로 보유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전발레는 주역 무용수들의 기량뿐 아니라 군무진의 고른 실력, 일사불란한 합, 형식미를 모두 요구한다. 여기에 작품의 규모를 온전히 펼쳐낼 무대 스케일까지 갖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발레단의 수준과 완성도는 모던 작품보다 오히려 고전 작품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무용은 회화나 문학과 달리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고전’이라 하여 시대의 흐름과 무관할 수는 없다. 무용수의 테크닉은 진화하고, 세트와 의상 역시 당대의 감각에 맞추어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는 예술이기에, 무용에서의 ‘고전’은 반복과 모방이 아니라 구조의 재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쇼이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고전발레를 대하는 볼쇼이만의 태도와 미학을 읽게 하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발레단은 마리우스 프티파의 원전을 바탕으로 각 단체 고유의 색채를 입혀 이 작품을 공연한다. 볼쇼이발레단 역시 1899년부터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 왔으며, 이후 여러 차례 재구성과 재안무, 개정을 거쳤다. 30년간 예술감독을 맡았던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고전 작품마저 자신의 예술적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했던 인물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역시 1963년부터 여러 차례 재안무와 재구성을 시도했다. 가장 최근 버전은 2024년 무대에 오른 것으로, 2011년의 최종 안무에 비르살라제의 1973년 디자인을 다시 적용했다(최근 공연은 4월 10-12일).


볼쇼이극장은 2011년 리모델링 후 재개관 기념공연으로 이탈리아 무대미술가 에지오 프리제리오(Ezio Frigerio)와 협업했다. 기존 무대와는 확연히 다른 화려한 궁정 배경, 패턴의 아름다움이 강조된 플로어, 유럽 궁정 드레스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의상이 특징이었다. 장대한 스펙터클과 대칭적 공간감은 볼쇼이극장의 화려한 스케일과 맞물리며 이 고전발레의 형식미를 극대화했다. 그러나 2024년 볼쇼이발레단은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화려한 바로크적 배경에서 벗어나, 비르살라제의 회화적이고 몽환적인 디자인으로 회귀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다시 선보였다. 비르살라제의 디자인에서 숲속은 한 폭의 수채화 같고, 구체적 묘사 없이 무대 안쪽에서부터 휘어 내려온 계단만으로 표현된 궁정은 단순하지만 상징적이다. 사실적이고 화려했던 장식의 의상들 역시 심플한 ‘발레리나’의 튀튀로 돌아왔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미장센의 교체가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미학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스펙터클로 시선을 압도하던 대작에서, 춤과 음악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집중한 선택이다. 그 결과 춤 자체가 더욱 또렷하게 살아난다.
그리고로비치는 프롤로그-1막-2막-3막의 기존 구성을 2막 4장으로 압축해 보다 컴팩트하게 다듬었다. 자칫 늘어질 수 있는 옛 구성에서 하나의 시대를 한 장으로 묶어 서사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리듬을 재배치했고, 극의 긴장과 집중도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서사의 흐름을 지연시키는 마임 중심의 설명 장면을 덜어내고 주요 인물의 춤에 더욱 집중하도록 한 점 역시 그리고로비치의 성과다. 옛 버전에서 귀족들 무리에 섞여 자연스럽게 등장하던 데지레 왕자는 볼쇼이 버전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힘찬 점프와 회전을 펼치는 솔로로 등장해 무대를 장악한다. 보통 고전발레에서 발레리나를 보조하는 역할로 제한되기 쉬웠던 남성 무용수의 비중을 대폭 확장함으로써, 아름답지만 정적이기 쉬운 작품에 역동적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형에도 불구하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고전발레의 전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코르 드 발레의 대칭적 형식미, 움직임의 선이 지닌 정확성과 명료함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며, 무용수들의 절제되고 우아한 몸짓은 결코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로라의 균형을 잃지 않는 아다지오와 섬세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은 단정하고 품위 있는 공주의 실루엣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1막의 요정들, 2막의 보석들, 그리고 동화 속 인물들의 바리에이션은 각기 캐릭터의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며 고전발레 바리에이션의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솔로와 군무, 다인무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교차 변주되며 자연스럽게 이어지기에, 작품은 단조로움에 빠지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한다.


작품의 각 장면에는 주요 사건과 함께 기억되는 대표적 춤이 있다. 1막 1장(프롤로그)은 오로라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라일락 요정을 필두로 한 요정들의 춤, 1막 2장은 열여섯 살이 된 오로라 공주가 각국의 청혼자들과 추는 로즈 아다지오가 하이라이트다. 마지막 장,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에서는 두 사람의 파드되가 당연히 클라이맥스를 장식한다.
2막 1장의 환상 장면은 가장 아름답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라일락 요정의 인도 아래 데지레 왕자가 오로라의 환영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사랑에 빠지고 운명의 상대로 받아들이는 핵심적 순간이다. 마치 무대 전체에 블러(blur) 처리한 듯한 몽환적 분위기 속에서 춤추는 오로라의 환영과 라일락, 님프들의 군무는 꿈결 같다. 님프들 사이로 도약하는 오로라의 몸짓은 공중에 부유하듯 가볍다. 차이콥스키의 아름다운 선율과 어우러져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마저 흐릿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내러티브가 잠시 지워지고, 오직 음악과 움직임, 이미지와 감각만이 남는 순수 발레의 순간이다.
특히 2막 환상 장면에서 선명해지듯, 이 작품을 고전의 정점으로 완성짓는 마지막 요소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이 인상적인 이유는 발레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립적인 구조를 형성하며 또 하나의 전개를 만들어낸다. 발레에 예속되지 않기에 음악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며, 동시에 무대의 장면들과 유기적으로 호흡한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단순히 정서를 전달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능동적으로 장면을 조직하고 움직임과 함께 전진한다. 러시아 평론가 베라 크라솝스카야가 『러시아 발레의 역사』에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차이콥스키의 교향악에 맞춘 ‘발레의 교향악’이라 부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날 공연에서 오로라 역의 야로슬라브나 쿠프리나(Ярославна Куприна)는 안정된 균형 위에 절제된 감정을 얹었다. 오로라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발랄함보다는 절제된 우아함으로 표현될 때 더욱 설득력을 얻는 역할인데, 쿠프리나는 그에 걸맞은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존재 자체로 왕자의 아우라를 풍기는 데지레 왕자 아르템 아브차렌코(Артем Овчаренко)는 부드러움 속에 절도와 힘을 응축한 밀도 높은 춤을 선보였다. 카라보스 역의 이고르 츠비르코(Игорь Цвирко)는 특유의 연기력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파랑새와 플로린 공주는 마카르 미할킨(Макар Михалкин)과 크리스티나 크레토바(Кристина Кретова)가 맡았다. 미할킨의 훤칠한 피지컬과 유연함, 경쾌하고 속도감 있는 도약은 힘들이지 않고 솟구치는 파랑새의 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크레토바의 안정적인 테크닉과 섬세하고 명료한 춤은 역할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때때로 고전발레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며 당대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늘 비슷한 구조를 반복한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실제로 오늘의 감각으로 바라볼 때 왕정적 질서, 관습적 성 역할, 장식적 미학은 낡아 보일 수 있다. 작품의 제목과 의상만 다를 뿐, 유사한 전개와 구조가 되풀이된다는 점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볼쇼이발레단의 공연은 고전이 단순히 오래된 형식의 보존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고전은 변하지 않는 유물이 아니라 시대마다 새롭게 읽히는 구조이며, 현대의 요구에 맞추어 끊임없이 조정되고 해석되는 유산이다. 무대미술과 인물의 비중, 서사의 호흡은 동시대의 감각에 맞게 조율된다. 그럼에도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음악과 춤의 조화, 형식미와 움직임의 질서는 여전히 유효하기에 ‘고전’이라 불릴 수 있다. 볼쇼이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 사실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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