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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자유의 의미, 되찾은 꿈: 국립현대무용단 <머스탱과 개꿈>

공연비평

Vol.129-1 (2026.5.5.) 발행


글_ 염혜규(춤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

 

지난 4월 3-5일 국립현대무용단은 2026 시즌을 여는 신작으로 두 신진 안무가의 더블빌 <머스탱과 개꿈>을 선보였다(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두 안무가는 바로 현대무용계에서 무용수로 활발히 활동해온 정재우와 정록이이다. 두 안무가 모두 일상으로부터 찾은 주제를 감각하는 몸을 바탕으로 한 안무 언어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각기 다른 주제만큼이나 작품으로 보여준 결과물도 상이하다. 


<머스탱>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여겨지지만,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졌냐는 오랜 논쟁거리 중 하나다. 특히나 인공지능이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선택은 진정한 자유의 영역에 있다고 보기 힘들어졌다. 알고리즘 제시한 상품을 욕망하고 선택하고 AI와의 문답을 통해 결정한다. 정재우는 문명의 이기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에서 머스탱을 떠올렸다. 미국 서부의 야생마인 '머스탱(Mustang)'은 인간의 가축이었다 야생으로 되돌아간 말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진 삶에서 다시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머스탱이 찾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일까? 혹은 길들여짐과 자유의 경계에 있는 존재일까? 정재우는 머스탱과 인간의 모습을 무대 위로 겹쳐내며 자유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공연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져 구성된다. 전반부는 철제흔들의자를 중심 오브제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철제흔들의자의 편안함과 금속성의 차가움은 오늘날 기술 문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용수가 앉아 있던 흔들의자에 다리를 올리는 순간 의자가 뒤로 넘어가 버리는 공연의 시작은 <머스탱>의 문제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흔들의자는 안락함의 제공을 위해 발명된 도구이지만, 동시에 기대어있는 존재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일렬로 늘어선 의자는 기술 발전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를 연상시킨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아 의자를 앞뒤로 흔들던 무용수들은 일제히 자세를 바꿔가며 여러 동작을 보여준다. 의자에 옆으로 걸터앉거나 한쪽 발만을 의자 다리에 걸친 채 의자를 흔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동작은 의자의 흔들림으로 귀결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얼핏 다양한 선택을 하는 듯 보이지만, 선택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 홀로 다양한 동작을 펼치는 무용수는 앞선 군무와 대비되며 자유롭게 보이기도 한다. 의자에 거꾸로 눕거나 팔걸이 위에 올라앉아 이동을 시도하는 등 주체적으로 의자를 다루고자 한다. 하지만 의자 위에 일어서서 균형을 잡으려는 무용수의 모습은 여전히 의자 원리에 지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용수들은 거꾸로 세워놓은 의자의 다리 사이를 힘겹게 통과하거나, 두 사람이 의자 앞뒤로 서서 의자를 압박하듯 움직인다. 의자는 더 이상 편히 앉는 의자로만 보이지 않는다. 무용수의 움직임을 제한시키던 의자는 더 나아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가 되어 무용수를 통제하는 듯 보인다. 



의자를 벗어나 무용수가 다른 무용수에게 의지해서 움직이는 모습은 편리함에 익숙해진 존재에게 주어진 자유를 떠올리게 만든다. 의자에서 떨어진 무용수는 걸어가던 이의 발목을 붙잡은 채 이끌려가거나, 의자에서 다른 무용수의 어깨 위로 옮겨와서 기마자세로 이동한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편리함는 주는 동시에 의존도 또한 높였다. 의자 하나를 중심으로 여러 무용수가 동작을 펼치는 구성 또한 의자와 연계된 움직임으로 의자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 순간 자동차를 몰 듯 무용수들이 빠른 속도로 의자를 밀고 다니기 시작한다. 의자를 들어 올려 제자리에서 빙빙 돌리기도 하고, 머리 위로 번쩍 들고 달리기도 한다. 더 이상 의자에 속박되지 않고 의자에 저항하려는 듯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반전의 상황이다. 무용수들뿐만 아니라 의자 또한 자유를 갈구하며 날뛰는 머스탱처럼도 보인다.

 

반란의 마지막에 이르면 영어로 머스탱의 일부가 쓰여진 의자가 늘어서 있고, 총에 맞은 듯 연기와 함께 기어 온 무용수가 등에 새겨진 n자로 빠진 글자를 채워 넣는다. 하지만 여전히 마지막 g가 빠진 ‘Mustan‘은 미완의 머스탱이다. 머스탱이 힘겹게 울타리를 뛰쳐나가 찾은 자유가 진정한 자유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한 연출이다.


어두운 조명과 온몸을 가린 검은색 의상, 열이 맞춰진 형광등과 반복되는 리듬의 음악 등 전반부가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로 현대 사회의 모습을 강조했다면, 후반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변모한다. 붉은 톤의 조명으로 덮인 무대는 무대 뒤 멀리서 들려오는 일렉기타의 선율과 더불어 머스탱이 자유를 찾아간 건조한 황무지를 연상시킨다. 무대 뒤쪽 상단에는 의자가 매달려있고, 그 아래는 포드사의 머스탱을 떠올리게 하는 자동차가 서 있다. 자유를 찾은 머스탱의 질주를 상징하려는 듯한 연출이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로 나와 갈대를 심는데,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를 찾기 힘든 설정인데 반해 꽤 긴 시간이 소요됐다는 생각이다. 설령 의미를 부여한다 해도 긴 시간은 장면을 설명적으로 만들뿐이다. 무용수들은 갈대 사이사이에서 각자 자유롭게 움직인다. 자유를 찾은 인간, 야생으로 돌아간 머스탱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앉은 채로, 혹은 누운 채로 움직이는 모습은 활력이 넘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어지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홀로 남은 무용수가 갈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한참 동안 춤을 춘다. 또 다른 무용수가 등장하여 갈대를 손을 넘어뜨리고 의자에 앉으면 춤을 추던 무용수도 바닥에 드러눕는다. 그 순간 천장에 매달려있던 의자가 떨어지며 공연은 끝을 맺는다. 


의자를 매개로 한 전반부는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인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만 구성을 좀 더 단순화시키고 생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후반부는 자유를 찾은 인간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고자 하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장면의 단순한 나열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술 문명에 익숙해진 인간의 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을 주제화한 것은 참신한 시도로 다가온다. 


<개꿈>


꿈은 꿈꾼 자만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꿈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꿈을 꾸는 내게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진지하게 느껴지는 감각적 경험이지만, 막상 언어화시키다 보면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쉽지 않다. <개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에 삼켜버린 말들, 바로 언어로 전환되지 못한 채 꿈꾼 자만의 것으로 남은 감각을 무대 위로 불러낸다. 안무가 정록이는 꿈이 남긴 감각과 감정의 파편들을 몸의 언어로 전환하여 보여주고자 하였다. <개꿈>은 만화적 상상력으로 이미지화한 꿈의 세계를 몸의 움직임으로 구체화시켜 보여준 작품이다.


공연은 무용수들이 안고 나온 흰 연기로 가득 찬 풍선에서 연기가 빠져나오면서 시작된다. 잠에서 깨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돼 버리는 꿈들이 무대 위로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는 듯한 시작이다. 곧이어 다양한 크기의 하얀 공들이 무대 위로 떨어진다. 공들은 공연 내내 주요 오브제로 등장하는데 바로 발화되지 못한 채 파편화돼 남은 꿈의 덩어리들이다. 커튼으로 삼면이 가려진 무대 한구석에는 슬립 차림으로 커튼(벽)을 향해 돌아서 있는 사람과 커튼 사이로 무대 안쪽으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꿈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잠자는 사람의 현실과 꿈속이라는 두 차원을 병치시켜 보여주는 듯한 설정이다. 




무대에는 다양한 옷차림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검은 의상의 캣츠 우먼, 잠옷 같은 반바지 차림의 남성, 기계체조 복장을 한 사람, 팬츠에 가운만 걸친 사람 등 가지각색의 옷차림이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옷차림이기도 하다. 옷 순서를 바꿔 입었거나, 옷을 입다 알고 등장한 듯한 이도 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옷차림만큼이나 동시에 각기 다르게 움직인다. 어떤 이는 살금살금 뒷걸음쳐가고, 또 다른 이는 공을 들어 올렸다 바닥으로 떨구기를 반복한다. 허리를 숙인 채 끝없이 공을 주우며 걸어가는 사람,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사람, 혼자서 공놀이를 하는 사람 등 한무대 위에서 다중공간이 존재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진다. 불연속적이고 다양한 시공간이 동시에 공존하는 꿈의 세계는 조명효과로 더욱 강조된다. 갑작스레 보여지는 무용수들의 슬로우 모션 등 꿈속에서 겪을 만한 다양한 상황이 세심하게 연출되었다.


등장인물들이 일렬로 서서 옆 사람에게 공을 전달하는 모습은 <개꿈>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용수들은 무심하게 서로에게 공을 건네다가 어느 순간 과장된 표정과 동작으로 신나게 공을 건네준다. 하지만 잘 보면 마지막 사람은 건네받은 공을 다시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있다. 열심히 공을 건네고 있지만 알고 보면 무의미한 행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하지만 즐겁게 자신의 행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멋진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순간 음악이 그치면 무대는 현실로 돌아온다. 바로 전까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던 꿈의 세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슬립 차림 여성만 홀로 무대에 남아 잠든 채 꿈을 꾸고 있는 듯 눈을 감고 인상을 쓰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을 열심히 표현한다. 꿈꾸는 모습의 표현이 다소 춤 자체로 드러나는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무용수의 모습은 답답해 보이기도 하는데, 어쩌면 현실에서 다하지 못한 말들을 꿈속에서는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면 무대 뒤 커튼이 연두색 입 모양으로 열리면서 흰 천을 뒤집어쓴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공들을 열심히 굴려 입속으로 갖다 놓는다. 슬립 차림의 무용수는 무대앞쪽에 앉아 자신이 꾸는 꿈이기도 한 무용수들을 바라본다. 현실에서 언어화되지 못한 채 무의미함으로 남았던 덩어리들,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꿈을 통해 복원되는 듯한 결말이다. 


<개꿈>은 추상적인 감정과 감각들이 만들어낸 꿈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시각화 내었다. 각기 다른 감각의 결이 살아있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꿈의 이미지들을 보다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조명과 음향효과를 비롯하여 무용수의 동선이나 소품 등 디테일 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앞으로 보다 다양한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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