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즈 브렌드 레페토, 지지 장메르 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인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롤랑 프티(Roland Petit, 1924~2011)이다. 레페토는 롤랑 프티의 어머니가 아들은 위해 만든 댄스슈즈가 브랜드화 된 것이고, 지지 장메르는 발레 카르멘의 주역으로 후에 프티의 아내가 된 인물이다. 이처럼 유명세를 지닌 프랑스 발레의 거장 롤랑 프티의 공연이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10월 12일 국립발레단에 의해 그 화려한 막을 열었다. 그는 프랑스 출생의 안무가, 무용가로 8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천재라 불리며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고 샹제리제 발레단, 롤랑 프티 파리발레단, 마르세이유 발레단을 결성하는 등 발레단 창설을 통해 인재양성과 공연계에 큰 영항을 끼쳤다. 그가 한국에 마지막으로 선사한 작품들로 구성된 이번 공연에는 관객들에게 익숙한 유명한 음악과 프티의 독특한 안무, 국립발레단 주역들의 훌륭한 기량이 맞물려 즐거움을 선사했다.
첫 작품 <아를르의 연인>은 이은원과 이동훈을 주역으로 이뤄졌다. 1974년 마르세이유 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것으로, 알퐁스 도데의 동명소설을 발레로 만든 경우였다. 막이 열리면 반 고흐가 사랑한 아를르의 밀밭 풍경 배경막에 일렬로 늘어선 남녀 행렬 속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지면서 마을 축제가 벌어진다. 흑백으로 대조를 이루는 의상과 인 동작을 다수 사용하며 손떨기나 그밖의 독특한 움직임들로 구성되어 다른 클레식 발레와 차별화를 이룬다. 초반부 듀엣이 다소 불안하기는 했지만 프티의 미묘하고 섬세한 발동작들이 인상적이고 중후반 사랑을 갈구하는 프레데리와 그녀를 내치는 비베트의 안타까운 사랑은 아름다웠다. 여기에 조르주 비제의 아름다운 음악까지 더해져 무용수들의 춤이 더욱 실감났는데, 서로 엮이고 풀리는 과정의 동작들이 역시나 능숙하지는 못했고 이는 개인 각각의 기량들은 좋으나 연결성이 부족한 탓이었다. 군무 여성들은 주인공 비베트의 죽음을 암시하는 검은 망토를 두르고 춤추며 두 주인공의 안타까운 사랑의 듀엣과 무대 뒤쪽 창문 설치물을 배경으로 이동훈의 광란의 그러나 표현력이 가장 돋보이는 솔로를 끝으로 그가 돋보이는 주역인 이유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군중 속의 고독, 광기,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토로하며 이동훈과 이은원은 강렬한 내면 연기는 잔상을 남겼다.
<젊은이와 죽음>은 롤랑 프티의 1946년 작품으로, 장 콕토의 대본으로, 특히 영화 <백야>에서 바리시니코프의 강렬한 인상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용걸과 유난희의 출연으로 기대를 모은 가운데, 무대에는 침대 하나와 테이블, 의자가 놓여있고 원근감을 살린 붉은색과 회색이 색조를 이루는 방에서 침대 위 김용걸이 담배를 피우다 현실감 있는 오브제들 사이에서 고난도의 테크닉과 힘을 보여주는 동작들을 통해 기량을 과시했다. 다소 성적인 제스츄어들과 짙은 감성을 소화해야하는 부분에서 김용걸은 그의 연륜을 장점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하수 문쪽에서 노란 원피스에 검은 장갑을 낀 유난희가 등장하고 독특한 동작들을 통해 유난희의 길고 유연한 팔다리가 돋보였으며 그녀의 단발머리는 마치 펄프픽션의 여주인공을 연상시켰다. 그녀 역시 실제로 담배를 물고 피우는 장면은 현실성을 더했고 두 남녀의 성적표현 역시 그러했다. 담배는 삶의 허무와 절망을 상징하는데, 이 작품에서 남자는 애타게 매달리지만 여인은 담배 연기를 훅 내뿜으며 외면하면서 삶의 단면을 담았다. 한다. 즉, 김용걸과 유난희는 강한 존재감으로 전후 유럽의 상실감과 억압을 표현했고, 그로테스크한 움직임 역시 롤랑 쁘티의 안무경향이었다. 의자를 밀쳐내고 테이블 위아래를 오가며 춤추는 모습, 유난희가 무대 중앙쪽 기둥에서 목을 맬 고리를 만드는 모습 등 섬세한 부분들이 요소에 배치되었다. 이윽고 죽음 장면과 전환된 각종 건물들 배경에서 유난희가 흰 드레스에 빨간 머리 두른 가면을 쓰고 나와 그것을 김용걸에게 씌워주고 젊은이는 죽음을 넘어선 세계로 발을 옮기며 작품의 세련미를 더했다.
김지영과 이용철의 <카르멘>은 담배공장-술집-방-헛간-투우장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스펙터클하게 구성되었다. 롤랑 프티의 <카르멘>은 1949년 파리 발레단 초연 당시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안무로 눈길을 끌었는데, 어깨와 다리를 드러낸 발레리나들과 남성미를 풍기는 발레리노들의 군무가 그러하고 또한 턴아웃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제스츄어와 움직임 어휘로 클레식 발레의 정형성에서 벗어났다. 특히 이 작품을 통해 프티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20세기 모던 발레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막이 오르면 역시나 현실적인 거리의 풍경과 독특한 움직임의 군무들이 등장하고 펑크머리 혹은 집시 머리 스타일의 여성 군무들도 담배 피는 모습을 연출했다. 프티는 담배를 춤의 매개체로 사용했는데, 여기서도 담배공장 여인들의 삶의 허무와 절망이 연기를 타고 넘실거렸다. 이어서 김지영과 다른 여인의 강렬한 대결신이 이어지고 그녀의 모습에 반한 돈 호세가 등장한다. 술집 장면으로 바뀌면 붉은색 커튼과 등, 의자들이 가득한 가운데 코르셋만 입은 여인들이 남성들과 의자 위에서 펼지는 군무와 듀엣들, 익숙한 비제의 투우사의 노래와 하바네라 음악이 친근감을 주었다. 프티의 의자 사용 동작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어서 군무진들이 손가락으로 내는 소리와 호세 역의 이용철의 솔로가 남성적 인상을 더하고 투우사 복장의 그가 투우사의 움직임을 차용하며 추는 춤이 흥미를 더했다. 특히나 검은 부채를 들고 추는 김지영의 카르멘은 아직도 깨끗하고 기량이 좋았다. 호세에게서 시계를 훔친 일당들의 코믹한 움직임과 군무진들이 반원형으로 바닥을 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3장에서는 침대 위에 있던 카르멘이 나와 아름다우면서도 관능적인 춤을 추는데, 캐스터네츠에 맞춘 김지영의 솔로가 군더더기 없이 이어지며 둘의 듀엣에서도 그녀의 기량이 돋보였고 독특한 동작의 듀엣 움직임에도 그 연결이 자연스러웠다. 4장에서는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장면연출과 움직임이 코믹하게 이어졌고, 5장 투우장 장면은 투우장에서 익숙한 음악에 공중에는 붉은 사과가 날아다니고 투우사의 노래에 남녀 군무가 경쾌하게 펼쳐졌다. 결국 투우장에서 만난 호세와 카르멘은 그림자로 둘의 모습을 확대시키며 대결구도를 보여주었고, 그 모습이 마치 성난 소와 맹렬히 싸우는 투우사의 모습으로 그려진 듯 했다. 음악의 고조와 함께 움직임도 강렬함을 더하며 마침내 여기저기서 던져지는 모자를 끝으로 카르멘이 죽음을 맞는데 이곳에서도 프티의 역설의 미학이 드러났다. 가장 두려운 죽음의 순간에도 칼에 찔린 카르멘과 가해자 호세는 몸을 희화적으로 떨며 유머로 승화시켰고 이는 프티의 놀라운 순발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작품 전반을 통해 국립발레단이 롤랑 프티의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결합한 안무, 표현적이면서도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요소들을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나날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그 색감과 분위기를 잘 살려낸 점에 찬사를 보낸다. 특히 오래전 작품들이나 프티의 세련된 감성은 오늘날에도 뒤처지지 않기에 주역들의 노력은 더욱 힘을 더하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글_ 장지원 (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국립발레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