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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득무(得舞)라는 ‘관념의 굴레’를 벗어나, ‘흐름’이라는 ‘본원적 생명력’으로: 2026 세실풍류

이 시대의 전통춤, ‘이어붙이기’인가? ‘이어나가기’인가?


공연비평

Vol.129-1 (2026.5.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정동극장 ⓒ 손성민



 

1. 득무(得舞), 매우 신중해야 할 용어


국립정동극장의 <세실풍류>가 4년 차를 맞이했다. 그간 한국 근·현대춤의 역사, 계보, 명작을 보았다면, 올해는 춤꾼 ‘개인’의 매력이 확연히 드러나는 구성이었다. ‘오랜 수련과 축적을 통해 자신만의 춤세계를 구축해 온 이 시대 춤꾼들의 여정’이 <세실풍류>의 카피이다.


올해는 특히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는 춤꾼이 중앙무대에 모여서 ‘개인의 개성’이 확연히 드러나거나, 더불어 ‘지역적 특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작품으로 참여하고 있어 더욱 반가웠다. 올해는 모두 6회에 걸쳐서 37명이 출연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공연(04.29.)을 글로 정리해 본다. 내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득무(得舞)의 순간: 이 시대 전통춤의 향연’이 <세실풍류>의 슬로건이다. 국악에서 득음(得音)은 매우 익숙하다. 특히 판소리 명창과 관련한다. 득음에 비해 득무(得舞)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된 건 아니다. <세실풍류>를 통해서 이 의미가 살아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춤꾼에게 ‘득무’라는 용어를 연결하면서, 춤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건 확실하다. 그러나 우려되는 지점도 분명하다.


‘득무’란 과연 어떤 상태에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 득음에는 나름의 기준치 또는 판단이 있다. 그간의 수련을 통해서 ‘수리성’이나 ‘철성’과 같이 그만의 소리의 공력이 느껴질 때 ‘득음’과 연결한다. 이와는 다르게 정정렬 명창처럼 가지고 있는 소리 자체는 아쉬움이 있으나, 판소리 자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여서 그만의 소리제(制)를 만들었을 때 ‘득음’을 적용한다.

그렇다면 ‘득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걱정스러운 건, ‘득음’을 포함해서 ‘득무’라고 말하는 게 매우 관념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한 예술가를 향한 ‘최상의 찬사’이지만, 왜 ‘득무’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붙어야 한다.


예술 장르 중에서 춤이라는 장르는 타 장르에 비해서 구체성과는 거리가 있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예술 장르 중에서 춤은 가장 ‘신비주의’와 연관된다. 이러할진대, 춤 평론이나 춤 칼럼은 더 추상적인 표현이 많다. 또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건, ‘추상적 표현’이 거의 그간에 사용되어서 익숙해진 ‘상투적 표현’으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전통춤의 향연’과 관련된 글은 ‘수식언의 향연’이 된 것 같아 걱정된다. 나를 포함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반성해야 하고, 바뀌어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득무’라는 단어는 매우 상징적이기도 하지만, 매우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과연 ‘득무’란 무엇인지, 그런 득무라는 단어를 ‘득무의 순간’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는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득무’를 과연 이 시대의 ‘명무부터 중견 신진 춤꾼까지 한 무대에 모여’ 펼쳐지는 공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2. 전통춤의 두 갈래: ‘전통적’ 전통춤 vs ‘창작적’ 전통춤


<세실풍류>는 ‘이 시대 전통춤의 향연’이다. 첫째 날의 6인을 보면서, 지금의 전통춤도 확실한 두 갈래로 나뉨을 확인한다. 하나는 ‘전통적 전통춤’ 또 하나는 ‘창작적 전통춤’이다. ‘전통적 전통춤’은 복미경, 송미숙, 채향순, ‘창작적 전통춤’은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이다.


둘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전통에 가치를 두고 있고, 전통에서 가져온 것은 같다. 그런데 춤의 구성 방식과 전개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전통적 전통춤’인 복미경, 송미숙, 채향순의 춤에서는 춤꾼 개인이 매우 강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이 강하게 드러나는 건, 원래 ‘개인을 강조하기보다는’ 춤꾼의 그간의 ‘전통의 체득’에서 나온 것이다. ‘전통이라는 외피’ 속에, ‘개인의 개성이 선명히 드러난 것’이다.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은 어떠한가?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의도하진 않았을지라도 결과로는 개인이 드러났다. 그런데 앞과는 대조적이다. 이들의 춤은 ‘개인이라는 외피’ 속에 ‘전통이라는 본질을 효과적으로 녹여내려 한 것’이다.


전자는 전통에 충실해서 개성이 드러난 것이고, 후자는 개인을 드러내면서 전통을 살려내려는 입장이었다. 후자의 3인은 저마다 춤의 진정성은 더욱 충만했고, 그들의 춤에서 분명히 성취해 낸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꽤 걸리는 게 있다. 이들의 춤이 ‘전통춤’과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고,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전통춤’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여기서 오해할 소지를 일단 차단하려 한다. 그들이 춤을 춘 연조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전통을 향해 가는 방식이 ‘전자의 3인’과 ‘후자의 3인’이 다르다는 걸 말하려 함이다. 아울러 내 주관적인 시각이나, 그들이 만들어내려는 방식이 과연 “전통춤의 본질적 속성과 얼마만큼 연관이 있느냐”에 관해 공개적 질문을 하려 한다.


3. 전통춤의 본질적 요인: ‘흐름’과 ‘이어나가기’


전통춤이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전통적 전통춤’과 ‘창작적 전통춤’을 선명하게 이분하겠다. 전자의 3인의 전통춤에서는 ‘흐름’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후자의 3인의 전통춤에선 ‘흐름’이 중시되지 않았다. 나는 ‘전통춤을 전통춤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단계로선, ‘전통적 전통춤’은 흐름이 있고, ‘창작적 전통춤’은 흐름이 간과되어 있다.


전통춤을 전통춤답게 보이게 하는 데, ‘흐름의 유무(有無)’는 아주 중요하다. 복미경, 송미숙, 채향순의 춤에는 확실한 ‘흐름’이 있다. 관객은 그걸 따라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이 춤을 ‘편하게 혹은 즐겁게’ 함께 할 수 있었다. 설령 어떤 춤이 자신의 취향과 다소 거리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흐름’이 있는 춤은 전통춤의 가치가 전달된다.


여기서 내 바람을 말하고자 한다. 한국의 전통춤을 추는 이들이 “한국의 전통음악을 더 다양하게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거기서 ‘전통음악을 전통음악이라고 하는 본질적 요소’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전통춤을 전통춤이라고 하는 본질적 요소를 알아낼 수 있다.” 한국의 전통음악에는 거의 모두 ’그 음악만의 흐름‘이 있다. 영산회상(靈山會相)이 그렇고, 산조(散調)가 그렇다. 이런 음악은 거의 전적으로 ‘흐름’으로 시작해서 끝나는 음악이다. 연주 중간에 끊지 않는다. 쭉 이어진다. 그러하면서 ‘같은 것 같지만,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다른 것 같지만, 같은’ 흐름을 매듭짓는다.


이번 춤판에서 이 글에서 언급한 ‘전자의 3인’은 한국 전통춤의 흐름을 참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전통적 전통춤’이다. ‘전통에 충실했는데, 개인이 보이는 춤’이다. 그리고 그것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어서 공감하게 만드는 춤’이다. 송미숙과 채향순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것’을 자신(自身)을 통해서 장르의 흐름과 연결했다. 노련함이 매우 돋보였다. 장르의 문법을 완전히 체득한 후에, 자기만의 몸 언어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반면 복미경은 달랐다.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았던 것’에서 출발했다. 말을 바꾸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을 찾아내서, 거기서 새로운 전통을 출발시킨 것’이다. 전통춤이 확장된 것이다. 송미숙과 채향순이 20세기 전통춤을 ‘21세기 전통춤으로 잘 살려냈다’라고 한다면, 복미경은 20세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21세기 전통춤으로 새롭게 만들었다’라는 말이 딱 맞다.


이것이야말로 <세실풍류>를 비롯해서, ‘이 시대의 전통춤’을 표방하는 공연이 지향해야 할 바이다. 앞의 사실을 다르게 말한다면, 송미숙과 채향순은 20세기 전통춤으로 지금 ‘명무’가 되었다면, 복미경은 21세기의 전통춤을 기반으로 명무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은 모두 ‘춤의 기본’이 튼튼했고, ‘춤의 기술’도 발휘했다. 그런데 이것이 기예(技藝)에 머문다는 점이다. 세 사람도 저마다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춤을 만들었을 텐데, 거기에 결정적으로 ‘흐름’이 없었다. 춤꾼 본인이 생각해서 전개한 것들이 관객에게는 뚜렷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3인의 춤은 ‘부분’은 좋았는데, 그게 ‘전체’의 작품을 만드는 동력(動力)이 되진 못했다. ‘춤의 동작(動作)의 연결이 결코 춤 한 작품의 동력이 되진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들은 크게 실수도 없었고, 춤을 잘 춘다는 사실도 변함이 없는데 왜 그런 것일까. 어떤 피아노 연주회로 비유하자. 어떤 피아니스트가 중간에 ‘미스 터치’가 있었지만, 연주가 훌륭했을 땐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수 또한 흐름, 혹은 그런 실수가 ‘흐름의 묘미’를 살리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분을 잘 만들고자 하는 태도는 그 부분을 돋보이게 하지만, 그것이 결국 ‘한편의 춤’의 완성적 측면, 즉 나처럼 ‘흐름’을 중시하고, ‘한국 춤의 생명력을 흐름’으로 파악하는 사람에겐 매우 아쉽고 안타깝다는 점이다.


4. 1990년대의 창작춤은 왜 이어지지 못했을까


나는 이 세 작품을 보면서 1990년대의 한국 창작춤이 떠올랐다. 아마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은 이런 춤을 본 적이 없을 것 같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한국의 창작춤에 관계된 이들을 매우 존중한다. 그 시절의 춤꾼은 더 진지했고, 더 연구했다. 그러함에도 그들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전통’과 ‘창작’이라는 이분법이 너무도 분명했다. 그 시절의 사고에는 ‘전통이 창작이요, 창작이 전통이다’란 사고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절 사람에게 ‘전통’은 거의 ‘소재’였다. 그리고 전통을 소재로 삼아 만든 작품에는, ‘애초부터 흐름이란 없었다’. 나는 그 시절의 여러 춤에서 좋은 부분이 많았는데, 지금 그런 춤이 전해지지 않고 있는, 곧 전승(傳承)되지 않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를 ‘흐름’에서 찾는다.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된 형태가 아니었기에 그렇다.


그 시절의 그 열정적인 춤꾼들이 전통과 창작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전통춤에서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전통춤’을 생각했고, 거기에 전통춤 특유의 ‘일관된 흐름’을 생각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은 전통춤 특유의 ‘흐름’을 간과했으며, 오히려 이런 ‘흐름을 끊는 것’이 오히려 창작이라는 생각마저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춤은 매우 우수한 작품이 있음에도, 그것이 ‘전통춤의 영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전통을 가져와서 전통과는 다르게 보이고 싶은 의도(욕망)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다. 앞의 3인은 분명히 ’전통을 전통답게 바라보는 시각‘ 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전통춤에 흐르는 ‘흐름’을 완연히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구현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분명 전통을 통해서 뭔가를 모색(摸索)하고 있음은 확실히 전달된다.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싶다. “‘전통춤’의 영역에서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 생각은 분명하다. “춤꾼 개인적인 ‘모색의 욕망’이 한국 춤 특유의 흐름이라는 ’본원적 생명력‘을 압도했을 때, 그것이 ‘창작적 전통춤’은 될 수 있어도 ‘전통적 전통춤’은 될 수 없다” 그런 작품은 지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전통에서 가져온 창작품이 그렇듯이, “부분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어도, 전체를 그렇게 평가하긴 어렵다”


‘전통춤’과 관련해서 매우 역설(逆說)적 진실이 있다. 작품을 만들 때, ‘전통을 크게 설정하고 그 안에 나를 존재하게 할 때’는 나(我, 춤꾼)가 보이나, ‘자신을 먼저 설정하고, 그 안에 전통을 존재하게 할 때’는 내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5. 춤의 지역성(Locality): 꽤 살아있었고, 더 살려야 한다


한국의 전통춤의 ‘정통성’ 또는 ‘전통성’은 무엇일까. 정통성과 전통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여럿이겠지만, 그 중 중시해야 할 것이 ‘지역성’이라고 본다. 첫날에 본 여섯 개의 춤은 매우 고맙게도 ‘지역성’이 아주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그걸 춤꾼 자신이 의식한 건 아니겠으나, 나와 같은 시각에선 분명히 느껴졌다. 특정 지역에서 지역 언어(사투리, 토박이말)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것이 그 지역만의 정서를 담고 있는 걸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박연술은 제주, 복미경은 서도(西道), 윤종현은 서울경기/안성, 송미숙은 전북/군산, 채향순은 충청/대전이 느껴졌다. 춤을 통해서 아주 분명히 보였다. 전통춤을 오래 본 시각에선 그런 지역적 DNA가 존재했다. ‘지역소멸’을 걱정하는 시대에, 이렇게 특정 지역의 정서가 느껴지는 춤은 얼마나 고마운가. 전통춤이 이 땅의 곳곳에서 더욱 성장하기 위해선, 지역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하고, 지역성이 살아있는 춤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두어야 한다.


이번 춤판에서 5인에게선 지역성이 매우 특징적이었는데, 홍지영에선 상대적으로 덜 느껴졌다. 어느 특정 지역의 정서와 연결하기 힘들었다. 물론 지역성이 덜 느껴진 춤이라고 해서 그 춤의 가치가 덜 한 건 분명히 아니다. 단지 나와 같은 시각에선, 홍지영의 춤이 더욱더 깊게 자리를 잡기 위해선 ‘지역성도 고려사항’이란 걸 꼭 말해주고 싶다. 내 바람을 말한다면 홍지영의 춤이 ‘강원도’와 좀 더 연결되었으면 좋겠다. 춤 음악을 들어보니 거기서 ‘메나리토리’가 꽤 살아있었다. 메나리토리는 강원도의 토속적인 선율이다.


첫날의 6인의 춤꾼은 모두 ‘우수했다’. 만약 다섯 개의 별점으로 평가한다면, 별이 4개 반, 적어도 4개 이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 경우, 춤을 보고 가장 감격하거나 감동했을 때 신중하게 ‘훌륭했다’라고 말한다. 별이 5개인 경우다. ‘우수하다’는 다음 단계일진대, 춤을 보고 감흥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그 춤을 보고 “내 안의 ‘사유의 세계’가 열릴 때”이다.


춤을 보는 태도, 더 나아가 ‘춤을 평하는 시각’은 사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그런데 개인의 성향이라고 그저 넘기기에는 다소 우려스럽다. 춤을 추는 ‘춤꾼 자신’도 그러하고, 춤과 관련한 글을 보면 그 글 속에서 ‘감정’과 연관된 용어를 주로 해서 전개하는 글이 꽤 많다. 이것은 춤이란 장르의 특성과도 연관되겠지만, 춤에서 ‘감정 또는 정서’는 기본조건(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 내지 춤의 지향점은 아닐 것이다.


춤 자체이건 춤과 관련된 글이건 간에, 그것은 ‘몸’, 곧 신체성(身體性)을 전제로 한 사유와 깊이 연결해야 한다. 그런데 춤에 관한 글을 보면 아주 아이러니한 면을 볼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감정과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인데, 이걸 상투적이거나 때론 모호한 수사(修辭)로 연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매우 관념적 영역의 단어와 입장으로 평가한다.


내가 ‘득무’라는 단어와 개념에서 우려하는 지점이 바로 이거다. 최근 춤과 관련한 팸플릿이나 설명 등을 보면서, 진정 ‘관념어의 남발’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나 또한 그런 영역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겠는데, 앞으로는 확실히 거리를 두고 글을 전개하고자 결심하면서, 여섯 개의 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글을 잇겠다.


6. 여섯 개의 춤, 여섯 개의 미(美)


6-1. 박연술, <휘어살풀이>



진실한 춤이고, 경건한 춤이었다. 춤꾼에게 기본적으로 내재한 ‘선한 에너지’가 객석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제주 4·3”과 연관된 매우 숭고한 작품이었다. “‘제주 4·3 유족’이 보면, 이 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공감이란 단어를 넘어서서, 마음으로 이 춤을 온전히 받아들일 거란 믿음이 생긴다. 춤이라는 것이 대사회적 메시지를 넘어서 ‘치유의 기능’을 생각했다. 어쩌면 그 시절에는 이애주의 <바람맞이>가 있었고 지금은 박연술의 <휘어살풀이>가 있다는 말이 가능했다.


그럼 아쉬움은 무엇인가. 역시 ‘흐름’이 부족했거나, 자연스럽지 못했다. ‘상황’을 전달했고, 그것이 매우 구체적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일반인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의 고양(高揚)에 다다르지 못했다. ‘정서나 감정’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것을 느끼게 하고, 이것을 움직이게 하고, 이것의 절정을 경험한 후에, 이 감정을 풀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다. 정서야말로 기경결해(起經結해)가 있어야 한다. 감정은 쌓여가면서 농밀해져야 하는데, 그것이 크게 느껴지지 못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미덕이 있었다.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겹겹이’ 쌓여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아쉬움은 역시 ‘흐름’이었다. 박연술의 춤 가치는 로컬리티(Locality)적 구현의 측면에서 매우 우수했다. 의도(意圖)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추도(追悼)에 머물렀다. “제주 4·3”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춤이겠지만, 이것이 보편적 다수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좀 더 다듬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까. 춤을 ‘역사의 증언’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 춤이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 되기 위해선 어떠해야 할까? 역사적 특수성을 예술적 보편성이라는 ‘흐름’ 속에 태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춤은 증언을 넘어선 득무의 경지에 닿을 것이다.


6-2. 복미경, <태평, 산조>



한국의 전통음악 중에서, 활용도가 가장 낮은 음악이 ‘서도소리’, 곧 서도창(西道唱)이다. 음악이 이러할진대, 서도를 가지고 ‘춤’을 접근했다는 건 매우 새로운 발상이다. 복미경은 국악에 관한 이해도가 높다. 그래서 국악과 전통춤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알고 있다.


이 작품에선 삼자(三者)가 융합했다. 첫째는 태평무, 둘째는 산조, 셋째는 서도제(西道制)이다. 태평무의 춤사위에서 출발하여 이걸 산조(散調)라는 ‘흐름’으로 이어간다. <태평, 산조>가 서도제라는 점이 놀랍다. 이 작품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태평무>의 ‘서도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복미경과 함께 음악을 만든 김승태(해금), 권서영(가야금), 김태영(장구)의 실력을 크게 인정한다.


복미경은 태평무의 의상부터 느껴지는 무거움과 금박을 모두 거두어냈다. 서울 근정전의 춤이 아니라, 평양 부벽루의 춤으로 만들었고, 개성 만월대의 춤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이 음악 속에는 <관산융마(關山戎馬)>, <수심가>, <난봉가>의 선율이 녹아 있었고, 춤꾼의 ‘근거 있는 상상력’이 전제가 된 의식(意識)이 느껴졌다. 전통을 ‘깨어있는 실체’로 생각한다고나 할까. <세실풍류>의 모토에 비춰서, 복미경의 <태평, 산조>는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춤이라는 것은 대다수가 인정할 것이다.


6-3. 윤종현, <서울무당춤>



윤종현은 ‘기술’이 대단했다. 근년에 윤종현의 춤판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 전통춤의 30대에 이런 훌륭한 춤꾼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반가웠다. 일찍이 전통춤을 알았고, 좋은 스승에게 너무도 잘 배우고 잘 받아들인 것이다. 몸의 안정감을 유지한 상태에서, 여러 발동작의 연결은 ‘예전 저렇게 춤추는 명무가 누구였지?’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춤에 빠져든다.


이번 <서울무당춤>에서도 그의 기예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무대에서 제대로 구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춤을 보면서, 과거만큼 관객으로서 감흥을 받진 못했다. 그는 이 춤을 만들기 위해서 지속해서 공부하고 찾아내고 연습하고 결정했겠지만, 결정적으로 부족한 건 역시 ‘흐름’이었다. 이번 공연의 10분은 마치 한 시간 공연의 10분간의 다이제스트였다. 춤꾼이 보여주는 건 많았지만, 객석에서 느껴지는 건 상대적으로 적었다. 4-5개의 춤의 나열은 있었으나, 그것이 연결되지 못했다.


‘연구’와 ‘연행’을 병행하는 것에 큰 박수를 보낼 수 있지만, 이번 작품은 ‘연행으로서의 배치’는 크게 안타까웠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독 위에 올라갈 때였다. 춤판의 무대엔 여러 오브제가 있다. 관객은 거기에 시선이 쏠린다. 특히 무대 중앙이나 무대 맨 뒤 중앙에 있는 오브제는 더욱 그러하다. 과연 저 오브제와 춤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사이다. 이번 <서울무당춤>에선 무대 맨 뒤 중앙에 놓인 독이 그러했다. 서구적인 기승전결이건, 한국적인 기경결해이건, ‘독’은 분명 ‘결(結)’에 등장해야 하는 결정적 오브제이다. 그런데 윤종현은 이 독을 춤의 진행 과정에서 경(經)에 사용했다. 오브제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브제가 춤의 진행의 한 경과 혹은 절차(과정)로 보이게 된 것이다. 독 위에서 춤을 추고 내려온 순간,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후의 춤에서도 윤종현은 춤의 밀도는 매우 높았으나, 관객이 체감하는 건 그렇게 높지 못했다.


여기서도 매우 역설적인 사실을 윤종현에게 말하고 싶다. ‘무당춤’은 ‘무당’과 ‘춤’이 결합된 단어다. 일반적으로 둘 중에 어디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할까? ‘무당’이다. 무당은 춤꾼이 아니다. 아이러니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춤을 잘 출수록, 무당으로 보이지 않는다. <서울무당춤>이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선, ‘춤을 줄여야 한다’. 춤꾼 스스로가 기량을 발휘하는 ‘잘 추는’ 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객을 끌어들이는’ 춤이 되어야 한다.


무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리듬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리듬과 다르게 동작했을 때, 굿판의 사람들은 그에게 더 집중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번 반복해서 강조한다. <서울무당춤>에서의 윤종현은 ‘너무도 춤꾼’이었다. ‘춤’에 치중한 나머지, ‘무당’이 되지 못했다. 무당은 어떻든 신(神)과 연결된 존재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종교는 영성(靈性)과 연관된다. 기교가 영성을 넘어서면 곤란하다. 공연임에도 제의(祭儀)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서울무당춤>은 궁극적으로 춤으로 존재하기보다, ‘굿’으로 보일 때, 이 춤의 존재가치가 분명해진다.


6-4. 홍지영의 <可가 ... 닿다>



홍지영은 춤의 ‘기본기’가 좋았다. 그런데 이걸 너무 의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춤은 동작(動作)이지만, 작품은 동력(動力)이어야 한다. 홍지영에게선 ‘교육’적인 동작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춤 속에 계보가, 스승이 너무 강하게 느껴졌다. 매우 가혹한 말이 될 수 있겠으나, 이번 공연에서 춤의 동작은 좋았으되, 춤의 ‘흐름’이 가장 약한 것이 홍지영이었다. ‘흐름’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홍지영의 춤에는 수직적으로 내리눌리는 그 무엇이 존재하는 듯싶다. 그것은 계보이고, 스승일지 모른다. 홍지영에게도 역설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다. 계보와 스승에서 벗어날 때, 홍지영 자신도 더 보이고, 오히려 그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계보와 자신의 스승이 더 돋보인다고 말하고 싶다.


홍지영은 ‘수직적 지속성(持續性)’에서 벗어나서, 홍지영의 ‘수평적 지향성(指向性)’으로 이미 향해가야 했다. 지금은 ‘지(持)의 춤’이다. ‘가지고 있는 걸’ 놓치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지(指)의 춤’이 되어야 한다. 손안에 꼭 ‘움켜쥐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손으로 가르칠 때[指]’ 홍지영의 춤은 놀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지금 알 안에 있다. 알을 깨야 한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데미안』(Demian)을 홍지영에게 말하고 싶다. 홍지영은 지금 ‘알’ 안에 있는 건 아닌가. 거기엔 스승과 계보라는 안식과 구속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홍지영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알을 깨는 고통과 용기가 아닐까. 홍지영의 춤에서 아브락사스(Abraxas)를 보고 싶다. 지금처럼 뭔가 '정답과 같은 춤'이 아니라, 홍지영 더 나아가서 인간이 확연하게 보이는 춤을 보고 싶다.


6-5. 송미숙, <민살풀이춤 - 무화지정>



송미숙의 춤은 흐름이 좋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의 정서를 이어 나갔다. ‘이어 붙이기’에 익숙한 젊은 춤꾼에게 ‘이어 나가기’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었다. 자기 세계가 분명한 명무(名舞)이지만, 평론을 하는 사람은 뭔가 ‘또 다른 측면’을 얘기해주고 싶은 속성이 있다.


송미숙의 춤의 흐름은 매우 강력해서, 누군가에겐 ‘권위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판’에는 춤꾼만 있는 게 아니다. 춤추는 ‘몸의 가치’와 춤을 보는 사람의 ‘마음의 정서’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예전 춤방(율방) 문화에서처럼,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마음 편히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연구가 더 필요해 보인다.


훌륭한 춤임에도 바람을 얘기한다면 이렇다. 무거움보다는 묵직함이었으면 한다. 단단함보다는 든든함이었으면 한다. 단단함은 때로는 경직됨이다. 이럴 경우, 타자의 감정이 스며들 틈이 부족하다. 든든함은 다르다. 단단함을 유연하게 풀어내어, 타자가 기댈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는 상태이다.


송미숙의 춤은 매우 밀도가 높은 것이 강점이나, 이 춤을 보면서 ‘매우 편하다’라고 소감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게감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묵직함을 채울 때, ‘단단함의 긴장’을 ‘든든함의 신뢰’로 바꿀 때, 이것이야말로 ‘득무(得舞)의 순간’이 아닐까.


6-6. 채향순, <장구춤 – 화조풍월>



채향순은 ‘판’을 너무도 잘 알았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꿰뚫고 있었다. 충청도 농악의 뿌리가 된 양도일과 송순갑을 떠올렸다. 연희판이 아닌 춤판을 놓고 볼 때, “설장구는 채향순이 갑(甲)”이라고 누구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반주가 아쉬웠다.


채향순은 전반부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춤판의 엔딩이라는 의식이 꽤 작용한 듯 보였다. 그런데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충청도 농악 특유의 ‘어르고 달래는’ 장구 가락이 정겨웠다. 그런데 이런 느낌을 관객들이 많이 경험하지 못했을 듯싶다. 왜일까? 악사의 반주 때문이다. 요즘 실력이 좋은 젊은 국악인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 중엔 ‘연주’와 ‘반주’를 구분 못 하는 반주자가 참 많다. 그저 자신의 기본적인 톤(tone)만 믿고, 춤은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강력한 소리로만 밀어붙인다. 이번의 피리 및 태평소 연주자는 그러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불어댈 때, 춤의 다양한 정서가 희석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다. 춤판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다. 그 순간에는 연주자가 아니라 반주자이다.


7. 모색하는 춤꾼들에게: ‘이어 붙이기’에서 ‘이어 나가기’로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의 ‘창작적 전통춤’은 ‘모색이 있는 전통춤’이다. 그러나 ‘모색’은 존중하나,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흐름’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전통춤’의 계보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없다. 한국의 명무(名舞)를 보라. 그들의 춤에는 모두 흐름이 있다.


어쩌면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에게도, 각자 본질적으로 ‘흐름’이 있을지 모른다. 흐름을 회복하는 것은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몸 안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욕심과 긴장을 덜어내는 작업이다. 춤을 '이어나가는' 힘은 결국 연행자가 무대 위에서 자신을 얼마나 비워내느냐, 얼마나 솔직해지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세 명의 춤꾼의 ‘욕심’ 혹은 ‘욕구’는 실제 아름다움과 가치 있는 것에 출발했다. 박연술은 ‘관념의 욕구’, 윤종현은 ‘연구의 욕구’, 홍지영은 ‘계보의 욕구’가 강했다. 박연술은 관념(이념)에서 벗어나, 그 관념을 살아 숨 쉬게 할 자신만의 춤사위를 찾아내야 한다. 윤종현은 동작(연구)에서 벗어나, 그 결과가 연행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해야 한다. 홍지영은 학습(계보)에서 벗어나, 자신을 여과 없이 보여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전통춤은 ‘구성’이 아니다. 전통에 관한 모색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흐름’으로 연결되지 못할 때,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은 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수 있다. ‘흐름’을 알게 되면, 모색적인 ‘이어 붙이기’가 얼마나 수가 낮은가를 알게 된다. 이런 것을 깨닫는 순간, ‘이어 나가기’가 보일 것이다. 이런 것이 곧 진정한 ‘전통적 전통춤’의 시작이다. 그것이 명무로 가는 출발이요, 득무로 인정받게 되는 관건(關鍵)이다. ‘해결의 열쇠’는 박연술, 윤종현, 홍지영의 손에 쥐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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