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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예술가의 초상 - <차이코프스키- the Mystery of Life and Death>




 조명이 집중된 무대 뒤편의 하얀 침대, 병상에 누워 투병중인 차이코프스키 주변에 검은 환영들이 들끓고 있다.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했던 마녀, 앞서 세상을 등진 아내 밀류코바, 삶을 관통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온 내면의 또 다른 자아들이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인형 등 불멸의 발레음악을 남기고 53세에 요절한 천재음악가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 1840~1893)는 아마도 자신의 불행을 팔아 후세의 관객들을 열광케 하는 비극적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 the Mystery of Life and Death(국립발레단, 2013.6.28~30, 오페라극장)  는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의 안무가로 손꼽히는 보리스 에이프만(Boris Eifman(1946~ )이 만든 차이코프스키 이야기다. 199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한 작품을 국립발레단이 2009년 처음 국내 무대에 올렸다. 당시에는 불라디미르 말라코프, 알렉세이 투르코, 나탈리아 포보르지뉴크 등이 직접 내한하여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분신, 밀류코바역을 맡아 본바닥 춤을 보여주었고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한국인 주역으로 김현웅․이동훈․ 김주원과 이영철․장운규․김지영이 같은 역을 맡은 트리플 캐스팅이었다. 그 때 이후 처음 한국발레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재연된 이번 공연엔 네 명의 출연자가 더블캐스팅으로 등장한다. 차이코프스키(이영철/이동훈)와 그의 분신(정영재/박기현), 차이코프스키의 부인 밀류코바(박슬기/이은원)와 오랜 후원자였던 폰 멕부인(유난희/신혜진)이 그들이다. 초연 멤버였던 이영철, 이동훈, 유난희는 이번에도 주역을 맡았다. 나는 이틀째(토요일) 두 번째 공연인 이영철 캐스팅을 보았다.




 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5번교향곡 1,2,3악장과 6번교향곡(비창), 현을 위한 세레나네 2,3악장을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정치용)가 연주한다. 우주기지처럼 공중에 떠있으면서 금방 쏟아져 내릴 듯 지상을 압박하는 웅장한 무대장치, 장면의 변화에 따라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색조를 바꾸는 원색적 하늘, 선과 악의 대비를 보여주는 백조와 흑조의 군무 등은 이 작품의 볼거리다. 이러한 무대효과를 통해 <차이코프스키>는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창작적 고통과 정신분열증으로 신음하는 천재음악가의 황폐한 정신세계는 물론, 여성인 재정후원자와 아내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적 갈등과 동성애자를 보는 당시의 사회적 편견 등 예술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극한적 요소들을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모든 비극적 요소들은 에이프만 특유의 연극적 서술형식과 도박판 등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시대상 묘사를 통해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의 춤 역시 넘치는 힘과 활력으로 무대를 달아오르게 하고 객석의 호응을 끌어올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돈키호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햄릿, 돈 주앙, 안나 카레니나, 로댕 등을 작품소재로 사용하며 특이한 인간 삶의 궤적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에이프만에게서 단순한 무용안무가를 넘어 자기애와 성적본능으로 대표되는 프로이드나 외모과 내면의 상반성으로 고민하는 오스카 와일드를 떠올린다. 국립발레단(대표:최태지)과 보리스 에이프만의 좋은 궁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명예교수)

사진_ 국립발레단 제공


(7월10일, 서울문화투데이에 게재된 평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