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개의 기억
번잡한 도시 한 복판,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무심해보이지만 그들은 자기만의 기억을 갖고 있다. 아름답거나 슬픈 기억, 아픈 기억, 흐릿하면서도 명확한 기억…. 유년부터 지금까지 품고 있는 기억들은 다양하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은 있어야할 흔적들이었고 지금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연옥은 그 모든 기억들을 60분의 컨템퍼러리 발레작품인 <천개의 기억>(백연옥발레단, 2013.6.14~15, 강동아트센터 한강)속에 담고 있다.
무대 가장 깊은 곳에서 휘장이 열리고 전은선이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앞에 놓인 뮤직 박스를 집어 들면 추억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한 떼의 소녀들이 환성을 지르며 무대를 가로질러간다. 고무줄놀이, 잠자리채로 나비잡기, 무궁화술래놀이 등 유년의 기억이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천정에서 내려온 두 개의 네모난 스크린에 흑백으로 혹은 컬러로 보이는 사진들은 과거의 추억이다. 콧대 높던 처녀시절에 받았던 낭만적인 프러포즈는 유회웅의 솔로로, 꿈에 부풀었던 외국여행의 추억은 특별출연한 아르헨티나 탱고스타 에스네르또 수떼르(Esnesto Suter)와 파올라 끌린헤르(Paola Klinger) 커플이 보여주는 탱고로 감미롭게 꾸며진다.
하얀 의자 여덟 개를 늘어놓고 추는 춤은 학창시절 교실에서의 기억일 것이다. 바닷가 여름 풍경도 있다. 스크린에 갈매기가 날고 바다를 노래하는 바하의 칸타타가 마음을 싱그럽게 하는 무대에 손유희와 이현준의 듀엣이 펼쳐진다. 부부 무용수인 그들은 유니버설발레단을 거쳐 미국 툴사발레단(Tulsa, Oklahoma)에 소속된 수석무용수들이다. 작고 단단한 몸에서 터져 나오는 손유희의 에너지가 여름바다 젊음의 약동을 느끼게 한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인생에도 가을이 닥쳐온다. 고요하고 침잠해지는 시간 붉은 안감이 내비치는 드레스차림인 김성민의 솔로가 시작된다. 가늘고 여린 몸매와 서정적인 음악이 만들어내는 감성적 춤이다. 피날레는 다시 전은선의 몫이다. “기억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몸에 맡겨 실려 간 아름다운 시간의 대가(代價)…” 한참의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삶의 마디마디에서 쌓여진 그리움들을 간직하고 인생의 가을을 맞은 여인의 고뇌와 염원이 오롯이 담겨진 춤이다.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수상했고 지금은 스웨덴 왕립발레단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전은선이 긴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무대를 휘젓는 춤에서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머리 위에 나뭇가지를 얹은 여인들의 행렬이 무대 뒤로 지나간다. 삶은 현재진행형이고 기억 또한 계속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천개의 기억>은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아래 국립발레단이 주최한 2012년 창작팩토리지원사업에 선정된 6개중 한 작품이다. 세련된 무대와 영상디자인(이태섭, 황정남)이 인상적이고 기억의 흐름을 따라 어둠과 밝음을 조화시킨 전정호의 조명과 시간여행을 이끌듯 60분의 공연시간을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음악으로 채워준 임진영의 음악성이 돋보인다. 공연시간 내내 관객들을 숨죽이게 하며 아름다운 무대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전 현직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원으로 구성된 무용수들의 뛰어난 기량에 힘입은 바 컸을 것이다. 그들의 춤에 덧입혀진 백연옥의 안무는 섬세하고 청순하다. 언뜻 생각하면 평범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를 한 송이 백합처럼 환하게 피어나게 한 원천은 바로 그 순수함이었을 것이다.
작(昨; Yesterday)
삶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또 한 편의 작품이 트러스트무용단(김형희)의 <작(昨; Yesterday)>(2013.6.13~15, 아르코소극장)이다. 인간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늙음 또는 그 절정 가까이에 도달한 노년의 삶에 대한 담론을 서사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무대 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커다란 바람개비 세 개가 늘어서 있다. 바람이 불면 풍차가 돌듯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바람이 세상의 풍파라면 돌아가는 바람개비는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 무대 뒤에 마련된 자리에서 피아노와 첼로가 생음악을 연주한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무대에 7명의 젊은 무용수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가렸다. 침묵 속에서 계속되던 눈먼 자들의 방황이 끝나는 곳에 눈뜬 세계가 열리고 팔과 다리, 온 몸을 떨며 그들은 전율하기 시작한다.
두려움과 희망이 혼재하는 세상에서 삶에 대한 젊은이들의 도전은 겁이 없다. 길게 늘여진 줄을 타고 이동하는 꼭두각시인형이 등장하고 외발자전거가 외줄타기를 시도한다. 어린 시절 시골장터바닥에 앉아 숨죽이며 주시하던 서커스 풍경이 연상된다. 소년이면 누구나 수퍼맨을 꿈꾸던 한 때, 별모양 왕관을 쓰고 날아오르던 원더우먼은 소녀들의 또 다른 로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도구들이 어쩐지 낯설고 유치하다. 노화가 시작된다. 죽음과 상여가 등장하고 인체의 노화과정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도 내레이션으로 전해진다. 서정적인 라이브 음악과 함께 시작된 진지했던 분위기는 어설픈 소도구의 등장과 사변적인 독백 장면을 거치는 사이 긴장감은 사라지고 작품은 희화적으로 변모한다. 그 동안엔 춤도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7명의 춤꾼들로 채워진 소극장 무대에 90분의 공연시간은 너무 길다. 가운데 30분을 차지한 어설픈 패러디를 잘라냈다면 이러한 시간적 절제를 통해 작품은 긴장감을 유지하며 완성도도 함께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대장치와 조명(김철회), 음악(연리목), 송명규, 구선진, 김동희 등 지칠 줄 모르고 무대를 누비는 춤꾼들의 역동적 춤에 함께 달아오른 관객들의 호응도는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텍스트에선 노화를 이야기하면서 실제 무대 위에는 노년의 삶에 대한 이해와 아름다움, '자신의 체온을 버려 새싹을 틔우는 노년의 합창'을 느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의욕적인 텍스트와 이를 따라가지 못한 연출의 괴리가 아쉽게 느껴진 작품이었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강동아트센터, 트러스트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