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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무엇인가 - 최경실의 <춤추는 논객>

 

 춤은 무엇인가? 누가 춤출 수 있는가? 무용가와 관객들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최경실의 춤 <춤추는 논객>을 보는 동안 줄곧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의문들이다. 논객(論客)은 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춤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일반 관객보다 더 자주 춤 공연을 보러 다닐 터이고 자연히 춤에 대해서 할 말이 쌓이다보니 아마도 춤을 추고 싶어 할 사람들이다. 최경실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앞 작품인 <물의 꿈>에서 그러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작품을 보고 나는 이렇게 썼다.

 

 최경실의 춤 <물의 꿈; 2010.10.10~11, 예술극장>에서 물은 자연이고 무용가의 꿈은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이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 즉 'Being for Itself' 혹은 'Spontaneous Existence' 다. 소리 없이 땅 속을 흐르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엷은 지표를 뚫고 스미어 나와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물은 곧 자연이고 생명의 근원이다. 최경실이 ‘물의 꿈’을 통해 구현해보고자 한 무용가로서의 꿈은 끊임없는 자연과의 소통이며 물의 속성에서 찾아낸 솟구치는 생명력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삶과 춤에 대한 자유로움일 것이다. (뷰즈 2011, 봄호)

 

 <춤추는 논객>엔 10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6명은 전문 무용수들이고 4명은 이 작품 이전에 한 번도 춤을 추어보지 않은 논객 들이다. 건축가, 시나리오 작가, 돌쌓기 전문가. 가수가 이들의 직업이고 둘은 남자 둘은 여자다. 7개의 씬 중에서 두 개는 논객들만 추고 4개는 전문무용수가, 마지막 씬은 10명 모두 함께 추는 흥겨운 군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작품 팸플릿을 보지 않는다면 누가 전문무용수고 누가 논객인지 구분하기가 수월치 않다. 그만치 모두가 춤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누가 춤출 수 있는가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전문무용수, 일반관객, 그리고 춤이 좋아 춤추고 싶은 논객들이다. 춤을 보러 다니지만 무대에 올라 실제로 춤추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들을 일반관객이라 한다면 학교에서 춤을 배웠고 무대체질인 전문무용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중간에 있는 논객들이다. 그들의 역할에 따라 춤이 무엇인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막이 열리면 언뜻 삭막해 보이는 도시주변의 영상이 보인다. 희끄름한 벽돌로 지어진 창고, 배가 부른 하얀 개 한 마리, 도로를 오고 가는 트럭과 자전거...그 모퉁이에 최경실이 서 있다. 무엇인가 동작을 하면서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여기 저기 불특정한 대상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춤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일까, 남들이 내 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몸으로 소통이 가능할까...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 같다. 4명의 논객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이야기들을 몸짓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나는 노총각이다 마흔이 되면 아프리카로 신부를 구하러가겠다. 나는 돌쌓기 전문가다. 내 작업을 방해하지 말아다오. 내가 쌓은 돌탑을 허물지 말아다오. 나는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를 받은 건축가다, 나는 러시아에서 왔다. 타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연하의 러시아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이혼도 했다. 이들 모두의 사연들이 각각의 춤으로 펼쳐진다.

 

 말로 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그들은 몸으로 털어버리고 싶다. 이것이 그들을 무대 위로 불러올린 심층의 욕망들이다. 속 시원히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지만 관객들은 아마 내 몸짓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들이 춤을 선택한 이유가 아마도 이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춤은 어렵다는 일반적인 인식, 춤이 관객을 모으지 못하고 주류예술로서의 기반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내면의 고통을 풀어가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통로가 춤이라는 최경실의 주장이 읽혀진다. 춤은 소통의 수단이기에 앞서 치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춤이 몸의 각 부분을 분해한다. 머리와 팔꿈치, 겨드랑이, 어깨, 가슴, 엉덩이, 허벅지, 발등까지 몸의 각 부분을 어루만지며 무수한 몸짓들을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이 춤이 된다. 몸체 각 부분에 숨어 있던 춤의 DNA가 깨어나기 시작한다.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영혼이 깨어나고 그들 사이에 서로의 아픔들이 소통되기 시작한다. 춤은 개인의 치유를 넘어 너와 나의 소통과 배려로 이어지는 것이다.

 

 <춤추는 논객>을 통해 최경실은 춤의 재료인 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미 무용수이고 그들이 풀어내는 자기의 이야기가 바로 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거를 위해 비 무용인들을 무대에 끌어들여 자유롭게 춤추게 하고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10명의 출연진이 틀에 박힌 동작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몸의 자유를 허락하고 음악으로 시작과 끝만을 통제하는 최경실의 춤 예술관은 독특하다. 그가 2011년 제31회 서울무용제에서 안무대상을 수상한 저력이 금년의 신작 <춤추는 논객>을 통해 다시 확인된 것을 축하해주고 싶다.

 

 

글_ 이근수(경희대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이 글은 <뷰즈> 2012년 겨울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