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랙 스완>의 히트에 연이어 나탈리 포트만과의 결혼으로 벵자밍 밀피예의 춤은 대중성 아닌 대중성을 얻었다. 이번 무대는 밀피예의 첫 내한 공연이기도 하지만 그가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예술 감독으로 임용된 직후여서 무용 팬들의 이목도 더욱 집중되는 상황이다. 윌리엄 포사이드, 엠마누엘 갓의 작품과 함께 이번 공연은 모던 발레의 성찬이라고 할 만한 알찬 기획이 되었다. 그러나 세 작품 모두 음악성을 부각시킨 공통점이 있고 각각의 작품에서 음악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눈여겨 볼 필요는 있었지만 규모도 깊이도 분석의 자로 잴만한 그릇은 아니었다. L.A. 댄스 프로젝트는 아티스트들의 디바이징 작업으로 신선하고 흥미로운 안무에 초점을 둔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들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관객에게 “새롭고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무용수들의 기량도 고르지 않았다. 부푼 기대는 은근한 실망으로 쪼그라들었고, 격조 있는 모던 발레를 감상했다는 정도로 그 기대를 대체해야만 했다.
벵자멩 밀피예 <리플렉션>(2013)
강렬하고 산뜻한 타이포 그라피의 무대가 인상적이다. 빨간 바탕에 흰색 글씨가 시각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무대의 시각성과 더불어 관객을 매료시키는 피아노 선율, 일상성을 바탕으로 한 위트와 경쾌한 기교는 아름답고 감미롭고 매혹적이다. 삶의 단편들이 세련된 기교로 가볍게 묘사되는데 희극적인 터치도 억지스럽지 않았다. 그 영감의 원천은 보석의 광채라고 한다. 그렇다면 제목 리플렉션의 의미는 아주 피상적인 것이었나? 가볍고 산뜻한 미니멀리즘, 밀피예의 안무는 그가 얻은 대중적 인기만큼이나 대중적인 가벼움을 보여주었다.
엠마누엘 갓
역동성 있는 무대는 이스라엘 출신 안무가의 작품임을 인정하게 한다. 밀피예의 작품과는 대조적이다. 움직임이 가볍지 않고 의미 있는 서사에 기대고 있음이 느껴진다. 음악도 아름답기보다는 중후하다. 그러나 움직임과 잘 어울리지 않는 음악과 나레이션의 어색함이 줄곧 불협화음처럼 걸린다. 이것을 독특한 시도로서 이해해야 할까? 음악과 더불어 흘러나오는 베케트의 연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의 테이프 속 음성은 무용수의 몸에 집중하는 것을 줄곧 방해했다. 청각과 시각의 이질감으로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가운데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어색해지고, 메시지를 주고자 애쓰는 가운데 무대는 허전해진다. 의도적인 설정일까? 엠마누엘 갓의 과도기적 작품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도약하는 과정에서의 어긋남, 움직임 사이의 틈새, 이것이 그녀만의 미학으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윌리엄 포사이드
초연된 지 20년이나 흘렀고, 이미 관심을 충분히 받았던 작품이다. 윌리엄 포사이드가 아내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만들었다는 창작의 동기는 작품성을 앞질러 여전히 좋은 추억으로 각인되고 있다. 낡은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인의 노랫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회상을 부추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닌 삶의 의지를 표현했다고 하는데, ‘찬란한 슬픔’이란 바로 이런 장면인가? 5중주
모던 발레가 테크놀로지와 결합하는 등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무대 위에 보이는 것만으로 현대무용과 현대발레의 차이는 약간의 테크닉 외엔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얼핏 보기에 현대발레가 현대무용에 비해 기술적인 부분에서 그 영역이 더 넓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발레를 여전히 옥죄고 있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음악(리듬)과 절연할 수 없는 테크닉의 특질이다. 발레가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고, 형식뿐 아니라 주제 면에서도 정치․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등 부단히 변화해 왔지만 전형성을 제거할 수 없는 테크닉의 잔재는 결코 소멸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삭제된다면 더 이상 발레가 아닌 것이다. 위의 세 작품은 모두 단출한 무대였지만 안무가의 기본적인 특성을 보여준 소품들이어서 모던 발레에 대한 단상을 새겨 보게 했다.
글_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LG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