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질 들뢰즈는 프랑시스 베이컨의 회화사에 대한 ‘감각의 논리’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은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움직임은 하나의 결과이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베이컨의 작품엔 움직이지 않는 머리 위에 행사되는 압력, 팽창력, 수축력, 평탄하게 누르는 힘, 늘어뜨리는 힘이 존재하고 이 힘들은 우주선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초공간적 여행자가 만나는 힘이다. 그리하여 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전혀 예상치 않던 각도에서 머리를 후려치는 것과도 같다. 그러면 여기서 지워지고 쏠린 얼굴 부분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그 까닭은 이 부분들은 힘이 두드리고 이는 지역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몽펠리에 안무단의 크리스티앙 리조는 무용수이자 배우인 케럼 겔레백(kerem GELEBEK)을 1인 솔로 무대로 등장시켜 공간 위에 보이지 않는 힘을 등장시킨다. 그 힘은 여기<HERE>에 존재하는 힘이다. 힘은 어디인가로부터 와서 여기의 곳곳에 머물고 저기로 이동한다. 배낭을 멘 한 남자<케럼 겔레백>은 화분과 돌멩이, 창틀을 비롯한 몇 가지 단순한 일상의 오브제를 들고 밀고, 던지고, 피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강박과 우울, 해방이라는 통로를 드나든다. 움직임은 지극히 절제되어있으며 크고 빈 무대가 초라해 보일만큼 에너지가 드물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의 이동이다. 힘은 그를 튕기고 내버려 두었다가 돌보고 이동시킨다. 세계가 공간을 차지하는 인간의 여행일 뿐 아니라 세계의 공간을 부유하는 공기의 여행이기도 하듯이, 인물은 표면적으로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인물속의 힘은 우리에게 익숙한 중력에 기대어 있는 여행과는 다른 궤도로 한껏 변형되었다가 튀어오르며 새로운 감각을 드러낸다. 힘은 흔히 현대무용이 종종 범하고 마는 (쉽게 이미지의 세례를 받아 이야기의 바깥에 종속되거나 추상화되었다기보다는) 제 고유의 지역을 찾아 여행하는 듯하다. 힘은 행위인가?
무대를 1시간 남짓 1차적으로 점유하는 인물은 힘껏 이야기를 수축시키고 그 밖으로 튕겨나간 어떤 힘의 여행과 형상에 주변적 구조를 허물고 세우며 이 복무를 충실이 수행해 간다. 힘은 에너지의 문제로 무대에 접근되었다기 보다는, 개념의 진실에 다가가 있다. 어떤 숨겨진 진실의 역동성에 이 힘이 복무했던 것일까? 인간은 힘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며 그 관계 속에서 다양한 진실을 노출하기도 하며 힘을 은폐해 오기도 했다. 헤겔의 곡선(변증적)을 따르면 역사는 힘들의 응집이며 역동적인 조합이다. 하지만 그러한 힘의 지역들은 그동안 충분히 우리가 통상 ‘욕망과 결여’라는 기표위에서 인문적으로 적응해온 관계에 의해 어렵지 않게 보아왔다. 문제는 힘의 단순성에 다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리조(안무가)는 힘이 지워진 곳에 주목한다.
무용은 신체 위에 힘과 균형, 비례, 그리고 추상이 아닌 형상의 힘을 뿌리는 작업이다. 대부분의 연출과 안무는 그러한 힘뿌리기에 충동을 억제하고 자신의 관능에 말을 붙여간다. 관객과 교감이 안착되어지는 지점에 도착하면 우리는 그 힘에 내려앉아 그 곳을 상상력의 위상이 생기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분명히 해두자면 그러한 섬유질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충분히 우리는 열정에 등을 두들겨 주고 박수를 뿌린다. 하지만 어떤 신체의 균형적인 이미지 안에 충분히 들어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이해한 것이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균형 잡힌 에너지와 선명한 이미지의 섬유들을 보았다고 해서 우리는 신체 위에 뿌려진 힘의 근원에 대해 충분히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조작되어진 어떤 힘의 관계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없는가? 조명과 공간의 발육에 기대어 있거나 스스로의 에너지를 돕는 무용수의 힘은 증거되어지지만 느껴지진 않는다. 힘이 기능했기 때문이다. 생물은 힘에 자극을 받아 움직이지만 미생물은 살아온 시간에 대한 상태로 꿈틀거리고 있다(어쩌면 미생물은 힘보다는 온도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무용은 무대 위의 생물인가 미생물인가? 당신이 안무가라면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힘에 대해 스스로 반응하고 싶은가? 관객에게 당신이 지닌 기동과 입체의 힘을 제공하고 싶은가? 시가 언어에 의한 경험이 아니라 언어 뒤에 숨겨진 침묵의 지점까지의 경험이라면 무용은 신체 위에 선 힘이 지워진 곳까지의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은 억제되어야만 하는가? 현대무용은 그동안 제의적 요소나 개념적 문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난 성찰을 요구해 왔다. 비구상과 이야기의 바깥에 존재하는 영역에 대한 탐사는 더 이상 순수한 승화나 시적증거로 표백되어지는 범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키난’이 주목하는 것은 강박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알리바이를 쫒는 관계에 신체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요소들은 관객에게 충분히 피로감을 줄만큼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중력과 존재에 중심을 둔 그 힘이 어디서 왔으며 왜 여기<HERE>에 머물러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이 움직임을 집요하게 주목하게 만든다. 신체 위에 성립되어지는 모든 힘에 내기를 거는 것. 신체라는 혹은 무대 위라는 관계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힘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 터키어인 사키난 <생즉필사, 사즉필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쓸수록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뜻>이 함축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의 모순율에 애쓰는 인간의 또 다른 긴장을 조준하고 있다.
글_ 김경주(시인, 극작가, 드라마투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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