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의 군무로 춤이 시작된다. 그 한편에 사랑하는 여인 유리디체를 잃고 비탄에 쌓인 김용걸(오르페우스)의 절망적인 몸짓이 있다. 어찌하면 그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저승에서 날아온 새의 인도를 받아 저승길로 가는 것도 그는 두렵지 않다. 어둡고 음산한 여정만치 음악도 느리고 장중하다. 얼마만큼 왔을까. 흰옷을 차려 입고 춤추는 여인들의 꽃밭에 그는 당도한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그의 곁에 붉은 옷을 입은 김미애(유리디체)가 천천히 다가온다. 유명을 달리했던 연인들의 해후가 이루어진다. 사랑을 다시 찾은 기쁨과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젖은 정열적인 듀엣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발레도 아니고 한국춤사위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몸이 춤을 이끈다. 애당초 춤사위에 발레와 현대, 전통의 구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위적으로 이를 구획 짓고 독자적인 이름을 붙이고 어렵게 규칙을 만들어놓은 것이 오늘의 춤 장르가 아니던가. 삶과 죽음이 혼재하고 절망과 희망이 뒤섞이며 사랑과 연민이 함께하는 곳에 더 이상 장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자연스럽게 승화된 몸의 아름다움이 필요할 뿐이다. 이승으로 돌아갈 길은 험난하다. 그리고 김용걸에겐 여인에게 말해줄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이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무사히 죽음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러나 죽음에서 삶으로의 환생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꿈, 그들은 함께 자연스러운 그리고 소망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이 작품은 몇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국립무용단 주역무용수를 거쳐 2000년부터 ‘파리 오페라발레단’의 솔리스트로 활약하다가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발레교수로 금의환향한 김용걸이 처음 공개한 본격 창작품이라는 것이다. 안무가로서의 역량과 춤꾼으로서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뿌듯함이 이 작품엔 있었다. 발레작품에 한국무용가를 프리마로 등장시킨 것은 또 하나의 의미였다. 한국무용가가 발레테크닉을 춤춘 것도 아니고 발레리노가 이를 강조한 것도 아니다. 한국작품은 한국적 소재에서 찾아야 한다는 재래의 통념에서 벗어나 외래적 소재에 제주 전래설화인 서천꽃밭의 이미지를 결합시키고 전통적인 춤장르를 해체한 한류춤의 창작을 시도했다는 데에서 두 번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 오페라발레단원으로 활동할 때 피나 바우쉬가 이 그리스 신화를 오페라발레로 만든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는데 너무 색다른 작품이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언젠가는 이를 한국적인 스타일로 다시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어요.” 김용걸의 말이다.
안무상의 이러한 특징들과 함께 음악감독 원일, 의상디자인 민천홍, 영상디자인 최종범 등 전통을 현대화하고 서양적인 것을 한국화 하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중진 예술가들을 스태프로 영입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것도 ‘비애모’의 또 다른 수확이라 할 수 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 감독으로 있는 원일은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의 아리아와 피아노 연주곡을 국악실내악 ‘바리 시나위’, 영화 ‘황진이’의 사운드 트랙과 교묘하게 배치하면서 장례식의 비장미, 애절한 두 사람의 듀엣, 슬프고도 아름다운 결말의 분위기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흑백과 붉은색만을 사용한 민천홍의 미니멀한 의상 역시 서양의 드레스와 한국의 치마를 간결하게 결합시켜 동서양의 융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세련미가 돋보였다.
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군무진의 춤은 고요하면서도 절도가 있고 군더더기 없이 깨끗했다. 김용걸과 김미애의 춤은 무르익은 테크닉에 더하여 살아있는 감정의 교류가 진하게 전달되어왔고 사랑이란 감정을 공유하면서 텍스트와 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버린 듯 했다. 그가 왜 김용걸인가, 그리고 그가 왜 김미애인가를 새롭게 발견한 관객들은 강동아트센터 한강대극장의 70분 공연시간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글_ 이근수(경희대 명예교수, 무용평론가)
(이 글은 <뷰즈> 2012년 겨울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