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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사이드, <헤테로토피아>



 20세기의 세계적인 안무가이자 해체의 미학으로 명성을 날린 윌리엄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 한국공연이 4월 10일~14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연되었다. <헤테로토피아>는 그의 2006년 작품으로, 그가 과거 봄 페스티벌에서 전체 공간을 흰 풍선으로 채우며 관객들의 움직임을 현장에서 무용화했던 이래 또 한 번의 당혹스러움과 기발함을 제공한 퍼포먼스였다. 제목인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다르다(헤테로·hetero)'라는 의미의 그리스 접두어가 붙은 것으로 이는 낯선, 다양한, 혼종된 공간을 의미한다. 미지의 이상향을 '유토피아', 반대의 암흑세계를 '디스토피아'라 한다면 '헤테로토피아'는 말 그대로 '다른 세계'이다. 양쪽 세계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이곳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난관에 봉착(逢着)할 때 그가 제시하는 답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그 자체로 즐기라는 현상학적 대답으로 화답했을 것이다. 작품은 스토리텔링이나 텍스트 분석과 같은 체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과 행위라는 실질적 표현이 구심점을 이뤘다.

 

 공간 전체가 무대가 되고 관객이 공연의 일부가 되는 그의 공연에서 객석 전체를 오픈해 대형 벽으로 두 공간을 분리하고 관객들은 옆쪽 작은 통로로 이동했다. 무용수들 역시 동일한 통로를 통해 양쪽을 오가며 대사와 춤을 공존시켰다. 한 공간에는 피아노만이 놓여있고 다른 공간에는 대형 테이블 수십 개를 모아 붙여 완전한 구조를 갖추지 않은 무대를 완성한 상태에서 열댓 명의 무용수들은 다양한 색상의 평범한 스타일 옷을 입고 통용되지 않는 혹은 기존에 없는 말들을 내뱉는다. 피아노가 놓여있는 공간에서의 움직임 어휘들은 스피커를 통해 반향(反響)되는 반대쪽 공간의 소리들과 조화를 이루며 접촉즉흥식의 몸짓과 바닥면에 밀착된 것들로 시각화된다. 더불어 피아노는 있으나 무용수에 의한 피아노 연주는 없고 염소소리와 비슷한 구음(口音)만이 존재했다. 반대쪽 공간에서는 테이블 아래쪽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도처에 무용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타나 테이블 위에서 난해한 움직임과 알파벳 글자를 배열하는 등의 행위들을 하는데 구조화된 알파벳 글자도 하나의 단어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무용수들의 움직임 역시 특별한 연결고리나 조형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버벌 커뮤니케이션(verbal communication)과 넌버벌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의 경계를 넘나들며 포사이드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언어는 공유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통용되지 못하는 세계, 장소에서는 낯선 읊조림 혹은 외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정확한 언어로 완성되지 못할 때는 더욱 곤혹스럽고 미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용수들이 말하고 있는 비정상적인 언어는 통용이 불가능하지만 무용수들이 형성해내는 움직임의 언어는 이 낯설음을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의 주제의식은 개념을 담고 있으면서도 개념무용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움직임이라는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경향에 비춰볼 때 이 둘을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본인의 해체주의적 성향을 움직임의 측면보다는 기존의 틀을 깨고 이를 해체하는 부분에 중심점을 놓았다. 이처럼 포사이드의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 학자의 그것, 즉, 대상을 새로운 인식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며, 일상과 습관의 냉혹한 유혹에 맞서는 것이다. 따라서 상투적 표현과 거기에 따르는 기계적 반응을 결정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대상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회복시킨다.

 


 또한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다른 공간들’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그의 작품이 단순히 움직임의 나열이나 공간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자신만의 냉철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이다.

 

 클래식 발레에의 향수를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전위적인 현대무용가 포사이스의 안무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고 당연히 호불호(好不好)가 갈린다. 현대무용수들처럼 무용수들의 몸이 뒤틀리며 변형되고 뛰고 넘어지고 울부짖는 형상에서 발레의 원형은 찾아볼 수 없고, 기이한 동작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색다른 체험은 우리를 미궁(迷宮)으로 밀어 넣었다. 컨템포러리 댄스로 명명할 수 있는 그의 작품에서 기존 그가 보여주었던, 즉, 발레의 틀은 갖추면서도 현대적 특성을 담은 발레와는 다른 형태로 또 다른 새로운 미학에 도전했다. 그러나 그의 <헤테로토피아>는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준 무대이기도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철학적 사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즐기기에 우리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련가!

 

 우리들의 춤이 꼭 철학적이어야 하는가? 인간 신체가 완성해내는 움직임 어휘만으로 아름다움과 미적가치가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 포사이드가 보여주는 춤의 세계는 움직임의 구조적 해체와 활용, 치밀한 분석, 무용수들의 장점을 살리는 안무, 감각적인 무대 사용 등 개념적 철학을 담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에 와 닿는 춤담론을 완성해냈다. 다만 아시아 최초로 세계적인 안무가와 그 공연을 본다는 측면은 긍정적으로 비춰지나 막대한 자본을 들여 수입해왔을 때는 ‘이름값’이라는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그 이름값을 제대로 했는지를 자문해보는 과정해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기도 했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Dominik Mentz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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