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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잠하려는 의식을 흔드는 춤: 하야로비 무용단 <객>


하야로비 무용단이 다시 기지개를 켰다. 1985년 부산 최초의 동문 단체로 출발해 2009년 학연을 뛰어넘는 혁신까지 이룬 하야로비는 부산 현대무용 그룹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 하야로비가 몇 년을 인고한 끝에 환경문제라는 묵직한 주제로 공연을 올렸다. 지난 12월 8일 부산 금정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객>(안무 정기정)은 ‘인간은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왔다’는 부제를 달았다. 우리가 늘 착각하는 바로 그 지점, 마치 주인인 양 눈앞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자연을 마구잡이로 훼손하고 지구를 망치는 그 태도가 문제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1장은 ‘탐(貪)’이다. 탐욕을 줄인 탐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끝없이 욕망을 배설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를 말하는 일종의 개요이자 요약 부분이다. 2장은 ‘허(許)’다. 인간은 지구에서 삶을 허락받았다는 전제를 말한다. 허락받은 존재, 인간은 지구와의 암묵적인 약속을 잊고 편의를 위해 과도하게 물건을 만든다. 그 과정에 허락해 준 자연에 상처를 입힌다. 서서히 주인과 손님, 주(主)와 객(客)이 전도되는 것이다. 3장 ‘파(破)’에서는 허락받은 것을 잊고 이기적인 탐욕에 빠진 인간의 행동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가 점차 드러난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잘못되어가는 상황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탐욕은 끝없이 이어지고, 결국 지구별의 환경이 무너지는 것이 인간 스스로 목을 죄는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 4장은 ‘종(終)’이다. 인간은 스스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고 있다. 이기적 탐욕은 다시 돌아와 인간을 친다. 그렇다면 이것이 끝(終)이란 말인가? 이것이 끝이면 이 드라마는 엄청난 비극이겠지만, <객>은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지구별에서 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 탐욕을 버리는 일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객>은 이전 하야로비 작품과 확연하게 달라진 지점이 있다. 특히 정기정이 안무한 작품 중에서 <객>은 획기적 전환이다. 첫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 정기정이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 준 안무 형식이 반복될 것이라 지레짐작했었다. 도입부부터 천천히 이야기와 에너지를 쌓아 올리다가 후반부에 가서야 터트리는 구성은 정기정이 즐겨 사용하는 안무법이다. 이 방식은 무용수들이 심리적, 육체적으로 준비할 시간을 갖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관객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 서사가 지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단점도 있었다. <객>은 도입부부터 달랐다. 시작은 밝고 경쾌했다. 인간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에너지 넘치는 춤과 연극적 동작으로 표현했다. 시노그라피 백철호의 터치로 만든 무대장치들은 저마다 상징을 두고 춤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인간의 이기적 탐욕을 표현한 1, 2장은 점증적인 변화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풀고 흩었다가 다시 전진하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이런 방식은 관객의 감정적 긴장을 조정하면서 극적 몰입도를 높이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 


무용수들이 입고 있던 옷을 서로 찢고 대립하는 부분부터 갈등은 서서히 고조되었다. 이 갈등은 얼핏 인간끼리 갈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환경과 인간, 주인과 손님의 갈등이다. 인간에게 지구별의 삶을 허락한 주인 관점에서 어이없어 보이는 이 갈등은 점점 객끼리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다. 이제 어떤 것도 벌거벗은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손바닥만 한 조각 위에서 뭉쳐보지만, 맞닿은 거친 살갗은 온기를 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처음부터 하찮은 취급을 받았던 플라스틱 물병이다. 플라스틱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온 세상을 뒤덮어 인류보다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물건이자 인간의 탐욕이 깃든 중요한 기호다. 이 기호는 이중적이다. 인간의 탐욕이 생명 유지의 필수 요소인 물과 관련한 점에서 그렇다. 탐욕과 생명 유지의 필수요소가 한 몸처럼 있는 상태로써의 플라스틱 물병은 이런 모순을 무력화하려는 메타포이다.



<객>은 하야로비 무용단이 여태껏 추구한 문제의식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면서 하야로비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었다. 다른 한편에서 진중한 주제를 경쾌한 중량감으로 풀어내는 변신은 하야로비가 정체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안무방식뿐만 아니라, 그것에 맞는 조명과 음악을 접목하고 통합적 이미지를 고민한 흔적이 그 증거이다. 특히 무용수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용수 부족이 갈수록 심해지는 부산에서는 더욱 그렇다. 먼저 박은지의 존재다. 박은지는 노련함으로 젊은 춤꾼들의 튀는 에너지를 적당히 중화하였다. 그렇게 해서 춤꾼 간의 에너지 불균형 없이 잘 다듬어져 보였다. 물론 이 부분에서 안무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안무자가 미처 손 쓸 수 없는 무대 위에서의 미묘한 균형은 조화의 필요성을 잘 아는 경험 많은 춤꾼이 해결할 수 있다. 일곱 명 춤꾼 모두 고르게 역할을 잘해주었는데, 특히 궁다빈은 주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만만치 않은 춤꾼들 사이에서 그렇게 눈에 띄기 쉽지 않은데, 궁다빈은 튀지 않으면서도 뚜렷하고 섬세한 동작과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낸 표정으로 맡은바 이상으로 역할을 해내었다. 한 공연에서 이런 춤꾼을 발견하는 일은 공연을 보는 큰 기쁨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출연자들이 거의 퇴장 없이 춤을 추었다는 부분이다. 이것 때문인지 집중력 높고 에너지 충만했던 무용수들이 막바지에 지친 기색을 보였다. 무용수의 등퇴장을 최소화하면 작품 흐름을 분절하지 않고 끌고 갈 수 있겠지만, 중요한 지점에서 오히려 긴장을 놓칠 수 있기도 하다. 리허설과 본 공연을 연이어 해야 하는 조건에서 무용수의 한계를 인지한 적절한 구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별 환경에 관한 문제의 심각성은 이 시대를 사는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알지만 해결 방법을 찾기 힘든 문제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지기 쉽다. <객>이 이런 무력감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거나 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질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기력하고 비겁한 태도를 툭하고 건드린다. 작품은 경쾌하고 진지하지만, 불편하다. 예술은 언제나 이런 불편을 자극한다. 니체가 큰 이성이라고 한 몸(신체)의 예술 무용은 우리의 태도가 이기적인 안위에 파고들 때 그것을 불편한 경계로 끌어 올린다. 아름답고 격렬하고 처절한 움직임으로 침잠하려는 의식을 뒤흔드는 춤. <객>은 그런 춤을 지향하고 있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