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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춤방’의 가치와 영향력: 춤방과 律방의 공존을 기대하며

2023년 12월 29일, (사)한국춤문화자료원 최해리 이사장이 표창장을 받았다. 유인촌 문화체육부장관이 주는 표창장을 국립국악원 김영운 원장을 통해서 받았다. 무용인류학자 최해리가 이 상을 받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일이관지’.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펼쳐진 ‘일이관지–조선춤방’은 근래 없었던 춤계의 매우 획기적 기획공연이다.

  

2023년 10월 17일 공연_ 최해리 사회

 

2023년 10월 17일부터 26일까지 6회에 걸쳐 풍류사랑방에서 펼쳐졌다. 해설은 무용인류학자 최해리가 맡았으며, 해설의 밑바탕에는 친근함과 정확함이 깔려있었다. 그의 자세한 설명을 통해 해방 이후 사설국악원과 고전무용연구소 등에서 명맥을 이어가며 활동한 명무들의 17개 춤방을 중심으로 한 34개 작품을 무대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성공 요인의 하나로 특히 각 춤방마다의 기본춤(기본무)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각 춤방마다 어떤 트레이닝(메소드)를 통해서 신체를 단련하고, 춤을 만들어 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정해진 문화유산, 고착된 중앙무대


“문화재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확장된 전통춤 계보 조망.” 조선춤방의 가치와 영향력은 이렇게 한 줄로 요약된다. 덧붙인다면 “서울 중심에서 벗어날 때, 한국춤의 지형도는 더욱 풍성해진다”는 점이다. 조선춤방은 그런 초석을 멋지게 깔았다.


앞으로 기대하는 건 두 가지다. 2024년에도 ‘조선춤방’시리즈가 계속되길 바란다. 앞으로 국립국악원과 최해리가 다시 의기투합해서, 이번에 다루지 못한 000춤방이라거나, 이번에 다른 춤방일지라도 다른 인물(춤사범)을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


조선춤방은 앞으로 점차 ‘조선律방’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전통사회의 예인들은 시가악무(詩歌樂舞)에 두루 능통했다. 이번 000춤방이라고 붙인 곳은 ‘000율방’이라고 해도 무방한 공간이었다. 명무가 명창이었고, 명창이 명무였던 시대가 있었다! 000춤방의 인물들은 모두 그런 시대를 살았고, 그런 시대의 주역이었다.

  

김천흥춤방_ 기본무

 

춤방이 곧 율방


하규일은 가곡(歌曲)의 대가이고, 김천흥은 해금의 명인이다. 정소산(정유색)은 하규일에게 가곡을 사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소산은 가곡을 비롯해서 당시 조선 성악의 전반에 능통한 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쾌지나칭칭나네’(경상도민요)를 유성기음반을 통해서 녹음해 널리 알렸다.


심화영은 춤에 전념한 경향이 있으나, 그의 집안은 모두 명창이요 명인이다. 심정순의 판소리, 심상건의 가야금산조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심화영의 춤에 대한 가치도 더욱 높아질 수 있다. 이말량에 관해서는 이번 조선춤방에서도 소개하였듯이, 이말량은 경주 중심의 풍류(風流)의 대가다. 어린이와 대중을 대상으로 춤을 널리 가르쳤으나, 실제 그는 그만의 독특한 풍류를 보유한 명인이다.


명무는 명창이다


장월중선, 김애정, 민천식, 양소운. 장르는 각각 달랐으나 생전 소리로 이름을 날린 분이다. 판소리를 사사한 장월중선은 이를 바탕으로 해서 국극에서 여러 노래를 작곡한 분이다. 국극배우로 활약하면서 춤의 일가를 이루었다. 여성국극 시대 이후에는, 특히 가야금병창의 공연을 많이 했다. 


김애정은 활동 당시 판소리로 인정받았다. 여성으로서 잘 부르기 어려운 <적벽가>를 통해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지역(마산)에서 활동하셨기에, 중앙무대나 방송 등에서 소개가 못 돼서 참 아쉬울 뿐이다. 민천식과 양소운은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민천식의 서도소리와 양소운의 배뱅이굿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춤방은 곧 율방이다.


박지홍, 명고(名鼓)에서 명창(名唱)으로


조선춤방 중 ‘박지홍춤방’에선 그를 충분히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박지홍춤방’이라는 타이틀이었으나, 나는 거기서 ‘박지홍율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박지홍은 생전에 판소리 명창과 명고로 더 큰 활동을 했기에 그렇다. 앞으로 박지홍이란 인물에 대해서 더욱 넓게 조망하면서, 앞으로 그의 예술을 더 넓게 봐야 한다.


박지홍(朴枝洪, 1889-1958)은 나주 출신으로, 대구에서 타계했다. 박지홍은 박기홍(朴基洪) 명창의 종제(사촌동생) 또는 친동생이라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활약한 오명창 중 한 분인 김창환(金昌煥)의 판소리 제자이자, 박기홍의 수행고수(隨行鼓手)로 알려졌다. 1920년대부터는 대구로 이주해서 권번(券番)에서 가무악을 가르쳤다. 달성권번의 학감을 거쳐서, 대구 대동권번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 판소리를 배운 후학으로는 박초향, 박동진이 있다. 참고로 박동진은 조학진을 사사했다.


박지홍의 마지막 무대는 언제였을까? 1958년에 거행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현, 한국민속예술축제)이다. 정부수립(1948년) 10주년을 기념해서 육군체육관(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당시 유료임에도, 매우 많은 관객이 운집한 행사였다.


여기서 경상북도에서 참가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최고령 참가자가 박지홍이며, 출연자 중엔 최희선도 있었다. 이 대회에서 공로상을 5인이 받게 되는데, 연장자로서 큰 역할을 한 박지홍이 한 사람이다. 박지홍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시작하면서 ‘신장춤’으로 판을 열었다.

  

박지홍춤방_ 장유경의 권명화류 소고춤

 

박지홍의 마지막 ‘신장춤’


현재까지도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당시 기사의 오류로 ‘박지홍’이 ‘박지용’으로 표기되었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서, 지금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행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자료집에서도 ‘박지용’으로 잘못 표기된 상태다.


박지홍의 돌아가신 연도도 버젓이 잘못 표기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의 기사에서도 그렇고, 대구에서 발행하는 자료에서도 그렇다. 박지홍은 1958년에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경상북도 대표로 참가해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공연할 때 첫 번째 나가서 신장춤을 춘 것이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다.


박지홍은 대구를 중심으로 큰 역할을 했는데, 그의 출생지는 나주다. 나주에서 박기홍과 박지홍과 그의 집안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졌는데, 앞으로 나주와 대구에서 동시에 이들의 연구가 더 깊어지길 바란다. 나주에선 반갑게도 ‘나주學’을 깊게 파는 인문학과 예술학에 뜻을 둔 분이 많이 계셔서 다행이다.


정소산이 정유색


정소산이 정유색이요, 정유색이 정소산이다. 국악을 연구하는 사람은 정유색으로 알고, 춤을 연구하는 사람은 정소산을 안다. 같은 인물이다. ‘대구의 춤맥’으로서 정소산이 중요하지만, 국악적인 입장에선 ‘하규일의 직계 제자’로서의 정유색이 중요하다.


정소산(1904-1978)은 대구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유색(柳色), 호는 소산(小山)이다. 다섯 살 당시 대구기생조합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산과 수원에서 예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7세에 상경해서, 하규일을 만남으로 해서 예술적 인생이 달라졌다. 정유색은 ‘조선미인보감’에도 등장한다. 대정권번과 조선권번 소속으로 활동을 했고, 하규일(1867-1937)뿐만 아니라, 한성준을 사사했다.


정소산은 고향 대구로 돌아와 42세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다. 46세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당시 그는 법무(法舞)라고 했다. 최해리에 의하면, 김천흥도 ‘궁중에서 추던 춤’인 정재(呈才)를 법무라고 했다고 한다.

  

정소산춤방_ 백년옥의 수건춤

 

정소산에서 백년옥으로


정소산은 대구 및 경북지역에서 크게 인정받았다. 1962년에 경북문화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정소산은 일찍이 궁중춤을 기본으로 한 법무를 가르쳐서, 그의 제자가 중앙대회의 큰 콩쿠르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우 안타가운 사실이 있다. 정소산을 중심으로 해서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법무)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정소산은 지정받을 자격과 능력이 충분했으나, 심사에서 탈락했다.


정가(正歌)와 법무(法舞)를 기본으로 해서일까? 정소산의 춤은 참 점잖다. 그런 품격이 백년옥에게 잘 이어진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정소산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흥춤(수건춤)’과 ‘달구벌검무’는 앞으로 백년옥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올곧게 전승되리라 기대하니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고 고맙다.


호남국악원: 김수악춤방과 김취란율방


‘일이관지–조선춤방’에서 김수악춤방은 춤사범 김경란을 중심으로 해서, 김미선·김부경·이상연·장인숙 4인을 통해서 매우 완성도 높은 춤을 선보였다. ‘서울교방’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드러내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제 김수악 또는 김수악의 춤에 관해선 조금 더 넓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수악은 언니이기도 한 김취란과도 함께 활동했다. 김수악의 예술활동은 진주가 중심이지만, 진주에서만 활동한 건 아니다. 언니 김취란과 동생 김수악은 함께 연주활동을 병행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국악계에서 활동한 유명한 팀으로 ‘지영희 일행’이 있고, 그 다음에 ‘한갑득 일행’이 있다. 거문고명인 한갑득은 김윤덕, 김취란, 김수악과 함께 활동했다. 그들은 한 때 ‘호남국악원’이란 이름으로 광주에서 공연활동과 연구소를 운영했다.


춤계에서 김수악에 대해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상대적으로 국악계에서 김취란은 현재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김취란은 사라질 예인이 아니다. 생전 김취란을 잘 알고 있던 황병기 등도 유명을 달리했지만, ‘김취란 김수악 자매’의 예술적 행보는 더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일이관지–조선춤방’은 이렇게 훌륭한 무대와 함께, 20세기 전통예술에서 비록 변방에 머물기도 했지만, 훌륭한 기예를 가지고 활동하면서, 출중한 제자를 길러낸 인물들에 대해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져다주었다. 국립국악원의 관계자들과 무용인류학자 최해리 先生께 진정 감사하고 감사하게 된다.


왜 ‘조선춤방’인가


‘조선춤방’의 ‘조선’을 단지 ‘조선시대’의 ‘조선’으로만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이 땅의 예술계에 존재할까?


우리에게 ‘조선’이란 무엇인가? 여기에서 ‘조선’이란 무엇인가? 오래도록 우리에게 ‘조선’이란 용어는 때론 금기어가 됐다. 모든 ‘조선’이란 용어를 한반도 북쪽과 연관 지으면서 그렇게 되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도 ‘조선정악원’이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가 ‘국악’이라고 총칭하는 것을 ‘조선악’이라고 했다. 1930년대는 당시의 예술 중에서도 ‘조선무용’이 세계에 진출한 가장 유력한 장르라고 했다.


‘조선춤방’의 ‘조선’은 ‘조선시대’의 조선이 아니다. 봉건국가의 조선은 더더욱 아니다. 일제에 의해서 ‘이씨 왕조’, ‘이왕가’로 축약되었으나, 우리의 면면한 문화적 전통을 이어간 ‘문화적 상징성’으로서 조선이 존재한다.


‘조선’은 요즘 새로운 쓰임새로 거듭나고 있다. ‘조선팝’ ‘조선의 아이돌’ ‘조선팝의 아이돌’이 요즘말 ‘조선’의 의미이자 뉘앙스다. 국악의 새로운 흐름을 이렇게 ‘조선’이란 용어와 연관시키고 있는 이 때에, ‘조선춤방’은 진짜 ‘조선’의 예술이 무엇인가에 접근했다.


조선왕조 오백년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의해서 와해(瓦解)된 후,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예술이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했는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도, 한반도의 남쪽 대한민국에서 면면히 이어진 예술, 그 가운데 춤의 맥락적인 실체를 찾아내고자 한 값진 기획이었다. 그 안에 한반도 북쪽의 디아스포라 춤맥도 헤아릴 수 있었다. 민천식춤방, 양소운춤방은 딱 그러하며, 함흥권번 출신의 장홍심춤방에서도 그런 맥락이 일정 존재한다고 짐작되었다.

  

김애정춤방_ 장순향의 살풀이춤

 

정체성에서 영속성으로


대한민국에서 지금 유통되는 ‘조선’이란 용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국립국악원이 그걸 어찌 되었는지 그런 흐름을 매우 잘 읽어낸 것이고, ‘일이관지’라는 큰 틀(제목)안에서 ‘조선춤방’이란 공연의 내용과 부합하는 제목을 결합시켰다.


이 땅의 춤에 관해서 공시적인 맥락과 통시적 맥락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서, 앞으로 우리 춤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되는 건, 의식이 있는 이 땅의 춤꾼이라면 모두 그럴 거다.


‘조선춤방’의 ‘조선’은 이 땅의 정체성(正體性) 또는 정체성(政體性)을 넘어서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주목해야 할 우리 전통예술의 영속성(永續性)과 지속성(持續性)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할 화두(話頭)를 던졌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