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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장난인가, 탐욕이 불러온 공포인가: 볼쇼이발레단 <스페이드의 여왕>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볼쇼이극장의 한 시즌은 가을에 시작해서 이듬해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에 끝난다. 매 시즌마다 신작이나 볼쇼이극장 초연작이 몇 개씩 무대에 오르는데, 248번째 시즌(2023-2024년)에 오른 발레 신작 중에는 푸쉬킨(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799-1837)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페이드의 여왕(Пиковая дама)>이 있었다. 러시아 출신의 현대발레 안무가 유리 포소호프(Юрий Посохов)가 안무를 하고 유리 크라사빈(Юрий Красавин)이 음악을, 발레리 페체이킨(Валерий Печейкин)이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다. 초연 공연은 12월 14일과 18-21일에 있었다.


유리 포소호프는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1982년부터 볼쇼이발레단에서 무용수로 10년간 활동했다. 이후 덴마크의 로열 데니쉬 발레단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무용수와 안무가로서 활동을 해 왔으며 현재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상주 안무가로 있다. 유수의 여러 발레단에 초청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기도 하는데 볼쇼이발레단과는 2015년부터 다시 인연을 맺고 꾸준히 창작을 해 오고 있다. 전막 발레 <우리 시대의 영웅(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2015), <누레예프(Нуреев)>(2018), <갈매기(Чайка)>(2021)에 이어 2023년 <스페이드의 여왕>을 무대에 올려 볼쇼이의 레퍼토리에 추가했다. 오늘날의 많은 창작 발레들이 추상적으로 흐르는 경향에 반해 포소호프는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 발레를 고수한다. 볼쇼이에서 하고 있는 일련의 작업은 그러한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주로 러시아 문학작품을 소재로 창작을 했는데, 레르몬토프(우리 시대의 영웅)와 체호프(갈매기)에 이어 이번에는 푸쉬킨에 도전한 것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이미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로 무대화 되어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1890년 마린스키 극장 초연). 오페라는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동생인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대본을 맡아 푸쉬킨의 원작을 보다 극적으로 각색하였다. 발레 작품으로는 롤랑 프티(Roland Petit)가 1978년 안무하고 2001년 개작한 버전이 유명하게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초기 버전에서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헤르만을 춤추었으며, 볼쇼이극장에서 발표했던 새로운 버전에서는 당시 인기 있는 발레 스타였던 니콜라이 치스카리제(헤르만)와 마리스 리에파의 딸인 일제 리에파(백작부인)가 춤을 춰 러시아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모던한 춤으로 서사를 감각적으로 풀어나갔던 프티의 작품에 비해 포소호프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친절했다. 고전적인 발레 움직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은 무대 장치와 소품 등 극장적 요소로 보완했다. 무용예술이 춤과 음악, 무대 세트와 조명, 의상 등이 결합하여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종합예술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포소호프의 작업들은 이를 충실히 수행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장면의 전개는 원작 소설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어 스토리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푸쉬킨의 원작이 꽤 무미건조하게 서술되어있는 것에 비해 등장인물에 감정과 입체감을 불어넣어주어 극적 변주를 꾀했다. 부분적으로 오페라의 각색을 가져와 헤르만 뿐 아니라 리자와 백작부인의 역할을 확장시켰다. 무대장치와 조명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극적 긴장감을 높였으며,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한 새로운 느낌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번 작품에서 크라사빈은 대부분의 음악을 <스페이드의 여왕> 오페라 아리아와 함께 또 다른 차이콥스키의 음악들을 편집하여 일종의 오마주로 차용하였다. 메조소프라노가 부르는 백작부인의 아리아들을 카운터테너가 노래하였는데 그 오묘한 분위기는 꽤 의미심장한 포인트였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과거 젊은 시절의 백작부인은 여성무용수가, 현재의 늙은 백작부인은 남성무용수가 춤추도록 연출했다. 이번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주인공 헤르만만큼이나 공을 들인 역은 백작부인이었다. 작품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젊은 날의 백작부인은 사교계에서 남자들을 몰고 다니며 빛이 날 정도로 화려하다.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요염한 레이디로서 무대를 가로지르며 춤을 춘다. 이후 세월이 흘러 노파가 된 백작부인은 자칫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듯 보였으나, 겉옷과 모든 장신구를 벗고 가발까지 벗고 나니 늙고 흉측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등장하는 마녀 카라보스처럼 기괴한 외양에 구부러진 자세와 움직임으로 그로테스크한 노파를 연출했다. 그는 죽은 후에 헤르만의 악몽에도, 헤르만의 카드 도박장에도, 마지막 헤르만이 미쳐버린 후의 정신병원에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유령처럼 등장하여 헤르만을 괴롭히는데 그 자체로 호러(horror)물의 분위기를 뿜었다. 이 ‘유령의 존재’는 중력을 거부하는 듯 거꾸로 매달려 헤르만을 응시하였으며, 도박장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영화 <링>의 사다코처럼 카드테이블 한가운데에서 기어 나와 헤르만을 끌고 들어갔다. 연출가가 공포 분위기를 의도한 것이라면 제대로 표현된 것일 테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과한 연출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오페라와 발레에서는 극에 서정성과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헤르만과 리자(백작부인의 양녀)의 러브라인을 확대하였다. 두 사람이 첫 만날 때의 설렘이나 사랑의 파 드 되를 가미하여 헤르만의 캐릭터에 입체감을 더했으며, 원작의 결말보다 훨씬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푸쉬킨이 의도했던 이야기의 주제는 인간 깊숙한 곳에 있는 탐욕이다. 푸쉬킨의 작품이 시대를 초월해서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가 인류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본능과 감정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도박’이라는 소재로 자신의 욕망에 운명을 맡겨버린 한 인간의 비극적 인생을 그렸다. 이 발레도 헤르만의 내면적 갈등과 싸움에 집중한 부분들이 많다. 헤르만은 많은 부분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일확천금의 탐욕에 빠져 허우적댈 때나 백작부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낄 때, 운명적인 카드게임의 유혹에 휩싸일 때, 결국 미쳐버려 후회와 본능 사이에서 방황할 때 갈등은 계속되었다. 그때마다 일곱 명의 헤르만의 분신이 등장했다. 자유분방한 춤을 추며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본능과 악마의 속삭임으로 놀이를 즐겼다. 아쉬운 점은, 분장이나 분위기가 영화 <배트맨>의 조커나 헤비메탈 밴드의 악마 분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상상력의 빈곤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무대장치와 조명은 훌륭했다. 공중에 약간 떠 있는 사각 프레임의 투명한 방이 등장하는데, 초반에는 생제르맹과 백작부인의 일탈과 도박장을 보여주는 장소였으나 이후 헤르만의 방이자 정신병동의 역할을 했다. 투명한 사각 방의 사방에서 악마의 분신들이 모여들거나 백작부인의 원혼이 스며들어올 때는 으스스한 공포감이 전달됐다. 검은 배경의 무대에 뎅그러니 떠 있는 네온 빛의 사각 프레임은 관객들로 하여금 헤르만의 꿈 혹은 환영에 함께 빠져들게 하였다. 백작부인의 방에 설치된 거울의 배경은 이중 투사의 장치였다. 뒤에서 조명을 비추면 백작부인의 젊은 시절을 투영하는 장치가 되었고 앞에서 조명을 비출 때는 추하게 늙어버린 현실을 반영하는 장치가 되었다. 백작부인을 협박하다가 죽게 만든 직후 헤르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더욱 패닉에 빠지고 결국 이 거울을 총으로 쏴 산산이 부서뜨리며 자아의 분열을 그대로 드러냈다. 매우 연극적인 이 장면은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었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er

 

서사 발레 작품에 임하는 포소호프의 자세는 ‘충실함’이라고 응축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을 덜어내기보다는 충분히 담아내고 춤만으로 승부할 수 없을 것 같은 부분은 다른 요소들로 보완하여 표현하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 음악과 세트, 조명, 의상과 같은 요소들 모두는 춤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들이 어떠한 시너지를 내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완성도와 미적 즐거움이 좌우된다. 충실한 설명 덕분인지 그 미적 즐거움은 곧바로 러시아 문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연결이 된다. 작품의 완성도와 미적 평가가 항상 훌륭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작품에 표현된 안무가의 해석을 직접 읽고 장면 장면을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몇 편 되지는 않지만 지금껏 포소호프의 작품을 본 후의 나의 경험이 그러했다. 어떤 안무가의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러시아 발레와 문학으로 이어지는 연쇄적 호기심은 포소호프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큰 이유이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