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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 <드래곤즈>: 네트워크로 전화(轉化)하는 춤


 

내가 사는 세상에 수많은 타인이 공존한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서로의 삶은 교환할 수 없어서 나는 독립적이지만 외롭다. 이 시대는 해소할 수 없는 고독은 깊어지고 공존은 가능성을 벗어나 실현해야 할 가치가 되었다. 지난 3월 4일, 5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공연한 <드래곤즈>(안무 안은미)는 역병의 시대에 깊어지는 고독을 다독이고 공존의 가능성을 용의 이미지를 빌어 풀어낸 판타지이다.

 

무대는 세 면을 은색 긴 주름 관 여러 개를 늘어뜨려 막아 놓았고, 정면은 망사막을 내렸다. 망사막에 투사한 3D 영상이 만들어 내는 탈 공간적 판타지는 반짝이는 은색의 중성적인 공간에서 펼쳐졌다. 조명이 열리면 안은미가 손에 주름 관을 연결한 모습으로 무대를 대각선으로 움직인다. 주름 관은 한국 춤의 장삼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팔에 주름 관을 연결한 이미지는 작품 끝까지 이어지고 무대 세 면의 주름 관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는다. 주름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메타포어(metaphor)인데, 용의 비늘을 상징하기도 하고, 내부이자 외부이며, 함축이면서 연장이고, 환원과 확산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계이다. 

 


 

무엇보다 <드래곤즈>의 수많은 주름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Monad)’이다. 모나드들이 “입구도 창문도” 없이 닫혀 있다고 하지만, 수도원의 독방 같이 고립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같은 세계를 포함하며, 그래서 서로 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영광과 환희를 단 하나의 개체만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은 헛되다. 또한 세계의 다양성은 이미 연대의 필연성을 함축한다. 그 필연성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론적이다(질 들뢰즈, 이찬웅 번역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문학과 지성사, 2021년 6쇄).

 


 

이 작품은 3D 홀로그램으로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일본, 말레이시아, 대만, 한국 무용가들과 무대 위 무용수들이 만나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형식으로 진행한다. 애초 계획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오디션으로 선발한 무용가들이 2020년 한국으로 와 함께 공연하는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코로나 확산으로 원래 기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고, 해외 무용가들은 안무자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동작을 익히고, 3D 영상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지금의 <드래곤즈>가 탄생했다. 이처럼 작품 창작 과정에 코로나로 인한 위기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었기에 <드래곤즈>는 창작에 참여한 예술가가 자신을 치유하는 동시에 역병에 고통 받는 수많은 타자를 위로할 수 있었다. 물에 젖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무용과 미디어 기술의 만남을 내세운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영상 이미지의 힘은 표현을 풍성하게 하고 싶은 안무가에게 매력적인 유혹이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춤이 영상에 포획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춤은 영상의 독단적인 특성을 알지 못했고, 영상은 춤을 또 하나의 피사체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드래곤즈>에서 춤과 영상은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한다. 50대 50은 균형이 아니라 멈춘 상태다. 살아있는 것의 균형은 늘 기우뚱해야 한다. 이쪽저쪽으로 수시로 바뀌는 균형점의 움직임이 바로 생명의 역동이다. <드래곤즈>에서 홀로그램과 현실은 밀고 당기면서 기우뚱한 균형을 이루어 작품이 환상과 현실을 역동적으로 오가게 한다. 수십 명의 요란한 군무보다 더 생동적인 장면이 순식간에 전환과 변화를 거듭하고, 관객이 장면의 의미를 새길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친다. 이미지는 쌓이고 또 쌓인다. 과잉이다. 이미지의 과잉, 색의 과잉, 움직임의 과잉. 이 과잉의 공간에서 무용수의 몸도 과잉 상태가 된다. 관객의 감정 또한 점차 과잉상태로 치달아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모든 과잉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폭발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반복을 거듭한다. 엄청난 과잉으로 인한 감정의 반복적 폭발은 무대와 객석을 탈진 상태로 만든다. 

 


 

<드래곤즈>의 과잉은 카오스모스(chaos+cosmos) 상태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다. 카오스모스는 혼돈의 정리가 아니라 혼돈 자체를 질서로 인식한다. 진짜 혼돈은 모든 관계가 멈춘 상태이다. 관계가 무력화 되고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야말로 끔찍한 혼돈이 아닌가. <드래곤즈>가 과잉으로 카오스모스 상태를 연출한 이유는 지금 우리 세계가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나마 관계가 끊이지 않았고, 무엇인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끊어지지 않은 관계는 공존의 가능성이 닫히지 않게 한다. 

 

끝으로 미술 평론가 임근준의 ‘여러 층의 안은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다섯 번째 것은 새로운 프로토콜이 되는 게임적 몸을 통해 연결고리 혹은 네트워크로 전화(轉化)하는 정신이다. 나는 안은미가 오묘하게 축성된 기이한 소실점을 공유하는 탈식민 주체들의 상호 불통을 연결고리 혹은 네트워크로 기능하는 자신을 통해 극복하는 하나의 문화 프로젝트로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마트 기술 환경에서 에너지원이자 반투명한 미디어로 전화하는 오늘의 인간에게 있어서 안은미는 클라우드 서비스가 되는 예술-인간으로서 새롭지 않게 새로운 존재 의의를 갖는다.”

(서동진 외, 『공간을 스코어링하다 – 안은미의 댄스 아카이브』, 현실문화연구, 2019)

 

<드래곤즈>는 이 구절에 딱 들어맞는 그런 작품이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재)부산문화재단, ⓒ옥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