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한국무용 무대의 새로운 숙제, ‘정구호 스타일’: 경기도무용단 <순수_더 클래식>

 

경기도무용단이 올 시즌 개막작으로 지난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순수_더 클래식>을 선보였다. 김상덕 예술감독이 총연출과 안무를 맡아 공연의 큰 그림을 그리고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윤성철이 공동안무로 움직임을 완성했다. 국립국악원의 <나비야 청산 가자>, <무원> 등에서 아름다운 의상으로 무대를 빛낸 디자이너 김지원이 의상을, 평창문화올림픽 주제공연의 아트디렉터를 역임한 바 있는 유잠스튜디오의 유재헌 대표가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다. 

 

 

<강강술래> 콘셉트 컷 ⓒBAKi   

 

 

공연에 참여한 예술스태프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인데, 경기필은 예인집단 아라한과의 협연을 통해 서양악기로 국악의 가락을 들려주는 한편 여덟 번째 순서인 살풀이에서는 비탈리의 ‘샤콘느’ 연주로 클래식 선율과 전통춤의 어울림을 감상하는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지난해 9월 임기를 시작한 김상덕 예술감독은 취임 일성으로 경기도만의 콘텐츠를 개발하되 경기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뿐 아니라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지난가을 초연된 <경합>이 권번으로 유명한 수원의 역사성 위에 정구호의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현대성을 입히는 것으로 그의 비전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순수_더 클래식> 공연은 동서양 예술의 어울림으로 그의 일성이 입에 발린 취임사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새삼 확인시켜주었다.

 

공연은 열 가지 전통춤을 주제에 따라 배치해 나름의 스토리구조 안에서 춤을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프롤로그에서 풍작과 풍요를 기원하는 여성 군무인 강강술래가 펼쳐지고 나면 1장 ‘순수한 땅’에서는 태평무, 한량무, 부채산조가 차례로 이어지며 태고의 장엄함을 그려낸다. 그리고 2장 ‘생명의 태동’에 이르면 타악이 동반된 진도북춤과 장구춤으로 신명을 일으키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고, 3장 ‘회한의 시간’에서는 신칼대신무, 살풀이, 지전춤의 세 가지 진혼무로 죽은 넋을 위로한다. (공교롭게도 2회차 공연이 올려진 4월 16일은 세월호 8주기이기도 했다.) 에필로그에서 학춤을 추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선비보다는 신선에 가까운데, 무용수들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듯이 신비롭고 충만한 움직임으로 대극장 무대를 가득 채우며 장관을 연출한다. 

  

 

<학춤> 콘셉트 컷 ⓒBAKi

 

 

그러나 애써 의미부여한 노력이 무색하게 장과 장의 연결은 썩 매끄럽지 않고(생명의 기쁨을 느끼게 하자마자 진혼의 슬픔에 빠트리는 2장과 3장 사이가 특히 그러하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공들여 준비한 무대인 살풀이와 샤콘느의 협연은 음악과 춤과 의상이 같은 시공간 안에서 제각각 존재하며 연출자가 의도한 색다른 조화의 묘를 보여주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비탈리의 샤콘느에 붙여진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별칭은 이 곡이 실린 하이페츠의 바흐 콘체르토 음반이 한국에 발매되었을 때 <객석> 기자였던 음악칼럼니스트 조희창이 한국판 음반 매뉴얼에 쓴 글에서 유래된 것으로, 비탈리 샤콘느의 애절한 슬픔과 살풀이의 본질인 한에 담겨 있는 슬픔은 정서적으로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공연에서는 <묵향>에서 여성 무용수들이 입었던 둥글게 부풀린 치마나 남성 무용수들의 흰색 도포, 대규모 군무로 마무리되는 종무의 형식, 또한 <묵향>을 비롯해 <예술의 진화> 등에서도 보여준 영상디자인, <향연>의 무대디자인에 사용된 대형 매듭 형상 등 ‘정구호 스타일’의 무대미학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정구호 스타일은 아니지만 강강술래나 살풀이에서 무대를 장식하는 커다란 원형 조명은 김상덕 감독이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안무했던 <리진>에서 사용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김지원 디자이너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무원> 의상을 작업하기 전 유사한 전통춤 레퍼토리들로 구성된 <향연>과의 비교가 신경 쓰였다고 털어놓은 적 있는데, 동일한 상징을 공유하는 양식화된 전통춤 공연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창작자들에게는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며, 유사성에 대한 지적 역시 섣부른 언급일 수 있다. 이렇듯 제약이 많은 환경에서 정구호라는 스타일리스트의 등장은 낡고 고루하고 촌스럽다는 선입견이 씌워진 한국무용계의 오랜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는 일대 혁신이었고 한국무용의 무대양식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보였다. 

 

경기도무용단의 올 하반기 일정에는 <경합> 재연이 예정되어 있고 국립무용단, 경기도무용단과 차례로 협업 무대를 보여준 정구호는 5월에는 서울시무용단과의 협업으로 <일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정구호는 <묵향>에서 달항아리처럼 둥글게 부푼 치마를 처음 선보였을 때 의상을 보고 무용수들이 놀라지 않았느냐고 묻자 무용수들의 춤이 ‘의상을 뚫고 나와야’ 한다고 답했는데, 경기도무용단의 <순수_더 클래식> 공연은 그의 대답이 이제 한국무용 무대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한국무용가들은 정구호 스타일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무대에 눌리지 않고, ‘무대를 뚫고 나오는’ 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오랜 콤플렉스를 벗어 던진 한국무용 무대에 새로운 숙제가 주어졌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경기도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