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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로 그려낸 비극의 드라마 - 유니버설 발레단, <오네긴>



 이 가을 누가 사랑의 감정을 비켜가랴! 엇갈린 사랑의 떨림과 회한을 아름다운 신체와 표현적 움직임으로 조화롭게 완성시킨 20세기 최고의 드라마 발레 <오네긴>이 LG아트센터에서 11월 12일~19일 공연되었다.

 

 낭만주의나 고전주의 발레와 달리 디베르티스망 없이 노베르의 발레 닥시옹(ballet d'action-행동적 또는 극적인 발레) 개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드라마 발레(drama ballet) <오네긴>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소설 <에브게니 오네긴> 원작에 러시아의 천재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적인 음악이 더해진 감성적인 작품이다. 음악적 부분에서 발레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사계' 또는 '프란체스카 다리미니', '피아노를 위한 6개의 소품' 등에서 28개 음악을 편곡해 발레음악으로 사용했고 그렇게 완성된 3막 6장의 발레는 1965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의해 초연됐다고 한다.

 

 스토리텔링에 충실하며 인위성을 거부하고 자연주의적 경향을 실은 본 공연은 세계적인 안무가 존 크랑코(John Cranko)의 안무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존 크랑코는 독일 슈트르가르트 발레단의 안무가로서 20세기 드라마 발레의 독보적인 존재이며, 슈트르가르트 발레단은 발레리나 강수진이 속해있는 세계 유수의 발레단으로 존 크랑코 발레단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명성에 걸맞는 프라이드롤 지닌 크랑코는 세계적 반열에 오른 발레단에게만 <오네긴> 공연을 허락했기 때문에 유니버설 발레단이 1992년부터 존 크랑코 재단 측과 접촉했으나 17년만인 2009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공연권을 획득해 공연했고, 2년 후인 올해 두 번째 무대를 선보이게 되었다는 후문(後聞)이 있다.

 

 이번 공연은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소속의 두 수석무용수 강효정과 에반 맥키(McKie)가 각각 타티아나(황혜민·강미선·강예나 공동캐스팅)와 오네긴(엄재용·이현준 공동캐스팅) 역으로 출연했다. 강효정은 올 봄 슈투트가르트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 줄리엣 역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곧바로 수석무용수로 승급된 화제의 발레리나이다.

 

 필자는 13일 강효정과 에반 맥키의 공연을 관람했는데, 우선 이 두 인물이 작품의 인물탐구에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고 뛰어난 테크닉과 더불어 환상적 호흡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서로의 춤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특히 강효정은 국내에서 전막발레를 처음 섰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유연성을 바탕으로 고난이도의 파드되를 실수 없이 해내는 대담성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사랑의 깊이를 비교적 훌륭히 표현해내는 연기력을 지녔다. 오네긴 역의 에반 맥키도 차갑고 콧대 높은 연기와 세련되고 깔끔한 움직임을 통해 전반적으로 좋은 무용수임을 보여주었고, 초반부 제 실력을 완전히 보여주지 못했던 그는 3막 파드되에서 고난도의 리프트와 사랑의 애달픈 감정을 훌륭하게 처리해 실력을 입증했다.

 

 

 구체적으로 <오네긴>의 내용은 타티아나라는 여인의 일방적인 흠모와 이를 냉담하게 외면하는 오네긴의 비정함, 그러나 뒤늦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된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다시 사랑을 구하지만 이미 때가 늦은 애증과 비련의 사랑이야기다. 이들 외에도 타티아나의 여동생 올가와 올가의 약혼자인 젊은 시인 렌스키 등을 포함한 인물들이 드라마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심리적인 변화를 표현하는 장면들을 음미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였다.

 

 미니멀한 무대장치는 춤 이외의 부분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는데 일조했고, 오히려 은유적 이미지를 더하며 등장인물의 감정과 조화를 이뤘다. 1막에서는 남성들이 러시아의 코작춤과 유사한 춤을 추는 부분과 여성들의 플랙스를 주로 사용한 춤, 공동체 의식을 강조해 원형으로 도는 춤 등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샤막을 통해 회상과 감정의 경계 등을 이중 투영한 연출이 깔끔했다. 타니아나의 침실 장면에서는 코발트 블루톤의 조명에 거울 속에서 나온 상상의 오네긴과 타티아나의 듀엣이 사랑의 감정을 훌륭한 리프트와 속도감을 지닌 동작전개로 펼쳐냈다.

 

 2막에서는 생일 파티에서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장면에 맞게 전개되었고 특히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장면에선 달빛을 받은 몇 그루의 나무가 황량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렌스키와 오네긴의 마음을 대변했다. 3막에서는 견고한 3개의 기둥과 큰 샹들리에가 상류층의 안정된 기반과 타티아나 부부의 무너지지 않을 결속을 단적으로 나타낸 듯 했다. 특히 군무진들의 흥겨운 춤으로 시작되는 3막은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타티아나가 오네긴의 구애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과 남편인 그레민 공작과의 신의(信義)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과 이 둘의 파드되가 작품의 하이라이트였고 가장 가슴 아픈 사랑의 표현인 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과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신체언어로 구체화되었고, 강효정의 탄탄한 기본기와 드라마틱한 감정표현이 자신만의 타티아나를 만들어냈으며 이후 연륜이 더해진다면 더욱 성숙한 여인의 깊이가 전해질 것이다.

 

 빅터 발쿠와 앙니에타 발쿠의 연출과 토머스 미카의 무대디자인은 스펙터클한 화려함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 대신 자연스러움을 앞세워 절제된 가운데 그 역할을 다 했으며 존 크랑코의 안무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세련된 것이었다. 무용수들의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몰입도가 조금 아쉬웠지만 고른 역량을 지녔기에 전개가 순조로웠고 비탄에 빠져 오열하는 타티아나의 비극적 결말은 모두에게 드라마틱한 감정이입의 순간을 경험하게 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이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아시아에서 <오네긴>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발레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이며 앞으로 우리의 발레가 다양한 무대에서 그 역량을 과시할 미래가 멀지 않음을 예견케 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유니버설발레단·슈투트가르트발레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