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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무브-1960년대 이후 미술과 무용》



 2010년 영국 사우스 뱅크센터(South Bank Centre)의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에서 처음 선보인 《무브(MOVE)》전은 본래 《너를 안무하라(Choreographing You)》라는 신나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전시실이 관람자를 위한 놀이공간이자 체험공간이 되어 개방된다. 그 안에 놓인 설치물을 직접 만지고, 부비고, 매달리고, 착용하는 가운데 ‘나만의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고 느낀다. 관람자가 전시공간의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움직임의 창조자가 되어 미술과 움직임의 관계를 성찰하게 한다. 《너를 안무하라》는 전시명은 이러한 전시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근대의 산물, 미술관은 우리에게 여전히 계몽과 학습의 공간이다. 전시실 앞에 서면 색다른 기대와 흥분 바로 뒤로 학습 전의 긴장감이 따라온다. 전통적 미술관은 하얀 큐브형 방들이 이어진 전시실로 구성된다. 관람자는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정숙한 태도로 작품을 보면서 복도를 통과하듯 작품 옆을 지나간다. 미술관의 권위는 간혹 엉성한 그 무엇도 예술작품으로 보이게도 한다. 《무브》전이 진행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원형전시실에 듬성듬성 놓인 설치물과 소품을 둘러보면서도 그런 전통적 미술관을 대하는 관성을 의식하게 된다. 날것처럼 보이는 거친 품새와 일상의 낯익은 소품이 기존 전시와 다름을 웅변하고 있는데도 ‘왜?’, ‘뭐냐?’고 따지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난해함과 이를 따라잡지 못한 소양을 떠올리며 대면한 난독상황에 당황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꺼운 미술전문서적의 목차에서 한줄 떼어온 듯한 〈1960년대 이후 미술과 무용〉이란 전시명 아래에서야!

 


 전시실의 설치물 주변 벽면에는 작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작품을 소개한 설명이 붙어있다. 또 관람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와 작품을 상세히 설명해주는 해설자도 있다. 그의 존재는 그저 그렇던 설치물에 예술작품으로서의 의미와 맥락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반면 절대 의도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관람자를 학습자로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합판과 형광전등으로 이어 만든 좁은 통로(부르스 나우먼의 <녹색 빛의 복도>), 영락없는 빨래대로 보이는 밧줄에 엮인 옷가지(트리샤 브라운의 <숲의 마루>), 영상화면이 있는 훌라후프가 널브러진 방(크리스티안 얀 코프스키의 <지붕 위의 일상>), 천정에서 늘어진 두꺼운 밧줄(시몬 포티의 <행거스>), 강렬한 색상을 입힌 엉성해 보이는 문(파브르 브로스타인의 <한국적 색채의 격조 높은 개선문>), 체조고리가 무성하게 늘어진 공간(윌리엄 포사이드의 <사건의 진실>) 등 미술관의 전시실에 어울리지 않는 조잡한 물건더미들이 예술작품으로서의 아우라를 획득하는 데는 그의 설명이 유용했다. 그래서 눈으로 보지만 말고 몸으로 체험해보라는 그의 조언은 준수해야할 관람수칙의 본질처럼 믿음이 갔다.

 

 해설자가 권유한 관람수칙 ‘몸으로 체험하기’라는 가이드라인을 따르려 노력했다. 그러고도 여전히 미술관의 권위를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윌리엄 포사이드의 체조고리에 매달려도 보고, 트리샤 브라운의 빨래줄 위에서 벌이는 두 공연자의 움직임을 보며 빨래줄도 만져보고, 리지아 클라크가 고안한 출산과정의 움직임 특성을 경험하게 하는 구조물 <집이 곧 신체다>를 살펴보기도 하고, 한국의 문을 형상화한 구조물도 가까이 다가가 공연자를 보면서도 전시실이란 공간과 그 안에 설치된 전시물, 전시되는 움직임, 전시를 보는 관람자 사이의 경계를 쉬이 무너뜨리지는 못한 것 같다.

 

 이 전시는 ‘미술관으로 무용이 들어왔다’는 워딩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는 흔히 봐온 갤러리에서 추어지는 춤 공연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전시실에 놓인 엉성한 설치물을 전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전문공연자의 움직임을 전시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전시하고자 한 것은 관람자의 움직임 체험이다. 관람자 각자가 다르게 체험하고,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성찰할 움직임과 예술과 삶을 전시하고자 했다. 그래서 ‘몸으로 체험하기’는 필수적인 관람수칙인 동시에 불필요한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1960년대 작가가 의도한 대로 2012년 한국을 사는 우리가 그 움직임을 체험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래 시도된 미술과 무용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20여점의 작품을 2012년 오늘의 미술관이 전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술과 무용이 만나온 50년의 궤적을 한 전시가 아우르려고 한 이유는 박물관의 유물처럼 과거 예술행적을 전시하고자 함이 아닐 것이다.

 

 많은 학습량을 소화하듯 전시물 둘러보기를 끝낼 무렵 자비에 르 루아와 마르텐 스팽크베르그의 <생산>과 만났다. 전시 안내서의 배치도에 소개된 위치와 전혀 다른 곳에서 세 명의 무용가를 만났다. 해설자와 전시물을 둘러볼 때 원형전시실 한쪽에 둘러앉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해설자도 ‘공연을 기다리며 몸을 푸는 중인 공연자’라며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은 작가의 이름도 걸리지 않은 원형전시실 한쪽에서 연습복 차림으로 아이폰으로 불러온 영상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몸을 풀고 있음’이 분명한 그들에게 공연은 언제 하냐고 지나가다 물었다. 움직임을 멈춘 그들이 ‘지금 하는 중’이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 과천 현대미술관까지 어떻게 왔냐’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 같다. 전시실 가운데 서서 전시의 관람소감도 묻고, 평소의 문화예술취향도 물어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춤과 예술에 대한 의견도 피력하는 등 꽤 긴 이야기를 나눴다. 좌우의 설치물에선 공연자들이 나와 공연을 하다가 어느새 들어갔고, 또 나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관람자가 공연자의 공연을 방해하는 상황인 듯하여 ‘공연 계속 하시라’ 말하고 자리를 뜨고자 했다. 그들은 “우린 공연 중”이라 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무브》전의 한 작품이고 작품은 그렇게 “생산”되고 있었다.

 

 그 순간 전시실 안의 생뚱맞기만 하던 설치물과 퍼포먼스가 갑자기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글_ Inter_D

'경계에서 춤을 관찰하는 일꾼'

관심영역은 문화혼종, 기술융합, 다원예술, 비보잉, 예술아카이브

사진_국립현대미술관·영국 사우스뱅크 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