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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2012 페스티벌 봄, 전복을 꿈꾸는 경계 위의 예술, 진짜와 가짜 사이



 페스티벌 봄은 현대무용, 연극, 미술, 음악, 퍼포먼스 등 현대예술 전 장르간의 상호교류를 근간으로 하는 실험적 창작예술제로서 매년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국제다원예술축제이다. - 2012년 페스티벌 봄 팸플릿 첫 장에서

 

 2012년 페스티벌 봄의 팸플릿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개척하는 자의 한걸음은 뒤를 따르는 이들이 상상하는 이상일 수 있다. 주류를 거슬러 가는 길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예측의 어려움, 기대의 허망함, 선택에 대한 의심과 불안 등은 페스티벌 봄의 참여자들이 견뎌온 시간의 질감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추구하는 ‘실험적 창작예술’과 ‘새로운 시도와 형식’이란 앞서가며 새 길을 내는 작업일 터이기 때문이다. 주류예술에 도전장을 내밀고 전복을 실천하며 보란 듯이 유쾌해할, 다원예술가의 앞선 한걸음이 보고 싶었다.

 

 2012년 페스티벌 봄의 패키지티켓을 구매하고, 공연을 선택했다. 국제페스티벌의 위상 속에 해외 우수한 다원예술 작품이 다수 소개되었지만 이들 작품을 누리지는 못했다. 전체 22작품 중 6작품만을 선택했다. 이조차도 개인적인 일정과 남아있는 티켓 상황으로 제한적이었음을 밝혀야겠다. 따라서 이 글은 페스티벌 봄에 대한 총평이 될 수 없으며 ‘2012년 내가 본 페스티벌 봄’에 한정된 소감이다. 〈라면앙상블〉〈내 신앙을 고백 합니다〉〈이태리 정원〉〈구리거울을 통해, 어렴풋이〉등 한국작가의 작품을 다수 선택한 탓에 한국의 다원예술, 곧 ‘지금, 여기 우리 다원예술’의 단면을 보게 되었다.

 

 축제기간 동안 각각의 작품이 어떤 장르인지, 어떤 실험적 복합적 성격을 구사할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로 극장을 찾았다. 낯선 형식에 대한 기대는 긴장과 설렘으로 공연을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무대 위에 공연이 드러나고 예술형식이 파악되기 시작하면 다른 기대가 충족되길 기다린다. 관객은 그저 색다른 조합의 나열을 보고자하는, 그 호기심을 채우려 객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을 찾아 향유하고자 하는 본래의 이유는 형식이 어떠했건, 장르가 무엇이건 감동, 경외, 소통, 위안, 충격, 정화 등 정서적인 무언가의 스침이나 꿈틀거림의 순간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고 아쉽게도 올해 페스티벌 봄의 내가 선택한 작품들은 그것을 채워주지 않았다. 새로운, 다른 예술을 시도한 것은 알겠는데 동(動)하지도 통(通)하지도 않았다. 왜인가? 과연 새롭기는 했는가의 의구심마저 들었다. 왜인가?

 

 다원예술이란 용어를 처음 접한 것은 2007년이다. 페스티벌 봄이 그해 처음으로 국제페스티벌을 개최했던 직후라 용어검색은 거의 자동으로 페스티벌 봄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페스티벌 봄은 ‘학제적 예술(interdisciplinary arts)’을 다원예술의 영어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다원예술은 “탈장르예술, 복합장르예술, 새로운 장르의 예술, 비주류예술, 문화다원주의적 예술, 독립예술 등(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2007)”을 중심으로 이들 경향에 속한 예술창작과 예술가를 지원하는 정책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영미를 비롯한 해외에서도 이 개념은 현장의 예술현상을 반영하는 용어로 표준화되고 고정되기 보다는 불안정한 채로 유통되며 진화 중인 개념이었다. 해외 대학 교육과정의 소개에 따르면 다양한 분야, 타장르 예술가에게 협업 기회를 부여하고, 협업작업에서 도출되는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과정의 예술’로 잠정 정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원예술은 현장 예술가들이 하나의 창작을 위해 공동작업 방식을 모색하고, 기존 예술의 고정된 형식미학을 뒤집으며 표현형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창작실천이다. 예술가가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실천한 창작의 결과이고, 기존 예술형식의 해체와 새로운 조합으로 드러나는 예술이다. 이 과정에 사회정치적 담론이나 과학기술과 결합하고, 예술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에 없던 낯선 예술을 탄생시킨다. 어떤 조잡한 조합도, 어떤 어설픈 행위도 이 과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다원예술의 방점은 ‘섞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에 있다. 내가 본 2012 페스티벌 봄의 ‘섞음’과 ‘역할 바꾸기’가 어디에서 왔는지 왜 그러한지 한번쯤 진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참여 예술가들은 자신의 출품작을 페스티벌 봄으로 인도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면 좋겠다. ‘섞음’ 자체가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어느새 ‘섞음’에 이르렀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그 답이 후자에 속한다면 아직도 통하지 못한 관객은 좀 더 기다려야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답이 전자에 속한다면 다원예술이 이미 예술형식의 틀을 고정하고 예술가의 창작실천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이 필요해진다. 페스티벌 봄이 소개한 일부 작품의 조야함과 어설픔을 새로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관객의 승인을 강요한다는 의심을 풀려면 말이다.

 

 '섞음’이 이미 다원예술의 창작 매너리즘이 된 것이 아닌가라는 진단은 어디서 오는가. 설익은 개념을 덧대기 하고, 개념에 맞춘 어설픈 퍼포먼스를 다시 덧댄 공연이, 그래서 개념과 주장으로 포장되었으나 전달되지 않는 작품을 대하면 ‘섞음’의 강박증을 떠올리게 된다. 과학도 예술도 ‘지원금앓이’를 하는 현실을 지적한 〈라면앙상블〉은 그 강박의 원인을 호기롭게 지적한다. 객관적이어야 할 과학도 정책방향과 지원에 따라 주류와 비주류가 갈리고, 객관적이라 여긴 진리도 흔들린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는 예술도, 과학처럼 자율성을 위협받는다는 현실고백이자 매너리즘에 빠진 예술에 대한 변명이다.

 

 전복을 꿈꾸는 다원예술의 진짜와 가짜 사이는 창작자의 진정성에서 갈린다고 본다. 예술과 후원자 관계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지만 후원자에 휘둘리지 않는 자율성 속에 예술이 빛나게 존재해왔다. 오늘날 공연예술의 후원자는 지원금 제도와 관객이다. 대중성이 약한 실험적이고 복합적인 예술인 다원예술의 경우 지원금 제도의 비중은 더 크다. 지원금 제도는 예술생태의 종 다양성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선의의 이 제도가 예술을 왜곡하기도 한다. 지원금을 획득하고 소모하기 위해, 지원금 성격에 맞춘 예술을 구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2년 내가 본 페스티벌 봄을 떠올리는 지금, 그 억지스런 공간에 다시 처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전복을 꿈꾸는 예술이 실은 지원금제도라는 시류에 편승하며, 실험적 예술의 유형을 틀짓기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페스티벌 봄이 그렇게 보인다면 관객을 청한 예술가는 이에 답해야 한다. 어정쩡한 자세로 객석을 채웠던 한 관객의 불감증에 예술가는 답해야 한다. 이게 관객 잘못인가?

 

 마지막으로 공연예술에서 공연자가 서툴고 어설프다면, 그 어설픔이 설정이 아닌 이상 그는 연습이 더 필요한 사람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공연자이고자 한다면 넘나드는 장르에 능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터이다. 강의식 연기를 하는 과학자라면 그 퍼포먼스에 능한 것이 좋겠고, 대사와 마임을 공연하는 무용인이라면 발성과 움직임에 능해져야 한다. 공연에 출연한 비평가라면 무대 위 공연자의 매너에 능해야 한다. 아카이브를 활용한 창작공연의 목적이 예술자료 속 예술가의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라면 그 포즈와 이미지는 안정적이어야 한다. ‘능함’ 또한 기성예술의 질서이기에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어설픔을 가장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능함’에 이르지 못했다면 작가의 판단에 따라 폐기되기도 하고, 더 많은 훈련을 투자하는 것이 맞다. 왜냐면 ‘능함’은 관객을 청한 예술가의 태도이자 성의이기 때문이다.

 

 

글_ Inter_D

'경계에서 춤을 관찰하는 일꾼'

관심영역은 문화혼종, 기술융합, 다원예술, 비보잉, 예술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