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시인과 그 아내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댄스시어터 샤하르 <소월의 꿈>

댄스시어터 샤하르를 이끄는 지우영은 국내 무용계에서 플롯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안무가다. 서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많지만 플롯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 대다수인 국내 무용무대에서 지우영이 풀어내는 이야기가 빛을 발하는 이유다. 그가 이번에는 시인 김소월의 생애를 다룬 신작 <소월의 꿈>으로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지우영이 김소월 탄생 120주년을 기념해 만든 <소월의 꿈>은 지난 6월 도봉구민회관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이달 19일 노원문화예술회관으로 무대를 옮겨 재공연되었다. 총 8개의 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일본인에게 폭력을 당해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어린 소월의 꿈으로 시작해 숙모 계희영에 의해 민요와 전래동화의 세계로 인도되는 소년기, 아내 홍단실을 만나 결혼하고 시작(詩作)에 몰두하는 청년기, 동아일보지국 경영에 실패하고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에 이르는 이른 말년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간다. 

 

시인의 죽음과 예술

 

김소월의 사인(死因)은 음독 혹은 아편 복용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보도한 1934년 12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사인을 뇌일혈이라고 적었고, 증손녀인 성악가 김상은은 생전에 심한 관절염을 앓고 있던 그가 통증을 잊기 위해 아편을 복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2017년 문예계간지 <연인> 여름호에서는 김소월의 셋째 아들 김정호의 회고문 ‘아버지 소월과 나의 표랑기’를 재발굴해 수록했는데, 김소월이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이 글을 분석한 유한근 문학평론가는 그의 죽음이 생활고와 병마로 인한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일제강점의 역사적 폭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지우영 역시 신문사를 무단수색하고 시작(詩作)노트를 압수하는 등 일본군의 폭력을 묘사함으로써 자살로 알려진 김소월의 죽음을 반박한다. 김소월이 일본군으로부터 당하는 폭력은 프롤로그에서 그의 아버지가 당한 폭력과 겹쳐지며 그가 목격한 폭력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작품의 중요한 복선으로 기능한다. 작품마다 프롤로그에 작품의 핵심 장면을 배치해 메시지 전달에 힘을 싣는 ‘지우영식’ 플롯이 빛나는 장면이다.

 

 


또한 지우영은 후대의 예술가들이 김소월의 생애를 극화할 때 애용하는 소재인 첫사랑 오순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엄혹한 시대의 무게에 좌절한 예술가 남편과 그의 예술세계를 지켜낸 아내 홍단실을 작품의 중심에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제목의 ‘소월의 꿈’은 아름다운 시에 투영된 시인의 꿈이라는 원래의 의미와, 아내가 애정과 신뢰로 지켜낸 시인의 꿈이라는 또 하나의 의미를 더하게 된다. 무용수들이 김소월의 시어(詩語)를 아름다운 몸짓으로 표현하는 동안, 증조부의 시를 노래로 옮기는 김상은의 목소리가 그들의 무대를 떠받친다.

 

 

여성에게 깃발을 쥐어주다

 

지우영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키워드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성’과 ‘깃발(혹은 검)’이다.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에서는 주인공 클라라가 남편을 구하러 가기 위해 호두파이 여왕으로부터 검을 하사받으며, <레 미제라블>에서는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여성 시민군이 깃발을 휘두르며 혁명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소월의 꿈>에서도 무용수들은 몸짓으로 시어를 연기하며 ‘신체를 악기로 사용해 음악을 표현한다’처럼 무용무대의 전형적인 도구로 쓰이는 동시에 일제강점에 맞서 깃발을 흔드는 독립운동의 주체로 표상화된다. 이 같은 지우영의 캐릭터 조형은 특히 성별 고정관념에 젖어 여성과 남성 캐릭터에 주어지는 역할을 관성적으로 배분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할 인물을 납작한 평면체로 만들기 일쑤인 게으른 창작자들에게는 더 이상 게으름 피울 수 없는 훌륭한 참고문헌이 된다.

 

 


 

2018년 <한여름밤의 호두까기인형>의 클라라를 시작으로 <레 미제라블>의 코제트, <소월의 꿈> 홍단실 역을 차례로 맡으며 지우영의 페르소나가 되고 있는 스테파니 킴의 성숙한 연기는 작품의 완성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축이었다. 그는 신혼의 설렘으로 들떠 있는 풋풋한 모습에서부터 암울한 현실에서도 남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남편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기도 하는 강인한 모습까지 인물의 다양한 면모를 입체감 있게 연기했다. 뿐만 아니라 발레의 전형적인 공유동작(public domain)을 비껴간 창의적인 안무와 근대 한복을 화려하게 재해석한 아름다운 의상도 감상의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창작발레 한 편이 귀한 무용무대에서 지우영의 <소월의 꿈>은 안무와 연출, 연기와 춤과 음악, 영상디자인과 의상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모처럼 기껍게 즐길 수 있는 신작 무대를 보여주었다.  

 

 


 

 

 

글_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댄스시어터 샤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