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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반주, 바라지와 보비위가 아쉽다!: 평론가 초이스 2022 젊은국악 ‘단장’

서울남산국악당의 젊은국악 ‘단장’은 2022년 올해는 평론가 초이스 형식이었다. 장승헌(무용), 김희선(음악), 송현민(음악)과 함께,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네 명의 평론가가 전통예술계의 젊은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첫 번째 단계였다. 


그들과 함께 공연 콘셉트를 고민하면서, ‘전통’을 기반으로 한 ‘新전통’을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창작’에 접근하는 프로젝트였다. 네 명의 평론가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개되는 ‘단장’의 무대를 잘 만들어내기 위해서, 저마다 조력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된다. 


내가 맡은 부분은 연희였다. ‘뛰는 꾼, 밟는 꾼, 노는 꾼’이란 이름으로 세 명의 젊은이와 함께했다. 여기서의 세 명의 각기 다른 꾼이란, 이정동, 김성현, 정승하를 말한다. 이정동은 취발이춤과 벽사진경의식무, 김성현은 양반춤과 문둥북춤, 정승하는 지전춤과 바라춤으로 무대에 올랐다. 


김성현과 이정동, 무대춤으로서의 ‘절제’


이정동과 김성현은 민간의 탈춤, 정승하는 굿판의 의식무에 뿌리를 두고 역량을 발휘했다. 김성현과 이정동은 ‘무탈’이라는 그룹으로도 함께 활동한다. 두 사람을 가장 인정하는 이유는 ‘절제’를 안다는 점이다. 절제를 아니, 춤 속에서의 힘줌과 힘뺌,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재연(再演)의 춤꾼’, ‘민속놀이의 춤꾼’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추는 탈춤에서의 발산과 같은 분위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들어간다는 자세로 진지하게 탈춤을 추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정승하는 매우 매력적인 춤꾼이었다. 앞의 두 사람과 다르게 아직은 힘의 안배와 절제를 잘 몰랐다. 무대라는 공간에서 무언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밑에 너무 깔려있었다. 동작이 많거나 어수선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때론 동작의 완급(緩急) 조절이 아쉽고, 마치 순서의 연결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정승하는 절제를 몰랐다. 어쩌면 20대의 혈기왕성한 젊은 춤꾼에게 절제를 바라는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에 딱 맞는 춤을 추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말해두고 싶은 건, 정승하는 무대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을 바탕으로 해서 진정성으로 소통하는 춤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객석에는 충분히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정승하, 양성성의 ‘공존’


정승하의 매력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공존이다. 굿판에서의 양중(남성)이건 무녀(여성)이건, 궁극적으로 굿을 연행하는 순간에서는 일상적인 성을 초월하게 된다. 정승하는 본능적으로 또한 체질적으로 그런 춤꾼으로 보였다. 전통적으로 굿판이 연행될 때, 거기에는 가무악희(歌舞樂戲)가 존재한다. 노래와 연주, 연희(놀이)와 함께 춤이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그런 춤은 굿판이란 틀을 벗어나서, 하나의 무속춤으로서 존재를 심화하면서 영역을 확산시킬 수 있다. 앞으로 정승하는 이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선보인 두 개의 춤 이외에, 굿판에 존재하는 춤을 가져와서, 그것을 무대춤으로서 승화시켜주길 바란다. 


연주와 반주는 다르다 


젊은 국악 ‘단장’의 가면무(假面舞)와 의식무(儀式舞)를 바탕으로 한 세 명의 춤판을 보면서 매우 뿌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아쉽고 안타까웠다. 문제는 탈춤의 반주음악이다. 모두 라이브음악으로 반주를 했다. 그들에게 가장 문제는 무엇일까? 절제를 모른다는 점이다. ‘연주’와 ‘반주’를 구분할 줄 몰랐다. 무대의 중앙에 있는 춤꾼이 절제하지 못한다고 탓할 수는 없다. 반주는 그 속성상 언제나 무대의 중앙에 있는 퍼포머를 의식하면서, 감정의 절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클래식 무대에서 중앙에 서 있는 성악가의 노래를 반주하는 피아노반주자를 보았을 것이다. 성악가의 숨소리 하나를 의식하면서 피아노로 노래를 살려주는 모습은 때로는 매우 숭고하게까지 보인다. 장르는 다를지언정, 나는 이번 탈춤판의 반주자들에게 클래식의 반주자의 역할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이번 무대의 반주자들은 클래식과 전통예술은 다르다고 얘기할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춤의 반주자로 특별히 흠을 잡을 데가 없다는 생각할 것 같다. 반주로 참여한 그들은 세 명의 춤꾼이 모두 만족하면서 춤을 추었고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왜 평론가 초이스의 역할을 맡은 윤중강만이 만족하지 못하는가 하면서 의문과 함께 오히려 그들이 불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문제다. 춤의 반주자 스스로 자신들이 모자라거나 잘못된 부분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반주의 균형감, 21세기에도 존재하는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제 50년 가까이 춤판을 지켜봤다. 20세기의 춤판과 21세기 춤판의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 스스로도 많은 걸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21세기 전통예술에 기반한 춤판의 반주음악이 지난 세기보다 나아진 점도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아쉬운 것이 있다. 


김정기(타악), 김경민(타악), 최대령(타악), 강병하(대금, 태평소), 김현승(피리, 태평소), 윤겸( 아쟁). 이들에게 꼭 한마디 해야 한다. 이들은 명심해야 할 말이다. “당신들의 춤반주음악은 ‘음악’일 순 있어도, ‘반주’는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연주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주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다. 때론 그들은 지금 무대의 중앙을 바라보면서 ‘반주’를 한다기보다는, 스포츠 경기에서 객석에서 응원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응원하는 사람은 크게 소리쳐도 탓하는 사람이 없다. 마구 외치는 것이 응원의 본질적 속성이다. 


반주는 응원이 아니다. 반주는 무대에 있는 사람이 하고, 응원은 객석에 있는 사람이 한다. 반주자는 연행자의 동태(動態)를 잘 살펴야 한다. 지금 무대에 있는 춤꾼이 어떻게 움직이고, 다음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잘 알아야 하고, 그것에 맞게 ‘세심하게’ 소리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똑같은 템포, 똑같은 장단을 반복적으로 정확하게 했다고 해서 그게 좋은 반주는 아니다. 


보비위(補脾胃), 춤반주의 제1 덕목


‘바라지’와 ‘보비위’. 반주자로서의 중요한 덕목이다. ‘보살피며 도와주는 일’이 바라지다. 이 말은 ‘뒷바라지’라는 말로 더 익숙하다. ‘뒤’라는 말에서 익숙하듯이, ‘바라지’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는다. 때론 ‘바라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을 때, 실제 존재로서의 가치가 더욱 크다. ‘보비위’란 무엇인가? 비위(를) 맞추다. 이런 말이 있다. 이건 ‘아첨하다’와는 다른 뜻이다. 


비위(脾胃)는 ‘지라(비장)와 위’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비위에 맞다는 말은, 속에 좋은 음식을 뜻하는 말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확대되어서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성미. 또는 그러한 기분’으로 ‘비위’가 사용되었다. 인간사에서 ‘비위를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보비위’는 한자어로 ‘補脾胃’라고 쓴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거다. 긍정적 표현이다. 


반주자의 제1 덕목은 ‘보비위’에 있다. 사람이 건강하도록 뱃속에 좋은 음식을 공급해 주는 것처럼, 무대의 주인공이 건강하게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이 ‘보비위’다. 보(補)는 기울 보, 도울 보. 무대에 보다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결코 보란 듯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대 곁에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보비위’이다. 부족한 것을 보태면서, 채워주는 역할이 보비위이다. 상대의 기분과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 판단하고 행하는 건, 전혀 보비위가 아니다. 


앞의 반주자들에게 묻고 싶다. 이번 탈춤의 반주음악을 맡으면서 얼마만큼 ‘바라지’와 ‘보비위’의 자세로 임했는지 말이다. 


사운드 조절 누가 하는가? 사운드 엔지니어! 연주가 자신들! 


젊은 국악 ‘단장’은 좋은 기획, 좋은 무대, 좋은 춤임은 틀림없었으나, 좋은 음악과 좋은 음향이라고 말하는 것은 평론가적 양심으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지난 20세기의 국악 연주자와 반주자들은 경험을 통해서 이걸 잘 터득했다. 그러나 21세기 국악공연에 악기의 확성이 일반화되면서, 연주자들은 자기 소리의 절제와 다른 소리와의 화합 능력이 꽤 떨어졌다. 내가 악기별 사운드의 밸런스를 얘기했을 때, 그건 마치 음향(사운드 엔지니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연주자가 늘어간다. 


과장되게 말한다면, 이제 국악관현악의 사운드 콘트롤을 지휘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의 확성을 하는 공연에서 그게 마치 사운드 엔지니어의 역할처럼 되어 버린 셈이다. 특히 국악계의 타악연주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은 앙상블의 개념이 체화되지 않고, 소리의 절제를 잘 하지 못한다. 


연주자로 참여할 때가 조심스럽지 않더라도, 무용이나 연희를 반주를 하거나 현악기와 관악기와 함께 연주할 때는 밸런스(균형)를 매우 신경 써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주자가 허다하다. 자신은 크고 정확하게만 리듬을 공급해주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도 하다. 이런 타악주자들을 볼 때면, 왜 ‘부끄러움은 관객의 몫’이 되어야 하나 아쉬울 때가 있다.




크게 치고, 많이 치지 말아주길 


춤 반주에서도, 섬세함은 아름다운 덕목이다. 크게 치고, 많이 치는 게 좋은 것일까? 살갑지 못해도, 거칠진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제 탈춤이 실내공연으로 들어왔고, 집단 중심의 신명을 지향하는 탈춤이 아닌, 개인 역량 중심의 예술을 지향하는 탈춤으로 선회하는 시기이기에, 탈춤의 반주음악 또한 달라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 탈꾼과 반주자가 똑같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어쩌면 무대 중앙의 탈꾼부터 반성해야 할지 모른다. 크게 치고, 많이 치는 것에 편승해서, 춤을 추지 말아라! 춤은 ‘발산’이 아니다. 당신들에게는 그게 신명이 나고 흥겨운 상황일지 모르나, 다양한 예술을 경험하는 일반적 관객의 입장에선 때론 시끄럽고 무절제해서 감상하거나 즐기는 것이 곤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장단고저(長短高低)에서 강유농담(剛柔濃淡)으로 


반주에도 온도가 입고, 타악에도 습도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일반적 타악연주가 또는 반주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건 앞에 거명한 반주자들 뿐 아니라, 모든 타악이 중심이 된 반주자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지금의 타악주자를 단순화 시켜서 안타까움을 토로하고자 한다. 


당신의 타악, 혹은 당신의 반주에선 장단고저(長短高低)는 존재하지만, 강유농담(剛柔濃淡)이 실종했다! 크게 치고 신명나게 치면서 정확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반주를 하니, 당신들의 반주 음악에서는 ‘강하고 부드럽고 짙고 엷게’ 만들어내는 소리를 통해서, ‘소리의 입체감’을 느끼기가 참 어렵다. 20세기엔 있으나, 21세기엔 실종됐다. 바로 당신들에 의해서 실종되고 상실해 버린 거다. 


탈춤의 반주자들이 소리의 요철감(凹凸感)을 이해하고, 터득해주길 바란다. 요철(凹凸)이란 오목함과 볼록함을 말한다. 이런 소리의 요철감은 연주 자체에서도 그렇지만, 무대의 춤을 면밀하고 섬세하게 바라보게 된다면, 춤꾼과 소리꾼 사이에서도 상대적인 요철(凹凸)은 만들어질 수 있다. 무대의 춤꾼이 뭔가 강조하려 할 때, 반주는 반대로 사그라들 때,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매력과 감동이 객석에 전해질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뛰는 꾼, 밟는 꾼, 노는 꾼’에서는 이런 요철감에 바탕을 둔 미적 체험(美的體驗; aesthetic experience)을 하질 못했다. 


20세기의 탈춤과 21세기의 탈춤은 달라지고 있고, 달라져야 한다. 이에 걸맞게 탈춤의 음악도 달라져야 한다. ‘마당의 탈춤’이 아닌 ‘극장의 탈춤’이지 않은가! 마당에서 연주했던 편성과 세기를 그대로 극장에 적용한다는 건 매우 위험하다. 큰 소리가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자일수록, 스스로 소리의 자정(自淨)이 필요하다.



 

무용은 3D, 음악은 2D?


무용음악에도 명도와 채도가 있다! 반주에서도 밝은 소리와 어두운 소리가 존재해야 한다. 타악기일수록 선명한 소리와 여릿한 소리를 구별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지금의 반주음악은 너무 밝고, 너무 높고, 너무 강하다. 이런 소리는 쉽게 질려 버린다. 


음악적 스펙트럼이 중요하다. 명도와 채도는 소리에서도 기본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해서 소리에서도 온도와 습도까지 느껴지길 바란다. 따스한 소리와 차가운 소리, 촉촉한 소리와 메마른 소리가 자연스럽게 교체되면서, 춤과 음악이 모두 ‘입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젊은 소리 ‘단장’에서의 ‘뛰는 꾼, 밟는 꾼, 노는 꾼’에서의 탈춤과 의식춤은 입체적이었으나, 반주음악은 매우 평면적이었다. 춤이 3D인데, 음악은 2D였다고 한다면 섭섭하게 들을까? 평론가의 이 말을 젊은 연주가들이 정말 귀 기울이며 생각하고, 보다 더 훌륭한 춤음악을 만들기 위해 정진해 주길 바란다. 

      

앞으로 ‘탈춤’은 매우 성장할 것이다. 한국의 전통예술 장르 중에서 가장 무대예술로서 등한했던 것이 탈춤과 인형극이기에 그렇다. 탈춤의 성장은 곧 농촌기반 탈춤에서 도시기반 탈춤, 야외 탈춤에서 실내의 탈춤, ‘집단형 탈춤에서 개인형 탈춤’으로 전환 또는 양자의 공존을 뜻한다. 


‘골방의 탈춤’도 존재할 수 있다. ‘명상의 탈춤’도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좋은 출발을 이번 ‘단장’을 통해서 확인했다. 김상현의 ‘문둥북춤’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탈춤이 명상적 또는 사유적으로 바뀔 수 있다면, 탈춤의 반주도 당연 그래야 한다. 타악기를 통해서 명상과 사유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연주가가 앞으로 우리 시대를 이끌 타악연주가이다. 앞에서 거명한 젊은 연주가에게 그런 기대를 건다. ‘반성과 자기성찰’이 ‘성장과 자아실현’의 지름길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서울남산국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