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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발레의 저력이 함축된 경쾌한 중량감의 무대: 김옥련 발레단 가족발레 ‘2022 <거인의 정원>’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의 낮은 웅성거림만으로도 공연장의 공기는 들떠있었다. 20년 넘게 부산을 지키고 있는 김옥련 발레단(대표 김옥련)의 창작 가족 발레 <거인의 정원>(안무 김옥련, 연출·대본 유상흘, 9월 29일~10월 1일) 막이 오르기 전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은 부산에서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욕심쟁이 거인>(1888년)을 발레로 창작한 <거인의 정원>은 원작 동화의 주제에 맞게 가족 발레로 만들어졌다. 2014년 해운대문화회관에서 초연한 후 올해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공연했다. 부산에서 창작 가족 발레 작품을 이처럼 오랜 시간 공연한 전례가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원작에서는 거인이 늙어 예전 자신이 안아서 나무에 올려 주었던 소년을 다시 만난다. 소년은 거인을 자신의 정원으로 인도하고, 거인은 그렇게 천국으로 간다는 결말이다. 소년이 예수를 상징하는 설정으로 종교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거인의 정원>은 아이들에게 마음을 연 거인의 정원에 봄이 찾아오고, 거인과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것으로 끝을 맺는 식으로 내용을 단순화해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힘이 있고 가진 것도 많은 거인과 작고 약한 아이를 대비시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고, 사소해 보이는 친절이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작품은 어린이와 발레를 처음 보는 어른도 이야기 전개를 쉽게 알 수 있는 일곱 장면으로 구성했다. 거인(방도용)과 집사(서원오)를 노련한 연극배우가 맡아 이야기의 구체성을 높였고, 발레와 현대무용 춤꾼을 같이 캐스팅해서 결이 다른 춤이 어우러지는 장면을 연출하면서도 대립과 비교 장면에 이용하기도 했다. 곳곳에 배치한 디베르티스망은 관객에게 발레의 묘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연극적 연출과 현대무용 춤꾼이 출연했다고 해도 이 작품이 발레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 발레는 모든 연령이 즐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린이의 시각은 물론 부모의 관점까지 배려해야 하는 점에서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어린이가 흥미를 갖기 위해서는 주제와 소품, 캐릭터, 연기에 어린이의 시각을 반영해야 하며, 여기에 부모의 흥미와 만족까지 끌어내기 위해서는 장르 특성을 충실하게 살리고,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 <거인의 정원>은 8년 동안 공연하면서 가족 발레가 갖춰야 할 조건을 다져왔다. ‘가족’이라는 수식을 떼어내고 하나의 발레 작품으로 보아도 이번 공연의 완성도가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인의 정원>이 지닌 가치는 한둘이 아니다. 첫째, 가족 발레라면 서울이나 외국 발레단을 초청해서 연말에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 정도가 전부였던 부산에서 창작 가족 발레로써 갖는 가치이다. 둘째, <거인의 정원> 제작 과정에 부산 춤판의 역량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발레 무용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안무자는 부산의 역량 있는 춤꾼을 장르에 상관없이 섭외하고 출연시켰다. 언뜻 보면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발레 작품이 나올까 싶지만, 주요 배역을 기량이 출중한 발레 무용수에게 맡겨 발레 작품에 필요한 요소를 탄탄하게 만들어내었다. 발레 작품의 기본을 지키는 동시에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풍성함을 더했다. 셋째, 관객 개발의 모범을 보인 점이다. 김옥련 발레단의 어떤 공연도 객석이 비는 경우가 없다. 부산은 무용을 즐기는 관객층이 얇아 작품과 장르에 상관없이 관객 유치가 쉽지 않다. 


특히 사설 무용단은 어려움이 더 크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련 대표는 작품의 주 관객층을 직접 찾아다니며 관람을 권유했다. 하나의 공연을 위해 수십 곳을 방문하는 것은 예사이다. 그야말로 발로 뛰었다는 말이다. 관객은 어지간히 인지도가 높지 않으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김옥련 대표는 작품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하고, 왜 공연을 보아야 하는지를 설득했다. 오랜 시간 지켜 온 이런 방식으로 김옥련 발레단의 존재를 알리고, 고정 관객을 넓혀갔다. 넷째, 김옥련 발레단 그 자체의 가치이다. 김옥련 발레단은 2002년 <가자! 숲속으로>를 시작으로 13개 작품을 창작했다.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지역의 사설 발레단이 이런 성과를 낼 수 있겠나 싶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김옥련 발레단이 현재 부산 발레 흐름의 중심에 있으며, 부산을 대표하는 발레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보물에 이런 문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고, 진실한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답니다.”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은 이 문구는 김옥련 발레단이 견디며 추구한 목표처럼 보인다. 부산 발레에 관한 인식이 열악하고 관객층도 없다시피 한 지역 무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마음을 얻는 일의 어려움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를 지키면서 쉬지 않고 창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언젠가는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 무관심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서야 아이들의 마음을 얻어 비로서 봄을 맞이한 거인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모두 내어놓고서야 관객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예술가의 삶과 닮았다. 


 <거인의 정원>은 동화를 소재로 한 단순한 가족 발레에 그치지 않는다. 부산 발레의 현재를 보여주는 춤으로 부산 발레의 미래를 받쳐 줄 든든한 후원자로 성장할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킨, 가치 확장성이 매우 큰 작품이다. 만약에 ‘굳이, 왜, 어려운 현실에서 발레 작품을 창작했을까?’라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면, <거인의 정원>을 보고 또 보라고 권하고 싶다. 거인이 바랐던 봄이 그저 그런 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말이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 제공_ 김옥련 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