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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야류별곡>: ‘잔잔한 슬픔’과 ‘일렁이는 기쁨’

‘잔잔한 슬픔’을 느꼈다. <야류별곡>이 그랬다(6.3.-4.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여기에 ‘일렁이는 기쁨’이 공존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한과 흥과는 달랐다. 무대적으로는 정제(整齊)되어 있고, 정서적으로는 절제(節制)되어 있다. 탈춤의 미학에도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를 적용할 수 있다면, 정신혜 안무의 <야류별곡>이 딱 그렇다.  

 

탈춤이라면 늘 상투적으로 따라붙는 단어가 ‘흥과 신명’이요, ‘풍자와 해학’이다. 탈춤을 탈춤으로 존재하게 하는 중요한 정서로서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너무 집착한 건 아니었을까? 사위와 장단에 편승해서, 신명이라는 이름으로 한 판 흐드러지게 놀고 끝나길 원치 않았다. 탈춤도 생각하면서 보고 싶었다. 탈춤도 느끼면서 보고 싶었다. <야류별곡>은 ‘사유의 힘’을 발휘한 무대였다. 

 

 



 

무대화된 탈춤은 마당극의 탈춤과 달라야 한다. 모두 동의한다지만, 실제 그렇지 못한 무대가 허다하다. <야류별곡>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탈춤이란 장르가 무대라는 메커니즘 속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더 돋보인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기반이 되는 정서가 앞에서 얘기했듯 ‘잔잔한 슬픔’과 ‘일렁이는 기쁨’의 순차적 공존이다. 이를 더 파고들면, 안무자는 인간의 원초적 심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근원적 그리움’을 무대화시킬 줄 알았다. 

 

<야류별곡>은 동래야류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밤에서 아침으로 시간이동 한다. 하루의 일상을 마친 동래사람들이 ‘달’을 보면서 함께 신비로운 세계로 행한다(프롤로그). 거기서 다섯 개의 과장이 전개된다. 문둥과장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과장을 거쳐서, 동살맞이로 이어진다. 이렇게 밤의 시간을 보낸 그들은 다시 ‘해’를 맞으면서 일상의 세계로 복귀한다(에필로그). 

 

 



 

이번 작품을 호평하지 않는 사람을 못 봤다. 작품의 성공요인은 정신혜(안무, 연출)와 정민선(무대, 의상)의 상보(相補)와 상생(相生)으로 추측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무대 중앙 뒤편에 설치된 원형의 구조물이다. 프롤로그에선 ‘달’, 에필로그에선 ‘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전통예술의 깊이를 이해하는 미술감독에게서 나온 역량이다. 

 

지난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본 공연에서 버튼에 걸린 원형의 구조물과는 ‘존재적 의미’가 달랐다. 정구호의 그것이 비주얼적인 면에 충실한 ‘감성적 유혹’이지만, 정민선의 그것은 작품의 맥락 속에서 살아있는 ‘상징적 가치’였다. 발상의 차이요, 공력의 다름이다. 

 

<야류별곡>은 국립부산국악원 예악당이라는 무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오케스트라 피트의 효과적인 활용이 돋보인다. 피트를 내리고 올리면서, 무대의 역동성을 살려냈다. 일반적인 탈춤의 마당공연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무대공연만의 장점을 부각시킨다. 정신혜의 안무력이 돋보이는 순간이기도 했다.

 

 



 

특히 오케스트라 피트에서의 영노 역할을 한 다섯 무용수를 극찬해야 한다. 의상 자체가 꽤 무거웠을 거다. 이를 이겨내면서 살아있는 동작을 만들어냈다. 특히 오케스트라 피트가 내려가는 상황에서 이제는 어떤 관객도 영노를 못 볼 수도 있을 텐데, 춤사위를 멈추지 않았던 단원에게서 춤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공연 후 알아보니, 배민지라고 한다. 배민지는 프롤로그(달의 시간으로 사는 마을)에서 제 역할을 해냈다. 마치 월궁항아(月宮姮娥)와 같았다고나 할까? 무대 중앙에서 형상화되는 달의 이미지에서, 끝부분에 등장한 배민지는 신비로운 실루엣을 통해서 달의 판타지를 잘 그려냈다. 

 

이틀 동안 공연의 모든 무용수들이 다 잘 해냈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의 존재감이 살아있었다. 3일의 문둥이 페어는 김주희와 신명관, 4일의 문둥이 페어는 유여진, 서한솔이다. 춤으로 보면 모두 잘했다. 이 글의 키워드이기도 한 ‘잔잔한 슬픔’으로 보았을 땐, 첫날의 페어가 더 진지하고 애틋했다. 문둥이라는 소외인(疏外人)으로서 존재감을 얘기한다면 좀 다르다. 

 

문둥과장이 애틋한 연민의 정서를 담아내는 과장이라면, 첫날의 페어가 더 정감 있다. 둘째 날의 페어도 좋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문둥이라는 존재감은 덜했다. 잘 추는 무용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배우에도 연기를 잘 하는 배우가 있고, 역할을 잘 맞는 배우가 있는데, 나는 늘 후자에게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극성을 표방한 무용 작품에서, 대한민국의 무용수도 후자가 많아지길 희망한다. 

 

영감과 할미도 좀 달랐다. 3일의 이동재, 손효진도, 4일의 김기원과 최현지도 모두 잘했다. 둘 다 서로의 호흡이 좋다. 그런데 이 중에서 더 잘 한 사람을 딱 한 사람 꼽자면 김기원이다. 탈춤과 탈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탑이었다. 김기원은 탈춤의 본질과 춤판의 속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고, 관객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현명함이 돋보인다. 첫째날이 무용적 해석에만 머물었다면, 둘째날은 연극적 요소를 더한 셈이다. 흔히 무대공연화 된 탈춤에서는 즉흥성과 현장성이 살아나기 힘든데, 그가 객석의 분위기를 살려내면서 이를 무대에 보태주었다.

 

 



 

장면마다의 생동감이 느껴졌지만, 동래야류의 제대각시를 응용한 장면에서 안무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했다. 처음엔 제대각시가 한명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어져서 제대각시가 떼로 등장을 했다. 이건 단순히 무용단원의 전체적인 참여 차원은 아닐 것이다. 쇼 무대의 라인댄스의 화려함을 방불케 하는 비주얼적인 강렬함을 시작으로 해서, 무대 전체를 매우 화려하게 채워나갔다. 

 

이번 작품을 통해서 정신혜의 안무는 ‘집단의 획일성’과 ‘개성의 독자성’을 잘 대비시키며 전개하고 있다. 특히 제대각시 장면에서 통일된 군무와 함께. 모든 제대각시들이 제멋대로 포즈를 취하게 하는 방식을 혼합하고 있는데, 정신혜 안무가의 특장(特長)이 잘 살아나는 대목이었다. 

 

이제 이번 작품에서 유일하게 혹평을 하려 한다. 말뚝이 역할의 이시원이다. 그간의 그의 무용적 성과를 일반인들과 똑같이 높이 인정한다. 따라서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번 작품에만 한정됨을 확실하게 해두겠다. 이시원은 ‘부산말뚝이’요 ‘동래말뚝이’가 아니었다. ‘서울말뚝이’요 ‘서초동말뚝이’가 되어버렸다. 무용수로서의 큰 장점인 비주얼적으로 압도하는 매력으로 다가왔으나, 그건 처음만 그랬다. 안타깝게도 딱 거기서 멈춰있었다. 춤사위가 진행될수록, 영남춤이라는 존재감이 실종되었다. 비유컨대, 지금 무대에서 모든 사람이 부산 토박이말로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혼자 나와서 서울말을 쓰면서 분위기를 동떨어지게 하는 것과도 같다.

 

 



 

이시원이라는 무용가에게 혹독한 비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길 희망한다. 젊은 무용인을 혹평을 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의 모든 단원이 제 충실히 한 상황에서, 주역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관객은 상황을 알 필요도 없고, 그걸 알수록 변명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그걸 안다고 해도 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 없지 않은가? 

 

이시원이라는 젊은 무용가가 앞으로 이 비평을 감내하면서 보완할 건 무엇인가? 첫째, 전통춤의 본질과 호흡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게 기본이다. 이를 전제로 해서 ‘부산춤’ 또는 ‘영남춤’ 또는 ‘야류춤’에 자신의 심신을 모두 제대로 받쳐야 한다. 이런 두 단계의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기대한다. 이 작품을 다시 보길 희망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시원의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내가 호평을 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 

 

이번 작품에 한정해서, 훌륭한 무용수 딱 한 명을 뽑는다면 정동영이다. 양반과장(5인) 중 종가도령을 맡았다. 이 무용수의 장점은 ‘낄끼빠빠’. 자신이 보여줄 때와 자신이 배경이 되어줄 때를 정확히 안다. 상대적으로 좋은 남성무용수도 있었으나, 때론 이것이 안 돼서 아쉽기도 했다. 정동영은 연출의 디렉션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라 자기의 역할을 정확히 완수했다. 만약 이 작품의 녹화영상을 단원들이 다시 본다면, 내 평이 결국 편애(偏愛)이지 않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과감히 쓰러져야 하고, 어떻게 확실히 멈춰야 하는 걸 잘 알았다. 어디서 슬며시 뒤로 빠져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동영은 ‘춤집’이 좋다. 이건 두 가지 의미다. 첫째는 정동영의 춤이 레퍼토리적인 측면에서 ‘폭이 넓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양한 춤을 구사할 수 있는 무용적 스펙트럼이다. 둘째는 정동영의 어떠한 안무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걸 춤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좋다는 얘기다. 춤이 단단하다는 얘기다. ‘매를 견디어 내는 힘이나 정도’를 ‘맷집’이라고 하지 않은가. 맷집이 좋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무대의 무용수를 보면서 ‘춤집’이 좋은 무용수를 발견하게 되는데, 정동영이 바로 그렇게 당차고 튼실한 무용수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에는 이외에도 춤집이 좋은 남녀무용수가 참 많을 것이다. <야류별곡>과 같은 좋은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져서, 30여명의 무용수의 개성과 역량이 두루두루 빛나길 바란다. 

 

작품이 본지 시간이 좀 흘렀다. 문둥애기(인형)의 모습은 계속 잔상으로 남아있다. 문둥할미와 만나서 해를 향해 걸어가는 문둥애기(움직임구성 정명필 임우영)의 장면에선, ‘잔잔한 슬픔’을 뒤로하면서 ‘일렁이는 흥’을 향하는 마음이 되었다. <야류별곡>의 몇몇 장면에선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울컥’하게 만들어주었다. 안무가 정신혜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안무가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버거운 세상을 아름답게 헤쳐 갈 작품이 계속 탄생하길 바란다. <야유별곡>이 바람직한 선례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국립부산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