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전통미학은 재현과 모방이라는 측면에 충실했기에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예술은 전복과 해체, 규정된 원리나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이는 난감함을 수반한다. 무용예술 역시 과거 모던댄스와 포스트모던댄스, 오늘날의 컨템포러리댄스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정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 움직임의 독창성을 잘 드러내며 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창조를 추구했기에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한 난해함이 있다.
역설적으로 현대무용예술은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깊이 뿌리를 두고 오히려 한층 더 깊은 진실을 은밀하게 드러냈고, 다변화 현상을 거치는 과정에서 컨템포러리댄스라는 용어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컨템포러리댄스는 일상성과 체계화된 접촉즉흥, 미니멀리즘의 변화, 새로운 움직임의 창조, 다원주의 등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컨템포러리댄스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있는 안무가가 있으니 바로 이경은이다. 그녀는 1973년 생으로 올해 47세를 맞았다. 나이를 밝히는 것이 실례일 수 있으나 그만큼 이경은이 걸어온 춤의 여정이 길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신체 움직임에 대한 관심, 무용을 시작하다.
경기도 출생인 그녀는 8세에 발레를 통해 춤에 입문했고, 벌써 40년 춤인생에 접어들었다. 어려서 체조경기를 보고 체조를 하고 싶었다. 특히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보고 이때부터 신체 움직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무용부가 있어서 특활반 모집 때 그들이 타이즈 입은 모습을 보고 체조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용기 내서 손을 들고 지원했다. 이 계기로 무용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학교 무용 선생님의 칭찬과 중고등학교까지 무용반이 활성화되었던 까닭에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두루 섭렵했다.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무용 선생님의 퇴직, 부모님의 반대로 무용을 포기하기도 했다.
대학은 가야 했고 막연히 사무직 종사를 생각하며 공부에 집중해 관광경영학과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재수학원을 다니며 타자도 배우고 했던 것이 후에 서류 작성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결국 무용에 대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입시를 3개월 남기고 무용학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현대무용 이숙재 교수님 스타일이 맞는다는 추천에 한양대에 입학했다. 그녀는 늦게 시작한 만큼 제일 실력이 좋은 친구 뒤에서 열심히 노력했고 어느덧 제일 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이후 한양대 대학원에서 무용학을 전공했고, 경기대학교 대학원에서 공연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경기대학교 한류문화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교육과 공연을 병행하며 종횡무진 바쁘게 활동하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국내외에서 주목받다
이경은은 1996년 <흔들리는 마음>으로 데뷔해 제1회 한국현대무용콩쿠르 일반부 금상, 동아무용콩쿠르 일반부 여자 동상, 한국현대무용협회 신인상 등을 휩쓸며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7년 <데뷔>로 첫 군무를 안무했고, 2000년에는 미국연수를 통해 시야를 넓혔다. 특히 2002년에 자신의 무용단인 리케이댄스(LEE K, DANCE)를 창단하면서 국내외로 영역을 넓혀갔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활동과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국제적 역량도 쌓아갔다. 해외무대에서 먼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주목했다. 2000년 미국 해외연수 기간에 현지 기획자들의 눈에 띄기도 했고 각종 해외 워크숍에 초청받기도 했다. 가장 중요하게 2004년에는 독일 국제솔로댄스페스티벌에서 〈OFF destiny〉로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효율적인 신체 사용, 역동성, 명확한 주제의식, 명쾌함 등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그녀의 춤에 대한 해외의 호평은 다음과 같다.
“밀도와 확실성, 끊임없이 견고하면서도 명쾌함! 절대적인 만장일치로 최고안무상을 수상한 이경은.” - <댄스 유럽>, 2004년 5월호
“떨어지는 육체에서 나오는 음악, 한국 여성 이경은은 '1위 안무상'과 3500유로 상금을 받았다. 그녀의 작품 〈OFF destiny〉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진정으로 칭찬했고 찬미했다. 춤추는 몸으로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두 손으로 한 다리를 쓰다듬고,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무대 위로 상체를 떨어뜨릴 때 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이경은은 좁아지는 고정된 역할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를 춤으로 보여주었다.” - 바바라 게르트너
“단 한번 바흐의 음악이 연주되었지만 한국 여성인 이경은은 "처음에는 춤, 그 다음에 음악"이라는 독창적인 순서에 의해 음악 후 조용한 안무까지 퇴장용으로 바흐의 음악을 사용했다. 그녀의 신랄하고 단호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 들어가 있는 작품 〈OFF destiny〉로 1등상을 받았다. 예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중요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판> 中 ⓒ 옥상훈
<만남> 3부작을 통해 성장하기
<만남> 3부작은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하지만 안무가로서 혹은 예술가로서의 방향성을 잡고 성장해 나가는데 크게 일조했다. 2018년 안무작 〈ZERO〉는 개인의 반쪽, 운명을 다룬 작품이다. 같은 해 서울무용제 우수상과 안무상을 수상한 <안녕>은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우리의 삶이 안녕한지를 주제로 다뤘다. 마지막 2020년 안무작 <}embrace{>는 나와 다른 존재도 있는 그대로 포용하자는 이야기를 다루며, 포용을 넘은 포용으로 확대했다. 이처럼 개인, 국가, 사회로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그녀도 함께 성장했다. 그중 <안녕>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국내 상황에 이산가족과 난민이라는 세계적인 문제, 나아가 개인적으로도 미취업, 미정착으로 모두가 불안하고 안녕하지 못하다는 데서 시작된 작품이다. 미완의 삶을 의도로 집도 자재들이 해체된 채로 공중에 떠 있고, 의상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일상복이다. 메인 색상 역시 통일기와 같은 푸른색이었다. 특별히 2019년 창작산실 레퍼토리를 지원을 받아 완성한 60분짜리 <안녕_ full version>은 다양한 버전으로 활용도룰 갖기도 했다.
<안녕> 中 ⓒ 옥상훈
<}embrace{>는 만남 3부작의 최종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안아주는 듯한 이미지가 느껴지게 중괄호를 사용했으며 ‘embrace’의 뜻 그대로 안과 밖의 만남, 내부인과 외지인의 만남 등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포옹’이었다. 이전에 연극을 같이 하며 본인의 움직임을 잘 구축해줬던 연극배우 두 명을 캐스팅해서 작품의 주제를 명확하게 살려내기도 했다. 관객과의 가까운 만남을 위해 이전과 달리 대극장이 아닌 화이트박스 형태의 극장에서 공연했다. 공연에는 ‘손끝에 닿는 따스함’이라는 주제어가 있었는데 특히 최근에 그녀가 더 절감하는 주제라고 표현했다.
<}embrace{> 中 ⓒ 옥상훈
또 다른 3부작도 있다. 한국 컨템포러리댄스 분야에서 개성 있는 소재로 안무 작업을 해온 그녀의 레퍼토리 중 각종 예술제 공연작을 중심으로 기획한 <사람 3부작>이다. 조용한 사람 外 solo, 시간 위에 사람, 갈증이 그것이다. 이것은 현대무용의 관심영역을 일반관객에게로 넓혀 무용으로의 소통방법을 모색하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소통방법을 모색하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시각으로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안무가 이경은이 지역문화예술 활성화 가능성을 모색하며 지역민을 위해 전석 초대로 공연을 올린 무대였다.
활동 영역의 확장
이경은은 2000년 뉴욕에서 만든 를 한국에서 <모모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만화 버전, 동행 버전으로 제작해 수 차례 공연을 가졌다. 또한 2010년부터 각종 즉흥춤축제에 참여해 정형화된 틀을 깨는 작업을 시도했다. <리케이댄스의 선물>, <오락호락춤>을 통해서는 방방곡곡 문화공감사업, 신나는 예술여행 등을 진행함으로서 무용향유에 소외된 이들에게 춤을 선사했다
그녀의 활동은 무용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연극 분야로 확장되었다. 연극 분야에서는 무대 위 신체와 물체의 모든 움직임을 디자인적으로 시각화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2009년부터 연극계와의 관련을 갖고 연극 안무를 시작했다. 2011년에는 한태석 연출로 국립극단 재창단작 <오이디푸스>라는 대작에 안무 및 출연했다. 이를 시작으로 무용뿐 아니라 연극과 창극, 오페라 등 장르의 제한 없이 활동 반경을 넓혀갔다. 국립극단, 국립창극단, 창작산실 연극과 뮤지컬 분야와 다수의 작업을 통해 무용과는 또 다른 세계를 접했다. 그녀는 무용이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몸으로 집을 짓는 일이라면, 연극은 누워 있는 텍스트를 바로세우는 작업이라고 비유했다. 희곡이 중요한 연극에서 안무가를 필요로 하는 경우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면서 국한될 수 있는 시·공간을 확장시키기 위함일 때가 많다고 인식한 것이다.
독자적 예술체계 구축
이경은은 단단한 무용가다. 체격 자체도 단단하지만 춤에 대한 자신의 소신이나 안무법도 무르지 않고 견고하다. 처음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녀는 짧은 머리에 근육질 몸매, 파워 넘치는 움직임으로 무용수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만 해도 여성 무용수라 하면 날씬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였으나 중성적 매력을 어필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그녀는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여성성에 기대지 않고 독특한 개성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고 현재까지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어느덧 중견으로 자리매김했고, 독립 여성 창작자로서의 위치도 확고히 하고 있다.
도발성, 유쾌함과 재치, 분명한 콘셉트, 독창성 있는 안무,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깔끔한 구성, 기교적 숙련,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이다. 대작 안무에 있어서도 안정성을 확보했고, 대중화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다. 이경은에게 대중화란 삶과 환경 안에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자체이다. 또한 예술가의 사회적 발언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심하며, 극장이 아니더라도 열린 공간에서 다양한 움직임이나 공간 맵핑 등의 작업으로 시민에게 일상적인 공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힐 만큼 외연도 넓어졌다. 리서치와 과정중심 작업에 주안점을 두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신체 움직임에 충실하다.
그녀가 소중한 이유는 물론 해외에서의 수상, 국내외에서의 활발한 활동 등이 포함된다. 그 외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변함없이 유지하며 20년간 리케이댄스를 이끌어 온 노력과 성실성, 저력 때문이다. 꾸준하게 작업을 지속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무용계에서 독창적 움직임 어휘 개발, 일상성과 즉흥성의 사용,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 독자적 예술세계 구축, 창작 역량의 고양을 통해 한국적 컨템포러리댄스를 주도하는 그녀는 다양성 공존이라는 주제로 앞으로도 발전을 거듭할 예술가이다. 앞으로 다양성 공존을 주제로 한 연작이 기대된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리케이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