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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가장 깊은 바닥을 들여다보는 무용가 - 허성임

ⓒ김혜경 



허성임은 ‘몸’의 무용가다. 무용이라는 예술의 본질은 몸을 움직여 시공간을 장악하는 것인데, 중복이나 다름없는 이 표현이 무용인들에게는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성임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그의 이야기 속에서 단 한 문장을 길어올린다면 이 짧은 한 줄이 남는다. 허성임은 몸의 무용가,라는. 그렇기에 이 글은 허성임의 몸에서 출발해 그를 움직이게 하는 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성 무용가들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무용을 시작해 제도권 교육 안에서 전공을 결정하는 편임을 생각하면 허성임과 무용의 만남은 상당히 늦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무용을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무용과 지망생들의 수업 장면을 보고 나서다. 그는 딸만 넷인 집안의 막내딸로, 첫째 언니는 클라리넷을, 둘째와 셋째 언니는 미술을 하고 있었다. 이미 세 딸을 예술 전공자로 기르고 있던 그의 부모는 학업 성적이 좋았던 그가 공부를 계속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무용과 지망생들이 흡사 개미처럼 보이는 검은 레오타드를 입고 긴 머리에다 종아리에는 단단하게 알이 박인 채 당시의 그로선 무엇인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을 수행하고 있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몸으로 표현하는 듯한 그들의 움직임에 매료된 허성임은 부모를 설득해 곧바로 무용을 시작했고, 그의 지도를 맡은 무용과 교사는 남은 7개월 동안 무용으로 대학에 진학하려면 몸무게부터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성임은 63kg이던 몸무게를 두 달 만에 20kg 넘게 감량했다고 털어놓았는데, 권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라는 단서도 함께였다. 무용실에서 살다시피 한 노력은 실기는 물론 수능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 전체 수석으로 한성대학교 무용과에 현대무용 전공으로 입학하게 된 성과로 돌아왔다. 그가 입학했을 당시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박인숙 교수의 지도 아래 한성대에서 활발한 현대무용 작업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여서 운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니드컴퍼니, 허성임을 매혹한 ‘사람’이 있는 무대 

 

허성임에게 내가 왜 무용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일의 화두다. 춤이 좋아서, 무대가 좋아서, 사람들과 몸으로 소통하는 것이 좋아서,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지만 무대에 올라 그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그 경험이 너무나 소중하기에 무용가 허성임의 하루는 이 질문과 함께 매일 연장된다. 무대 위에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06년 벨기에로 건너가 얀 파브르, 알랭 플라텔 등 세계적인 거장 안무가들과 작업하며 경험을 쌓은 허성임은 2009년 니드컴퍼니에 합류한다. 니드컴퍼니는 무용인, 음악인, 연극인들이 모여 있지만 이들은 자기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춤, 노래, 연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예술 무대를 선보이는데, 이에 대해 허성임은 “기술을 넘어 진실만이 존재하는 솔직한 무대를 만드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처음 그가 니드컴퍼니의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무대 위에서 귓속말을 하고 대화를 나누고 농담을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출연자들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왔지만 일견 공연에 집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무대는 그에게 자유로움과 여유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환기시켜주었다.

 

 

니드컴퍼니 시절 출연한 얀 라우어스 안무작 〈Marketplace 76〉 ⓒWonge Bergmann/Need Company


니드컴퍼니에는 총 세 명의 디렉터가 있는데, 총예술감독으로 알려진 얀 라우어스는 극작가로 주로 공연의 대본을 담당하고, 라우어스와는 부부 사이이기도 한 무용가 그레이스 엘렌 바키는 움직임과 영상을 디렉팅하며, 작곡가 마르텐 세게레스는 음악 작업을 맡는다. 10년에서 길게는 20년간 단체 활동을 함께하며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각자의 색깔을 알고 있는 무용수들은 안무를 직접 만들어내며 안무자가 던지는 작은 소재에도 풍부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니드컴퍼니에서의 작업은 무대에 대한 허성임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얀 파브르와 작업하는 동안 무대는 성스러운 곳, 몸도 마음도 무대를 위해 정리되어야만 올라갈 수 있는 무서운 곳이었다면 니드컴퍼니에서 작업하며 무대는 놀이터로 바뀌었다. 무대는 실수를 할까 봐 두려워하며 완벽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곳이 아니라 실수를 받아들이고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가장 편안한 곳이 되었다. 잘 단련된 테크닉을 보여주거나 멋진 효과로 무대를 채우기보다 어딘가 부족하더라도 사람 냄새로 가득한 무대를 만드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독보적인 존재감, 허성임이라는 이름

허성임의 안무세계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몸’, 그리고 ‘여성’이다. 무용가들에게 몸은 작업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지만 다른 무용가들이 몸의 율동성과 이동성을 통한 작품화를 고심할 때 허성임은 몸의 물성에 집중한다. 도예가가 점토를 빚어 그릇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허성임은 물성을 가진 몸을 다시 빚어내 움직임을 만든다. 허성임이 몸으로 빚어낸 움직임과 마주한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묘하게 성적인 긴장감이 흐르고, 아마도 유명한 록 넘버의 가사인 듯한 문장들을 음률도 반주도 없이 반복적으로 읊조리고 내뱉으며 소리를 키우다가 허성임이 먼저 절정에 도달하여 소리 지르며 눈물을 흘렸을 때, 그 전율을 고스란히 객석에까지 전달되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날 것 그대로의 포효가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 이 무대에서 그 희열을 경험한 이라면 지금까지 익숙하게 들어왔던 음악을 이제부터 다르게 듣고, 그 의미를 다시 쓰고 싶어질 만큼 매혹적인 작품이었다.
-방희망, <춤웹진> 2014년 12월호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국내 무용계가 이렇게 집중하는 이유는 뭘까. 안무가로서, 그리고 퍼포머로서의 허성임은 국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발산하는 에너지와 한 치의 머뭇거림 없는 직설적인 표현들, 그만의 확실한 언어로 완성하는 움직임들은 허성임이라는 무용가의 독보적인 존재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임수진, <몸> 2015년 9월호

<넛크러셔>를 통해 숨길 수 없는 분출력을 지니고 강한 에너지를 내뿜은 허성임은 이번에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관객에게 각인시켰다. 또한 러프하면서도 심플한 움직임의 반복을 통해 잘 다듬어진 구조에 저항하며 엔딩을 알 수 없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앞으로도 여성의 몸에 대한 그녀의 자각과 탐구의 새로운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것임을 암시했다.
-장지원, <댄스포스트코리아> 2019년 1월호

여성과 몸, 두 지점을 관통하는 질문들

201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된 <필리아(Philia)>는 현대무용가 장수미와 협력해 만든 그의 첫 안무작이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국내 관객들과 만났다. ‘필리아’는 그리스어로 친구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 또는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을 의미하며, 영어에 와서는 명사형 어미로 사용되며 이상 성욕의 의미를 갖는다. 작품은 두 여성 무용수가 미숙하지만 풋풋했던 청소년기로 되돌아가 어디까지가 우정이고 어디서부터가 사랑인지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던 여성 간의 우정을 넘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어에 있는 친구 간의 우정 혹은 사랑이라는 원래 의미를 가져오되, 영어에 내포된 의미를 통해 동성 간 관계에 대한 미묘한 사회적 시선을 담는 이중구조를 띠고 있다. 


장수미와의 두 번째 협업작 〈튜닝〉 photo by 김상협 ⓒLIG문화재단


장수미와의 협업은 <필리아>로 그치지 않고 2014년 LIG아트홀에서 공연한 <튜닝(Tuning)>으로 이어지는데, 록 콘서트에서 발현되는 남성적 에너지를 여성의 몸을 통해 재해석한 작품이다. 두 무용수는 열광적인 팬들의 함성과 현란한 기타 속주, 보컬의 거친 샤우팅과 헤드뱅잉 등이 오가는 대형 콘서트 무대가 아닌 스피커와 일렉트릭 기타만이 놓여 있는 작은 소극장 무대를 오직 떨리는 몸과 헐떡이는 숨소리만으로 채운다. 남성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록 스피릿이 남성의 시선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던 여성의 몸을 경유해 무대를 에워싸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다. 몸의 떨림이 감각의 떨림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여성과 몸이라는 두 지점을 관통하는 허성임의 질문들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2015년 문래예술공장에서 벨기에 극단 아바투아 페르메와 협업으로 올린 <님프(Nymf)>는 교복을 입은 여성 청소년에서 임신한 여성으로 몸의 변화를 보여주며 여성의 변태와 그 신화를 통해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을 위해 그는 임신 6개월의 몸으로 무대에 올라 전라를 드러내는 파격을 감행했는데,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을 품고 있기에 흔히 고귀함이나 성스러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찬미의 대상이 되는 재생산의 주체로서의 여성의 몸이 남성의 시선에 의해 어떻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허성임과 김혜경 두 여성 무용수를 비롯해 모든 출연자들이 남성 속옷으로 갈아입은 뒤 남성성을 과시하듯 포효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벨기에 극단 아바투아 페르메와의 협업작 〈님프〉 ⓒ옥상훈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선정작으로 공연된 <넛크러셔(Nutcrusher)>는 대상화되는 여성의 몸과 여성을 향한 시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해외에서도 매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에서 여성 아이돌그룹이 수행하는 안무가 여성의 몸을 보여주는 방식이 “사회에서 바라는 여성의 몸, 또는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한정돼 있고 규격화돼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여성으로, 아시아계 이민자로, 무용가로 유럽에서 활동하는 동안 만난 연출가와 안무가들이 아시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목격한 허성임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세 명의 여성 무용수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기호 중 하나인 긴 머리카락만을 남겨놓고 얼굴과 몸을 검은 옷으로 다 가리고 등장하는데,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무용수들은 검은 옷을 벗고, 그다음은 가슴을 가리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감춰져 있던 몸을 드러내 여성이라는 존재를 알린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 여성을 드러내는 기호로 사용되었던 긴 머리카락은 작품 중반부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부여받지 못한 채 허리춤에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손과 함께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규제, 그리고 여기서 탈출해가는 여정을 그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공연예술창작산실 무용 분야 선정작으로 공연된 〈넛크러셔〉 ⓒ옥상훈


조금 더 살아 있는 움직임을 위해

여성, 아시아계 이민자, 무용가라는 정체성으로 유럽과 한국 무대를 누비며 활발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는 허성임에게 영감을 주는 질문은 결국 동시대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이렇게 살아가나?”, “나는 무대에서 관객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 같은 질문들이 그가 평소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반적인 질문이라면 그 뒤를 “우리는 왜 여성과 남성을 이렇게 구별하고 다른 역할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주입시키고 있나?”, “이민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성소수자를 성소수자라 부르지 않을 순 없는가?” 같은 구체적인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You are okay!〉는 임신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향수병을 앓게 된 그가 이민자의 삶은 무엇인지, 섞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 작품이다. 독일 NRW의 지원으로 본에서 레지던스를 하며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작업을 진행했는데, 이때 협업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소망은 파독 간호사의 딸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W.A.Y_we are you〉에서는 맞다와 틀리다의 이분법적인 접근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 퀴어에 대한 고정관념을 환기시킨 바 있다.


2019년 아르코 파트너 선정작 〈W.A.Y_we are you〉 ⓒ옥상훈


다작을 하는 안무가가 아니라고 겸손해하지만 허성임의 공연 캘린더는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넛크러셔>는 국내 초연 후 작년 10월에는 런던 더플레이스 극장에서, 12월에는 벨기에 디셈버댄스페스티벌에서 공연되었고 내년에는 보자르 극장에서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오는 10월에는 SPAF에서 다시 한번 국내 관객들과 만난다. <넛크러셔>의 SPAF 공연이 끝나면 11월에는 플랫폼 엘에서 4시간 동안의 전시공연 <시간과 시간 사이>를 선보일 계획이다. 내년에는 니드컴퍼니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오페라 공연을, 프랑스에서는 허성임프로젝트로 오페라를 공연한다. 이후 런던에서 장애인 사진작가와 함께 일상생활 속 장애에 대한 리서치도 진행할 계획이다.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의 허성임이 고등학교 3학년 때 무용을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으며 가늘고 길고 바비인형 같은 몸을 가져야만 좋은 무용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성임은 이제 자신이 그런 몸을 가지지 않은 데 감사하고 있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서 아름다움을 가늘고 긴 선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 무용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은 둔탁하고, 조금은 부정확하고, 조금은 거칠고, 조금은 우악스럽지만, 그렇기에 조금은 더 살아 있는 듯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허성임은 오늘도 몸을 탐구하고 있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허성임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