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걸은 국립발레단 주역과 파리오페라발레단 솔리스트를 거쳐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김용걸댄스씨어터 예술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 발레계에서 김용걸만큼 무용수, 창작자, 교육자 등 다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2010년대 들어서서는 한국 컨템포러리발레 경향을 이끄는 창작자로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어머니에게 떠밀려서 시작한 발레
1973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용걸은 중학교 2학년까지 평범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일생의 대변화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겨울방학 때 일어났다. 어머니가 소싯적 무용을 배우고 싶어 하셨는데 할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한이 되셔서 자식들 중 하나는 무용을 시키고 싶어 하셨다. 아들만 넷을 두신지라 가장 말을 잘 듣고 체격도 슬림한 김용걸을 발레학원에 무작정 밀어 넣었다. 처음 접하는 발레를 전혀 따라할 수가 없어 못하겠다고 뛰쳐나왔는데 어머니의 우시고 비시고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발레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흡한데도 운 좋게 부산예고에 입학하였다. 당시 부산예고에는 1기에 신무섭, 3기에 김용걸이 있었던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은 김용걸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발레의 맛을 알게 되면서 춤 실력이 급성장하였다. ‘체형적인 면에서 타고난 점이 있으니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선생님들의 칭찬이 많은 힘이 되었다. 여기저기 콩쿠르에서 상을 받기 시작하니 부모님이 매우 자랑스러워하셔서 더욱 힘이 났다. 발레를 하기 전에는 한 번도 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발레로 두각을 나타내다 보니 성취감이라는 게 생겼다.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는 이원국, 신무섭, 황재원, 엄재용 등과 함께 매주 일요일마다 따로 모여 연습하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가장 기량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젊은 남성무용가들로서 학교도 나이도 조금씩 달랐지만 예술적 지향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현재 여러 방식으로 한국 발레계를 이끄는 위치에 올라서 있는 이들이다.
〈Work II-S〉
국내 최정상급 발레리노로 성장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995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하였다. 그 이듬해 최태지 단장체제로 들어서면서 주역으로 승급하여 오래도록 그 위치를 유지하였다. 1997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3위에 이어 1998년 파리 콩쿠르 파드되 부문 1위를 수상하고 나니, 매스컴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저기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이후 일반인 팬들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티켓을 사려고 길게 줄을 서거나 지하철에서 싸인요청을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장 자신 있었고 그렇기에 관객들도 좋아했던 레퍼토리는 <돈키호테>였다. 젊은 열정과 에너지로 뛰고 돌고 하다 보니 김용걸하면 <돈키호테>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파리 콩쿠르 당시에도 <돈키호테>, <다이아나와 악테온>,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1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파트너였던 김지영과 무대에서의 케미는 상당해서 팬들 사이에서 둘 사이에 썸팅 같은 것을 기대하기도 했었다. 실상은 6살의 나이 차이나 연습하는 방식의 차이로 마찰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걸의 마음은 한국무용가 김미애로 향해 있었다. 1997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한 김미애의 착하고 단정한 모습에 반해서 6개월 동안이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고 결국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립발레단과 국립무용단이 모두 국립극장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다가다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국립발레단이 예술의전당으로 옮겨간 것은 2000년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입성
김용걸은 세계적인 명성의 파리오페라발레단에 동양인으로서는 세 번째, 한국 무용가로는 최초로 입성하였다. 그곳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드라마틱하다. 1999년에 유럽 쪽은 생각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을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불 무용가 서미숙이 파리오페라발레단 인턴단원 오디션이 있으니 경험 삼아 치르고 미국으로 건너가라고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5명을 뽑는 오디션에 56명이 지원하였으며 김용걸은 55번째였다. 그런데 덥석 3등으로 합격을 해서, 김용걸 자신도 놀라고 다른 참가자들도 놀랐다. 김용걸을 제외한 나머지 합격자들은 모두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연수생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5개월짜리 계약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레이몬다>, <신데렐라> 등에 출연하였다.
인턴단원 계약이 끝나는 시기에는 종신단원을 뽑는 오디션 공고가 났다. 1명을 뽑는데 30-40명 정도가 신청했는데 또 김용걸이 뽑혔다. 상상도 못한 일에 모두 놀랄 지경이었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한국에서 국립발레단 주역을 하는 등 커리어가 있는데도 전혀 잘난 척 없이 묵묵하게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까드릴(Qurdrille)-꼬리페(Coryphée)-쉬제(Sujet)-프리미에(Premier)-에투알(Étoile)로 이어지는 승급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군무-상급군무-솔리스트-주역-상급주역(스타)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김용걸은 솔리스트에 해당하는 쉬제까지 올라갔다. 현재 그 발레단에 있는 박세은은 프리미에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는데 기억에 남는 것 몇 개만 뽑자면 다음과 같다. 까드릴로 활동했던 무렵 <돈키호테>의 2막에서 집시 역을 맡은 적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피가로>지에서 ‘누리예프 안무의 해석력이 뛰어났다’는 평을 보고 힘을 받았다고 한다. 쉬제에 있었을 당시, 아부 라그라(Abu Ragtta) 안무의 세계초연작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에투알 2명이 다치는 바람에 김용걸이 그 역할을 대신한 적이 있었다. 안무가가 김용걸처럼 마음을 담아 열심히 하는 무용수가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달 월급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다. 시간당 리허설 수당이 군무가 1만원이면 에투알이 10만원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었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은 1983-87년 루돌프 누레예프 단장 시절에 <돈키호테>, <로미오와 줄리엣>, <레이몬다>, <신데렐라>, <호두까기인형> 등 여러 고전명작들을 구축해 놓았으며 1990년대에 모리스 베자르와 롤랑 프티 그리고 지리 킬리안과 윌리엄 포사이드 같은 현대발레 레퍼토리들을 확보하였다. 더 나아가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같은 현대무용 레퍼토리까지 아우르면서 파리오페라발레단만의 폭넓은 범위의 작품 구현력을 완성해 갔다. 예술적 고귀함, 퀄리티, 디테일, 프라이드 등을 목숨처럼 중요시 하는 파리오페라발레단만의 문화로 인해 발레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되새겨볼 수 있었다는 점이 김용걸에게도 큰 마음의 자산으로 남겨졌다.
한국 컨템포러리발레를 이끄는 창작자로 자리매김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은 김용걸은 다음 해 여름 호주 투어를 끝으로 파리오페라발레단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종의 개선과도 같은 귀국을 한 셈이다. 2009년 하반기부터 대학에 터를 잡고 창작자로서 여러 작품을 빌표하기 시작하였다.
김용걸이 세계 최정상급인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활동한 경력은 엄청난 메리트로 다가온다. 지리 킬리안이나 윌리엄 포사이드 같은 발레 명장들의 작품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었던 기회는 고스란히 그의 안무에 영향을 미쳤다. 동시대의 현대발레, 정확히는 컨템포러리발레의 주요 흐름의 하나인, 음악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세련되고 기능적인 춤사위를 엮어가는 안무 스타일을 명료하게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전통적인 발레 동작을 해체하여 자기만의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현명하게 취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 스타일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무용수들이 한 치 오차 없이 정교하면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인데 한국예술종합학교 발레전공생들은 그 또래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까닭에 안무가에게 상당한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모든 분야가 그러하지만 유독 발레는 출연하는 무용수들의 기량이 안무의 수준을 결정짓는 주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010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발표한 〈Work〉는 이후 수많은 시리즈의 모태가 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Work 시리즈’는 〈Work I〉, 〈Work I-1〉, 〈Work II〉, 〈Work II-1〉, 〈Work II-S〉 등이 있다. 특히 2012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발표한 〈Work II〉는 ‘Work 시리즈’의 정점을 차지한다.
김용걸이 창작자로서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국립무용단체들의 러브콜도 이어졌다. 2017년 국립현대무용단의 의뢰를 받아 광주시립발레단 무용수들과 함께한 <볼레로>는 자주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국립발레단의 의뢰를 받아 2016년 〈Les Voyageurs〉와 2019년 〈The Road〉라는 2인무를 발표한 바 있다. 2019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는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에서 영감을 얻은 〈Le Baiser_봄의 제전〉으로 또다시 안무 역량을 인정받게 되었다.
김용걸은 젊은 남성무용가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자리잡고 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에 성장을 거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의 위치에 올랐으며, 동양인으로는 세 번째이자 한국 무용가로는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하여 솔리스트로까지 오르는 등 남성무용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귀국해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교수로 있으면서 창작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지고 태어난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기인한다. 특히 창작자로서 김용걸은 이제 하나의 장을 마무리한 셈인데, 발레에 대한 실력과 집중력 그리고 마음가짐과 태도가 어우러져 앞으로의 기대를 한층 높이고 있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 비평사학자)
사진_ 김용걸댄스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