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생인 밝넝쿨은 올해로 44살의 중견 안무가, 교육자, 퍼포머이다.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눈길을 끌기도 하는 그는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씨어터의 예술감독이며 성수아트홀 상주단체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세계적인 안무가 다비드 잠브라노와의 협업과 그의 메소드를 통한 움직임의 확장은 자신의 색깔과 안무관, 국내외 공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밝넝쿨은 컨템포러리댄스가 간혹 간과하기도 하는 피지컬한 신체의 움직임과 몸에 주목한다. 또한 아버지로서도 현재는 어린이 청소년에 관해 관심을 두고 특화된 작업으로 다채롭게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하며 세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무용가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 늦은 나이에 무용을 시작하다
전남 영광군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 세대로 그들의 춤에 매료되었고, 중학교 때부터 아마추어 춤동아리를 만들어 춤췄다. 연극동아리도 병행하면서 뮤지컬이 하고 싶어 재즈를 배우려 광주로 향했다. 당시 박진수 선생이 운영하던 현대무용학원을 재즈학원으로 잘못 알고 시작했으나 현대무용을 배우면서 고2 때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했다. 이동 시간이 아까워 아예 학원에서 숙식을 하던 그는 무용에만 집중하기 위해 인문계고등학교를 포기했다. 고3 때는 광주로 이사 와서 직업학교를 다니며 올인했다. 학원 동기로는 신창호, 노준성, 홍동표가 있다. 입시 때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짓던 자신은 서울 소재 대학 입학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세종대에 가고 싶어 시험은 봤다. 그러나 예비 2번에 그쳐 결국 김원 선생이 있는 전북대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화위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무용인생의 전환점이 된 아내와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씨어터
전북대 졸업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아콩쿠르와 신인콩쿠르에서 2등을 하며 군면제를 받지 못했다. 군대에서 제대 후 무용을 계속 할까 포기할까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뭘 원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상근예비역으로 집 근처에서 출퇴근 군인을 하면서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머님을 도와 3년간 농사일을 하면서 공백기가 생겼다. 이때 사실상 아내가 무용을 계속 하게 된 동기이다. 아내와 군휴가 때나 주말에 워크숍도 다녔다. 아내인 인정주와는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참여했던 작품에서 무용수로 함께 하며 만났다. 그때가 2000년이니 딱 20년이 되었다. 이후 작업도, 무용단도 함께 만들어서 지금까지 작업해오고 있다. 모다페 사무국장을 했던 아내 덕분에 그 기회로 창무회의 <심청> 일본 공연도 했다.
군대 제대 후 아내와 해외로 가서 배낭여행을 1년 정도 하면서 서양 유명 무용인들을 만났고, 피핑톰무용단의 프랭크 연출가를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랭크가 당시 배울 만한 다섯 명의 무용인들을 선정해줬는데 대부분 빅 컴퍼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무용가들이 선호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무용가들이었지만 1년 동안 수많은 무용가들을 만나면서 견문을 넓혔다. 특히 유럽은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었다. 견문을 넓히는 과정에서 무용에 대한 마음가짐과 앞으로의 방향성, 정돈 시간을 가졌다. 또 한번 무용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이다.
2006년 30대 초반에 몸이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면서 스튜디오 이름을 마이 라이프라고 지어 운영했다. 이후에 단체 이름에 ‘오!’라는 감탄사를 붙여 오!마이라이프 무브먼트 씨어터라는 풀네임을 만들었다. 단체의 작업은 삶을 관통하며 개인적일 수 있으나 관객과의 공유작업이었다. 또한 무용의 범주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으며 나를 성찰하고 찾는 작업이었다. 이 한계를 벗어나지 않다가 아르코파트너즈에 이르러 외연을 넓혔다. 2006년부터 ‘Open dance method’를 만들었는데 간단히 말하면 막춤 혹은 열린 춤이었다. 그가 생각할 때 이것은 역설적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안 열리고 편하지 않은 것과 동행하는 것, 즉, 제약들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제약 속에서 꽃피는 자유, 그것이 아름다운 자유로움이 아닐까!
<꿈꾸는 몸>
춤의 본질을 찾는 작업 그리고 초연작 <꿈꾸는 몸>
그가 생각하는 무용의 본질 중 하나는 예술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나를 찾는 작업 혹은 무용이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 쓰는 것이었다. 순수한 몸을 갖는 것은 순수한 기억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회귀하는 것이 진화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 피지컬한 작업이며 몸의 인식이었다. 따라서 <공상물리적 춤> 이전에는 음악과의 작업이었지 오브제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오!마이라이프 창단 이후 초연은 모다페에서 했던 <꿈꾸는 몸>이었고 이 작품은 남자 4명이 춤추는 것이었다. 외국에서의 경험과 메소드를 실험하는 작업으로, 리서치 식으로의 결과물이었다. 국내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했으나 해외에서는 2008 스페인 마스단자 국제안무대회 그룹부문 2위와 베스트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했고 국제안무대회 요코하마 댄스컬렉션 R 그룹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초창기 멤버였던 최기섭과 김동욱 등이 출연했다. 첫 작품인 만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했다. 이 시기가 30대 초중반으로 매일 밤을 새며 연습했고, 외부와 단절되다 보니 어린아이 같이 되었으며 밝고 깨끗한 것을 추구했다. 퓨어 이미지를 찾았기 때문에 부제는 <소년의 꿈>이었다. 그러나 그도 몸에서 모든 것을 찾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기가 왔고 그 혼돈의 시기가 1~2년 정도 있었다고 한다.
세계적 무용가 다비드 잠브라노와의 만남으로 확장된 무용관
다비드 잠브라노는 61세 남자로 현존하는 스승이자 친구, 패밀리 중 오너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에 캠프가 있다. 그는 교육자·퍼포머·안무가로, 1년에 60개국을 다니며 워크숍을 진행하고 우리나라에서도 한번 공연을 가졌다. 즉흥작업을 하며 동양적 맥락도 있는데 밝넝쿨의 개인적인 작업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잠브라노와는 최소 1년에 한두 번은 작업하며 그가 부상 당시 플로어 움직임으로 만든 플라잉 로우 메소드(Flying-Low Method) 라이선스도 받았다. 그 메소드는 한국에서는 밝넝쿨이 유일하며 전문가들에게 좋은 테크닉으로 동양의 음양처럼 에너지를 보내고 받아들이는 2가지만 있다. 훌륭한 메소드지만 많이 실행해 볼 기회는 없었다. 특별한 기억은 잠브라노가 50세 때 코스타리카에서 50일 동안 서로의 춤을 공유하며 50명의 무용가들이 축하공연도 가졌다. 5개국 50빌리지(village) 춤 프로젝트로 다비드와 4인이 함께 했다. 아프리카 세네갈, 스페인, 한국에서 가졌는데, 한국은 10번 빌리지였다.
그는 현재까지 무용과뿐만 아니라 연극과, 모델과 수업, 여러 곳에서 특강을 해왔다. 외국에서는 이태리, 코스타리카, 벨기에 등에서 해외 초청워크숍을 가지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모두 프로페셔널 대상이므로 밝넝쿨의 실력은 이미 검증받았다 볼 수 있겠다. 더불어 그에게 있어서 오늘날 커뮤니티댄스에 대한 견해는 커뮤니티라는 것이 무용의 본질이며 주변이 아니라 오히려 중앙이라고 본다. 커뮤니티를 대하는 태도가 극장 작업보다 훨씬 중요하며 형식 안에서 이를 대하는 태도란 디테일이 다이다. 또한 그 안에서의 운영이 핵심이다. 예술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듯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하다. 어려운 작업인 동시에 태도가 중요하며 무용의 중심이고 극장작업은 오히려 외부이다. 커뮤니티를 통해 극장작업은 힘을 얻는다. 이를 입증하듯 그는 전국의 문화재단에서 커뮤니티 및 예술교육을 실행해 왔다.
영화작업은 그 당시는 잘 모르고 참여했으나 지금은 무용이 영화랑 비슷한 작업이라고 봤다. 한 프레임이 전체가 아니라 그 이면 전체가 중요하며 의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밝넝쿨의 작업도 그것을 표방하고 있으며 그래서 작품에서 힘주고 하는 장면이 없다. 그는 오히려 두 번째 것을 선택하며 무너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연극은 대사 자체로 이해가 가고 있지만 영화는 콘셉트를 잡고 안무처럼 그려진다.
동시대와의 조화를 꿈꾸며 무용의 재정의를 찾는 작업
그의 작품은 앞서 언급한 가장 애착이 가는 초연작 <꿈꾸는 몸>외에도 다양하다. <트렌스포밍 뷰>, <미들 플레이스>, <인투 더 와일드>, <북천에 잠들다>, <나는 여기입니다>, <파이팅 룸>, <파라다이스 낫 인 더 스카이>, <헨델과 그레텔들>, <하드 듀오>, <텐 빌리지 프로젝트>, <춤의 정신 프로젝트> 시즌1, <춤의 정신 프로젝트>시즌2, <춤의 정신 프로젝트> 시즌3, <춤의 정신 프로젝트> 시즌4, <공상물리적 춤>, 〈Co-Lab: Seoul-Berlin〉, <댄스를 부탁해5>, <괜찮아>, <어린이를 위한 공상물리적 춤>, <공상물리적 춤-에피소드x>, <부앙부앙>등이 그것이다.
밝넝쿨은 2018년부터 <공상물리적 춤>을 만들었고 이는 최근작인 동시에 대표작이기도 하다. 어린이 청소년 작업에 대해 생각했고 아이에 대한 진지한 작업을 선언했다. 처음에 단체에서는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작업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그는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관을 동경하며 동시대와 어떻게 섞일 수 있는지 고민한다. 현 시대는 무용이라는 것을 재정의해야 하는 시기이며 시대와 같이 가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또한 한계점을 맞아 무용의 대중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이 그 안에 섞여 얘기해줘야 한다. 결론적으로 밝넝쿨의 현재의 고민은 아이들, 관객과 만나는 것 그리고 동시대적 가능성의 탐구이다.
“2016년 12월 3~4일 창작산실에서 초연한 <공상물리적 춤>을 통해 창의성과 성숙도를 보여주었다. 구태의연한 패턴을 배제하며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된 움직임을 펼침으로써 현시대의 감각과 무게감 있는 예술성으로, 독립 중견 안무가로서 농익은 안무의 연륜과 깊이를 보여주었다.”
-심정민 평론가, 2016 춤 전문지 『춤저널』 (제32호) 지면 작품평 중
“<공상물리적 춤>은 안무의 본질이자 매체이자 개체인 몸에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린관객들에게 보여주면 내용의 철학적 이해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척 즐거워할 작품이다. 아이들은 움직임과 소리에 민감한데, <공상물리적 춤>은 재미있는 동작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상욱 기자(lovelich9@rpm9.com) , 전자신문 2016.12.5.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공간을 잘 활용하여 소품을 적절히 잘 배치하여 객석과의 원활한 호흡이 중요한 소극장의 장점을 살렸다는 데 있다.”
-조은경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