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몸으로 전하는 인간의 이야기 - 허용순

202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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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무대에서 한국 출신 무용가들의 활약상이 들려오는 것은 이제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외 유수의 명망 있는 국제콩쿠르에서는 우승은 물론 입상자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채워지는 결과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며, 한국인 무용가들은 해외 무용단 입단에서 더 나아가 당당히 주역을 꿰차게 된 기쁜 소식을 연일 알려오고 있다. 언론 역시 ‘한국인 최초’나 ‘동양인 최초’ 등의 수식어를 붙여 이 낭보에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막 대중관객들과의 접점을 폭발적으로 넓혀가기 시작하고 있는 발레계에서는 이러한 무용가들의 해외 진출에 대해 ‘서양인들이 전유하는 예술계에서 동양인의 불리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이뤄낸 쾌거’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무용가로서의 개별적인 성취를 조명하기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프레임에 갇힌 평가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안무가 허용순의 존재는 매우 이채롭다. 그는 문훈숙, 김인희 등 선화예고 동기들과 함께 모나코왕립발레학교에서 수학한 해외 유학 1세대이자 학교를 졸업한 동기들이 모두 국내로 돌아와 유니버설발레단의 창단 멤버가 된 것과 달리 홀로 유럽에 남아 무용수 생활을 시작한 해외 진출 1세대이기도 하다. 

허용순 이후 해외에 진출한 발레 무용가들이 무용수로서의 커리어를 일단락 짓고 국내 무대로 복귀해 안무가로 활동을 시작하거나 무용수로 계속 무대 인생을 이어간 것과 달리 그는 독일에 정착해 뿌리를 내리고 안무가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독일과 스위스의 발레단 네 곳을 오가며 무용수 생활을 하고 현재까지 40편이 넘는 안무작을 발표하며 무용수, 안무가, 교육자로 활동하는 동안 허용순은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프레임을 도도히 비껴간 채 자신의 이름으로 우뚝 섰다.
 

무용 인생의 시작 - 어머니, 애드리언 델러스,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허용순이 무용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발레가 아니라 한국무용이었다. 그가 한국무용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인천에서 미용사로 성공한 그의 어머니는 자신이 못 다한 한국무용의 꿈을 딸이 이뤄주길 소망했다. 1976년 선화예술학교에 한국무용 전공으로 입학한 그는 1학년 2학기에 훗날 유니버설발레단 초대 예술감독이 되는 애드리언 델러스가 발레 지도교사로 부임하면서 발레로 전향한다. 다리가 긴 데다 몸이 유연하고 턴아웃이 잘되는 등 발레하기에 좋은 신체조건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국무용과는 너무도 다른 세계인 발레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 와서 발레를 지도하게 된 델러스에게 첫 제자가 된 허용순과 동기들은 특별했다. 델러스를 엄격하면서도 열정적인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허용순은 자신과 동기들이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로부터 ‘엄마가 좋니, 선생님이 좋니’ 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발레와 발레 선생님에게 깊숙이 빠지게 되었다. 인천에서 학교까지 두 시간 이상 걸려 통학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문훈숙, 김인희 등 동기들의 집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하루의 모든 시간을 붙어 다니며 함께 연습하는 동안 우정도 실력도 부쩍 자랐다.

델러스와의 만남이 허용순에게 발레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게 했다면 해외 유학은 발레 무용수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한껏 열어준 기회였다. 해외 발레계와 교육 격차가 크고 유학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1980년 허용순은 로열발레학교 어퍼(upper)스쿨에 당당히 합격했고 까다로운 비자 문제도 콩쿠르 수상 실적으로 해결했다. 이때 합격자들은 허용순 외에도 선화예고 동기였던 문훈숙, 김인희, 심정희, 선배 최민화 등이었다. 당시 로열 어퍼스쿨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6년 동안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었기에 델러스에게 지도받은 지 3년밖에 되지 않았던 이들의 합격은 엄청난 사건이라 할 만했다.

오디션에는 합격했지만 아직 입학 나이가 되지 않은 허용순과 김인희, 심정희 등이 한국에서 기다리는 동안 먼저 로열발레학교로 떠난 문훈숙과 최민화 등은 영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차별로 적응에 어려움을 겪다 델러스의 조언으로 모나코왕립발레학교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허용순도 영국이 아닌 모나코로 향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된 이가 그 유명한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교장이다. 미하일 포킨이 이끄는 몬테카를로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한 베소브라소바는 1940년대 들어 교육자로 변신해 제자를 길러내기 시작했고 1952년 몬테카를로에 자신의 발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75년부터 모나코 왕실에서 학교 운영을 맡게 되면서 왕립발레학교로 거듭나게 되었는데, 초기 명칭은 모나코 공비 그레이스 켈리의 이름을 딴 ‘프린세스 그레이스 클래식 댄스 아카데미’였다.

클래식 발레리나를 꿈꾸던 허용순에게 모나코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충격의 연속이었다. 마고트 폰테인이나 루돌프 누레예프 같은 살아 있는 발레의 전설들을 직접 눈앞에서 만날 수 있었고 학업을 마친 무용수들이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발레단에 속속 입단하는 것을 보며 한국으로 돌아와 무용수 생활을 하는 외에도 수많은 길이 열려 있음을 실감했다. 클래식 발레 클래스 외에도 학교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클래스에 들어가 배우는 동안 발레에도 너무 많은 종류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클래식이 아닌 움직임이 전달하는 아름다움과 제한 없는 움직임에서 나오는 자유로움에 매료되었다. 

2011년 유니버설발레단 ‘디스 이즈 모던 2’에서 공연된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This is your life)〉

클래식에서 컨템포러리까지, 깊고 넓고 풍부하게

함께 온 동기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허용순은 유럽 무대에서 무용수 커리어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홀로 남았다. 당시 학교에는 허용순 외에도 선화예술학교 후배였던 강수진이 재학 중이었다. 베소브라소바 역시 그가 다양한 춤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며 격려해주었다. 당시 허용순이 선택한 곳은 프랑크푸르트발레단으로, 존 크랭코는 물론 조지 발란신과 윌리엄 포사이드 등 무용수라면 욕심나는 레퍼토리 작품들을 다양하게 갖춘 꿈의 무대였다. 졸업까지는 한 학기가 더 남아 있는 시점이었지만 베소브라소바는 오디션에 응시해볼 가치가 있다며 같은 학년 무용수들과 함께 가보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984년 1월, 오디션에 응시한 무용수들은 총 240여 명이었고 단 세 명뿐이었던 합격자 명단에는 허용순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막 입단한 신인무용수, 그것도 키 작은 아시아 출신 무용수가 크랭코의 <백조의 호수>에서 네 마리 백조와 1막 파드트루아에 캐스팅되어 곧장 무대에 오르는 파격적인 출발이었다.

이후 허용순은 프랑크푸르트발레단, 취리히발레단, 바젤발레단, 뒤셀도르프발레단을 거치는 동안 윌리엄 포사이드, 에곤 메디슨, 우베 숄츠, 하인츠 슈푀얼리, 유리 바모스 등 현대 발레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유명 예술감독들과 일하며 다양하고 풍부한 레퍼토리 작품들을 경험한다. 

존 크랭코의 <백조의 호수>, <지젤>, <로미오와 줄리엣>, 윌리엄 포사이드의 <스텝 텍스트(Step Text)>, <아티팩트(Artifact)>, 우베 숄츠의 <7중주(Septett)>, <라흐마니노프>, <불새>, 하인츠 슈푀얼리의 <아름다운 인생(La Belle Vie)>, <오르페우스>, 한스 반 마넨의 <인 앤 아웃(In and out)>, 조지 발란신의 <바로크 협주곡(Concerto Barocco)>, 유리 바모스의 <스파르타쿠스>, <카르미나 부라나>, <루시도르(Lucidor)>, 닐스 크리스티의 <이너 무브(Inner Move)>, <페트르슈카>… 이처럼 클래식과 컨템포러리를 오가는 그의 폭 넓은 경험은 유럽 무대에서 30년 넘게 전 세계 발레단의 러브콜을 받으며 안무가로 활동할 수 있는 값진 자양분이 되었다.  

개성 강한 안무가들과 무수히 많은 작품들을 해왔지만 그 가운데 그가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작품은 1995년 바젤발레단에서 공연한 마츠 에크의 <카르멘>이다. 마츠 에크에게서 진실되게 춤추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며 그를 주저 없이 인생의 멘토로 꼽는 허용순은 <카르멘>이 자신에게는 인생의 변곡점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인연은 2006년 국립발레단에서 마츠 에크의 <카르멘>을 국내 초연할 때 조안무로 공연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안무가 허용순

국립발레단에서 강수진 예술감독 부임 후 도입한 ‘KNB Movement Series’와 같은 단원 안무가전은 유럽 발레단에서 무용수들이 안무 기회를 받으며 안무가로 성장하는 일반적인 모델이기도 하다. 허용순도 취리히발레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1988년 <키타로허(Kitarohue)>라는 듀엣 작품으로 처음 안무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첫 안무작으로 꼽는 작품은 2001년 뒤셀도르프발레단에서 작업한 <그녀는 노래한다(Elle chante)>이다. 이 작품은 이듬해인 2002년 서울발레시어터에 의해 국내 초연되었고 2005년 슈베린발레단, 2006년 퀸즈랜드발레단에서 공연된 후 2015년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20주년 기념무대에 다시 올려졌다. 

컨템포러리발레단을 표방하는 서울발레시어터와 컨템포러리 안무가 허용순이 만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맞춤한 행보로 보이지만 허용순의 작품을 원하는 곳은 서울발레시어터만이 아니었다. 국립발레단에서는 2006년 허용순 안무의 <백스테이지(Back Stage)>로 아시아퍼시픽발레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유니버설발레단에서는 2008년 당시 유니버설발레단 II에 의해 <천사의 숨결(Breath of an angel)>을, 2011년에는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This is your life)>를, 2019년에는 <완벽하지 않은 완벽함(Imperfectly Perfect)>을 공연하며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2008년에는 ‘허용순과 박호빈의 만남’이라는 타이틀로 현대무용가 박호빈이 이끄는 댄스컴퍼니 까두와 함께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를 공연했고, 2010년에는 발레블랑 창단 30주년 기념무대에 <시간의 흐름(El Susurro del Tiempo)>을 올렸다. 2013년 케이발레월드에서는 <순간(The moment)>이, 2016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는 <콘트라스트(Contrast)>와 <에지 오브 서클(The edge of circle)>이 공연되었다. 2017년에는 광주시립발레단에서 허용순 안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며 서울 관객 위주로 제공되었던 그의 무대를 지역으로 넓히기도 했다. 

컨템포러리 안무가지만 허용순이 안무를 하면서 중요시하는 것은 움직임보다는 스토리텔링이다. 움직임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일 뿐, 작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그가 안무를 하는 주된 동력이 된다. 클래식에서 벗어나 컨템포러리 작업을 하는 안무가들이 스토리를 배제한 순수한 움직임, 움직임과 음악과의 관계 등에 집중하는 경우는 매우 흔한데, 이와는 결이 다른 방향이다. 

이에 대해 허용순은 자신이 무용수로 활동하며 무대에서 펼쳐낸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전달되어 교감을 이룬 경험들이 자신의 안무 바탕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때문에 안무를 할 때도 소재를 멀리서 찾거나 거시적인 주제를 다루기보다 자신의 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누구나 한번쯤 느꼈거나 생각해봤음직한 작고 내밀한 일상 속 이야기로 작품을 풀어간다. 

한 여성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흐름들을 따라간 <그녀는 노래한다>, 미용사였던 어머니를 작품 속 캐릭터로 녹여낸 <디스 이즈 유어 라이프>, 두 커플의 엇갈린 애정을 다룬 <순간(The moment)>, 안무 작업 때문에 여러 나라를 오가느라 공항을 방문하는 일이 잦은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콘트라스트>,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담아낸 <완벽하지 않은 완벽함> 등 그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다. 

해외 무대에 가장 많은 작품을 올린 한국 출신 안무자 허용순은 외국 프로페셔널 세계에서 생존한 독보적 인물이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훌륭한 안무자가 단원들의 최고 기량을 뽑아낸 기념비적 무대다. 광주시립발레단의 예술성도 대중의 호평을 받기에 충분했으니, 희망해온 ‘새로운 도약’을 이미 이뤘다고 생각된다.

 -문애령, <몸> 2017년 5월호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감각적인 선곡, 발레와 현대무용의 조화로운 결합으로 마음에 쉽게 와 닿는 허용순의 작품은 국내 발레계에 여성안무가의 감수성을 불어넣을 활력소가 될 듯하다. 안무 작업을 시도하고 있는 젊은 현대무용수들을 기용함으로써 발레와 현대무용 양쪽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작업이 되는 것도 바람직하다.  

-방희망, <춤웹진> 2016년 6월호

허용순의 해외 진출과 안정적인 정착 그리고 안무가로 활발한 활동은 한국의 무용수와 안무자에게 하나의 워너비(wannabe)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한국 무용계의 확장과 깊이가 전방위로 확대되지 못하는 시점에서 그녀의 잰걸음은 당분간 하나의 바로미터로 작용할 듯하다.

-김호연, <댄스포럼> 2016년 6월호

안무가가 자신의 철학을 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진 여성안무가 허용순은 귀한 존재이다. 발레의 테크닉만으로도 평생 일거리일 수 있으나 그녀는 그것들을 훌쩍훌쩍 해치우고 여성 발레 안무가로써 컨템포러리 발레 안무의 세계적 흐름과 한국발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지현, <춤웹진> 2013년 11월호

‘인간’을 이야기하는 안무가 허용순에게 무용수는 그 무엇보다 각별한 존재다. 원래 안무가가 아니라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발레마스터가 되고 싶었다는 그는 무용수들을 작품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작품을 안무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만들어간다 해도 그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무용수에게 달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무용수에게서 바라는 것 역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수가 안무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고의 작품은 안무가와 무용수가 서로 호흡이 맞을 때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40년 가까이 무용수로, 또 안무가로 유럽 무대에서 활동하며 40편이 넘는 안무작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러한 철학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이야기하는 안무가 허용순의 다음 작품을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허용순, 유니버설발레단, 서울발레시어터, 광주시립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