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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벗어나 몸을 확장하다 - 윤푸름

 

 

윤푸름은 ‘길’ 위에 있는 안무가다. 변명을 미리 하자면,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따라가기 마련이라는, 예술가를 신화화하는 관습적인 문장 안에 그를 가두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치고 윤푸름의 이야기를 복기하는 동안 <길 위의 여자>는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안무가로서의 그의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강렬한 데뷔작의 제목은 윤푸름에게 안무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작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체적으로 움직임을 발생시킨다는 것

 

어릴 때부터 활동적인 성격으로 야외에서 움직이며 노는 것을 즐겼던 그에게 무용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다가왔다. 태권도나 에어로빅 등 몸을 사용하는 분야를 다양하게 경험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리틀엔젤스에 입단하며 한국무용을 시작하게 됐고, 이 선택은 한성대 무용학과에 진학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고 무대와 선배들이 좋아서 시작했지만 무용에 대한 애정 못지않게 정형화된 춤에 자신의 몸을 맞춰야 하는 한국무용의 문법에 대한 저항감도 함께 생겨났다. 

 

그러니 내면 속에서 조금씩 부피를 키워가고 있던 이 저항감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날도 연습실 풍경은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국립무용단의 기본음악이 연습실을 채우고 있었고 윤푸름은 그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달랐던 것, 음악이 한번 시작되면 움직임도 그에 맞춰 음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음악이 끝나기도 전에 자신의 호흡이 끝나버린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닌 음악이 정해놓은 호흡에 맞춰 춤을 추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고 이는 그가 막연하게 품어오던 저항감에 실체를 부여했다. 바로 ‘내가 원하지 않는 춤’이었다. 나의 주체성을 지우고 정해진 틀에 맞추는 춤에 대한 저항감이 무엇이었는지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춤’을 떠난 윤푸름은 먼 길을 돌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에 입학한다. 대학무용계라고 지칭해야 할 한국 무용사회에서 지도해준 교수와 결별하는 것은 여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지만 ‘원하는 춤’에 대한 열망이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춤, 이는 윤푸름이 길 위에서 내디딘 첫 걸음이었다.

 

한예종 창작과에서 윤푸름이 새롭게 마주한 것은 여태까지 ‘춤은 이러하다’ 혹은 ‘작품은 이래야 한다’라고 배운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들이었다. 작품에 기승전결이 없어도, 하이라이트 장면을 넣지 않아도, 춤으로 테크닉을 과시하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춤에 갇히지 않고 주체적으로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작업이 가능했다. 윤푸름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인간으로 주체적인 작동을 했을 때 온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었다.

 

<길 위의 여자>(2012)


<길 위의 여자> 그 화려한 출발

 

2008년 평론가가 뽑은 젊은 안무가전(Critics’ Choice)에 선정된 윤푸름의 안무 데뷔작 <길 위의 여자>는 초연 이후 SCF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2010, 2011), 서울국제공연예술제(2011), 서울아트마켓 팸스초이스(2012) 등에 연이어 초청되며 그를 주목해야 할 젊은 안무가로 빠르게 자리매김시켰다. 국내뿐 아니라 2014년 러시아 한국현대무용주간, 2015년 웨스트페스트 댄스페스티벌, 2015년과 17년 뉴욕 92Y 하크니스댄스시어터, 2016년 상하이댄스페스티벌, 2018년 오스트리아 랑게나헨부르겐 등에 초청되었고 2019년에는 아르코 국제교류협력사업에 선정되어 미국 3개 도시(시애틀, 타코마, 뉴욕) 투어공연을 하는 등 해외에서도 호평 속에 초청 러시가 이어졌다. 

 

 

잔잔한 현악기 연주가 여성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하고 조용히 인내하는 여성성을 살리고 있다. 움직임의 조형성과 감정의 사실적 묘사가 빚어내는 조화도 설득력을 확보한다. 4명 무용수들은 안무가가 서랍 속에서 집요하게 꺼내어놓는 세상에 대한 질문을 하나씩 그려낸다. 안무가는 여성의 존재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물음들을 이번에도 보여주었다. 

- 유인화, 월간 <댄스포럼> 2008년 8월호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여성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삶을 관조하고 있다. 실제의 삶이 결코 화려하지만은 않은 반복적인 사이클 속에 자기만의 희로애락을 갖고 있듯이, <길 위의 여자>는 이러한 삶을 관통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동시에, 대지의 포용력을 가진 여성의 이미지는 부드러움이 상대적인 연약함으로 굴절된 사회 관념에 대한 재고(再考)를 가능케 할 만한 것이다.

 - 심정민, 월간 <춤> 2008년 8월호

 

윤푸름 안무 <길 위의 여자>는 전라의 과감한 시도로 관심을 끌었다. 관객의 시선을 무용수에 집중시키는 관능적 안무로 넓은 무대를 압축해 사용했다. 3명이 옷을 입고, 한 명은 벗은 채 나가고, 3명은 정상적인 자세로 춤을 추고 한 명은 물구나무서서 발을 손 삼아 춤을 추는 등 독특한 차이와 변화의 무브먼트가 신선했다. (중략) 유기적인 동작 속에 관능적 에너지와 경쾌한 유희의 즐거움을 차곡차곡 잘 구축한 작품이었다.  

 -김승현, 월간 <춤> 2008년 8월호

 

객석의 감동적인 박수 속에 끝나고 있던 이 작품은, 정말 평자가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던 뛰어난 현대무용 소품 공연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창의적 안무전개를 이루면서 기품이 살아 있는 에로틱한 움직임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었다. 객석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면서 입체적인 안무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출연자 4명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내고 있던 안무도 인상적이었다.

- 송종건, <송종건의 무용평론> 2011년 10월호 

<존재의 전이>(2012)

 

<길 위의 여자>에 쏟아진 찬사는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젊은 안무가 윤푸름이 입지를 다질 수 있게 힘을 실어주는 한편 ‘과연 페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깊이 사유했는가?’라는 자기검열적 질문과 마주 보게 했다. 이 질문이 자기검열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남성 창작자가 남성의 이야기를 했을 때는 누구도 ‘이런 작품을 만든 당신은 매미니스트입니까?’라거나 ‘당신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남성의 삶과 매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깊이 사유했습니까?’ 같은 질문을 받지 않으며 평론가들 역시 ‘남성의 삶에 대한 고찰과 매미니즘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와 같은 평가를 내리지 않지만 여성 창작자는 이처럼 작품이 아닌 자신의 성정치적 지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해 평가받기 때문이다(참고로 ‘매미니즘’이란 페미니즘을, ‘매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미러링한 인터넷 신조어로, 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된 단어는 아니다).

 

윤푸름은 작품을 만들 당시를 회고하며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사유를 가지고 만든 작품은 아니며 다만 여성인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해 다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노라고 설명했는데, 이 대답은 작품이 초연된 지 13년이 지나도록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스트가 낙인으로 기능하는 사회적 역동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한 ‘다름’ 역시 여성이라는 그의 사회적 위치에서 예민하게 포착된 단면이기에 그의 여성됨과 그가 관찰한 다름은 결국 같은 이야기로 수렴된다. 여성으로 살아온 그의 경험이 다름을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의 언어로 전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 해외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게 적신 이유다.

 

 

<보다>(2019)

버리고 새로 짓기, 과거의 자신에게서 멀어지다

 

<길 위의 여자>에서는 여성의 이야기를, <존재의 전이>(2012)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했던 윤푸름이 자신의 방법론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2015년 국립현대무용단의 안무가 초청프로젝트로 올린 <17cm>를 마무리하고 나서다. 자신의 관점이 특정한 지점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자신이 어떤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같은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 그가 선택한 것은 여태까지 작업해온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익숙한, 그리고 잘해온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가는 것은 이미 지어진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새로 건설하려는 세계가 기존의 세계보다 나으리라 확신할 수 없으며 기존의 세계를 짓는 데 들였던 노력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에 선뜻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윤푸름은 안무가가 고유의 방법론으로 작품을 꾸준히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자신의 경우에는 같은 방법론으로 작품을 계속 만드는 것이 사고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보다>(2017)와 <시간의 형태의 시간>(2020)이 그러한 ‘버리고 새로 짓기’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 작품들이다.

<보다>에 대해 윤푸름은 마치 안무를 처음 하는 사람처럼 공포에 떨려 올린 작품이었다고 회고했다. <보다> 작업 당시의 그가 본격적으로 안무를 시작한 지 10년이 된 중견안무가였다는 걸 떠올리면 의아해지는 발언이지만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도전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음을 시사해준다. 초연에서 옵티컬아트와의 결합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작품은 재연에서는 해당 부분이 사라지고 움직임으로 대체되는 등 공연 횟수가 늘어날수록 다른 작품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방법론만 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도 레퍼토리로 완성된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다> 이후 윤푸름이 내놓은 작업물은 움직임도 무용수도 사라진 채 공간과 공간을 구성하는 장치들,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의 상호작용으로만 이루어진 <시간의 형태의 시간>이다. 여성이라는 자신의 몸에서 시작한 그의 행로가 몸을 버리고, 서사를 버리고, 움직임을 버리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전아트센터라는 커다란 공연장 무대에서 시작한 공간에 대한 탐색은 메리홀 소극장이나 CKL스테이지처럼 점점 작은 무대를 거쳐 플랫폼엘과 같은 안정된 프로시니엄 극장의 형태가 아닌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다. 스스로 멈춰 있다는 생각,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가장 견디기 어렵다는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서 계속해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경신해나가고 있다. 그의 작업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는 데 가깝다. 그 길 위의 걸음은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시간의 형태의 시간>(2020)

다름의 발견, 다름의 공존

<시간의 형태의 시간> 이후 윤푸름의 고민은 ‘협업’에 있다. 창작에서 장르 간의 협업은 더 이상 새로운 주제도 방식도 아니지만 윤푸름이 고민하는 것은 안무가와 무용수들 간의 수평적 협업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이다. 안무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무용수들을 통솔하며 프로젝트를 이끌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닌 무용수들을 개별 인격을 지닌 주체로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인 것이다. 

창작 현장에서 수평적 의사소통과 작업에 대한 고민들은 많지만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는 아직 산발적이고 간헐적으로 들린다. 게다가 매뉴얼화되고 경쟁 치열한 지원시스템 안에는 지난한 토론이 필요한 이 비효율적인 과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으며, 이렇듯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작업의 참여자들이 책임을 나누고자 하는 의도를 안무가의 책임 회피로 치부하는 오해마저 존재한다.

그럼에도 윤푸름은 안무가와 무용수, 그리고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하게 의견을 개진하며 동등하게 힘을 행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컨템포러리 작업이란 대화를 통해 참여자들의 주체성을 각성시키고 비판의식을 드러내며 실험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오류를 수정하며 작업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단히 새로워야 하는 이 피곤하고 지난한 작업의 끝은 결국 우리 안의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이 공존하도록 하는 것에 가 닿는다. 다시 말하면 윤푸름의 작업은 다름의 쉼 없는 발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다름을 발견하고 다름으로 존재하는 그의 걸음은 어디까지 이르게 될까.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윤푸름프로젝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