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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춤의 창작 지평을 확장하는 무용가 - 김남진

 

김남진이란 이름 석 자는 한국 현대무용의 창작적 영역을 확장하는 고유명사처럼 작용하고 있다. 2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춤에 입문해서 세계 최고의 세 드 라 베에 입단해서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와 함께 작업했던 위업은 아무나 이루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2006년 귀국해서는 창작자로서 사회적인 문제나 이슈에 대한 묵직한 탐구나 고민을 담은 창작으로 한국 현대무용계에서 고유한 위치를 구축해왔다. 근 몇 년간은 시민과 함께 하는 축제의 수장으로 역할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기도 했다. 2021년 5월 서초동 한 카페에서 창작자로서 재도약을 준비하는 김남진을 만났다. 

 

 

연극인에서 무용인으로 파격적인 변신

 

1968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남진은 24살 때까지 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접점도 없었다. 대학도 1986년에 경상대 방송연예과로 진학하였다. 동기로는 대배우 송강호가 있고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졸업 후에 부산 소재의 극단 처용에 입단했는데 그곳 연출가가 “부산 말을 쓰면 대배우가 되기 힘들다. 예술적 기질이 남다르니 다른 걸 배워보면 어떻겠느냐. 몸이 유연하니 춤을 배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그 길로 현대무용 학원에 들어가서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학원 선생이 ‘춤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면서 ‘수강료는 안 내도 되니 와서 배우라’고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 무용수가 없어서인지 집중적으로 케어를 받으면서 춤을 배울 수 있었다. 20대 중반이라는 늦어도 너무 늦은 나이에 춤에 입문했지만 김남진의 소질은 남달랐던 것 같다. 더군다나 연극을 했던 경험이 독창적인 표현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만에 이번에는 경성대 무용과로 재입학을 했다. 현대무용 전공의 남정호 교수에게 사사하면서 1학년 때부터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기 시작하였다. 세 작품을 동시에 하기도 했는데 이럴 경우 아침, 점심, 밤에 각각 한 작품씩 들어가서 연습을 했다. 4년 내내 정말 춤만 추면서 전국대학생무용콩쿠르, 신인무용콩쿠르, KBS무용콩쿠르 같은 콩쿠르에 나가서 최고상을 휩쓸기도 하였다. 

 

 

컨템포러리댄스의 본고장 프랑스로

 

대학 4년 내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활동을 하면서도 해외 무용 동향에 대한 갈증은 점점 강해졌다. 소위 말하는 무용계가 잘 확립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어떤 창작을 할까 하는 관심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방학 때면 레슨을 해서 모아둔 돈으로 미국이나 프랑스에 나가서 세계 최고 수준의 무용 현장을 탐방하였다. 미국은 피지컬하고 기교적이어서 그리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창작의 원리나 춤추는 이유 또는 춤의 역사. 철학, 당위성 등을 찾아가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졸업 후 ADF에서 만난 론 브라운(Ron Brown)이 미국에 있는 자기 무용단으로 오라고 했지만, 김남진은 창작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프랑스로 가야 한다는 일념이 강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무용계에 대한 실망과 염증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프랑스행 비행기를 탄 점도 있다. 그때가 1995년이었다. 


프랑스에서 무용 스튜디오를 찾아다니면서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코닌 랑셀(Corinne Lanselle)이라는 안무가가 유심히 보고는 함께 작업을 하자고 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2주밖에 안 되어 말도 안통하는 상태라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경성대 워크숍 때 만났던 자키 타파넬(Jakie Taffanel)이 연락을 해서 자신의 무용단으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자키 타파넬 무용단에도 잠시 몸담았다.

 

1998년 프랑스 국립현대무용단 중 하나인 렌느(Rennes), 일명 C.C.N.R.B.에서 남자 무용수 2명을 뽑는다고 해서 오디션을 통해 입단하였다. 카뜨린 디베레스(Catherine Diverres)라는 안무가가 이끄는 무용단으로서 4년 정도 몸담았다. 프랑스에는 각 지역마다 총 19개의 국립현대무용단이 있다. 그 지역, 더 나아가서 프랑스 무용계를 대표하는 국립현대무용단에 외국인, 그것도 한국인 남자 무용수가 최초로 정식 입단했다는 것 자체가 김남진이 세계적인 무용수로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 드 라 베에서 시디 라르비 세리카위와 함께

 

프랑스에서 여러 안무가에게 선택을 받는 무용수였지만 김남진은 점점 프랑스 무용계의 잘난척하는 문화에 싫증이 났다. 동시에 벨기에 컨템포러리댄스의 리얼리티에 마음이 가게 되었다. 빔 반데키부스나 알랑 플라텔의 작품 스타일이 너무 좋았다. 특히 빔 반데키부스의 공연을 보고는 뜨거워진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센강 길을 따라 밤새도록 립(leap)을 뛰고 다닐 정도였다. 


빔 반데키부스가 이끄는 울티마 베즈의 오디션에 가서 남자 7인에까지 올라갔다. 빔 반데키부스가 마음에는 들어 했는데 한국인 무용수가 컨템포러리댄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던 것 같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무용수 2명을 뽑고는 김남진에게 후보군으로 들어오겠냐고 물었다. 김남진은 후보군으로는 안 가겠다고 거절을 했다고 하니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빔 반데키부스 작품은 부상자가 자주 나와서 후보군이라고 해도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높은 편이다. 그쪽 무용계에서 빔 반데키부스 무용수 3년이면 무릎수술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갈 정도다. 


아무튼 세계 최고의 안무가 중 하나인 빔 반데키부스에게 김남진은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얼마 후 빔 반데키부스가 전화를 해서 자신의 파리 공연을 보러 오라고 했다. 갔더니 바로 옆 좌석에 당시로서는 젊었던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가 있었다. 빔 반데키부스가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에게 김남진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당시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는 알랑 플라텔이 만든 세 드 라 베(Les Ballets C de la B)에 소속된 5명의 안무가 중 하나였는데 <믿음>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사실상 캐스팅이 끝난 상태였지만 빔 반데키부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개별 오디션을 치루게 됐다.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는 하루 종일 따라하기도 시키고 노래도 시키고 연기도 시켰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믿음>에 들어오라고 했다. <믿음>은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그를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유튜브에 떠도는 <믿음> 영상을 보면 젊었을 적의 김남진을 발견할 수 있다. 


김남진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빔 반데키부스나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는 세계 무용의 주류인 컨템포러리댄스를 최일선에서 이끄는 최정상급 안무가들로서 우리나라에도 여러 차례 초청받았다. 특히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는 안무, 음악, 연극, 시사, 장치, 아이디어, 재치 등 컨템포러리댄스 작품에서 필요한 모든 요소를 함양하고 있는 천재 중에 천재다. 현지에서도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무용가’라고 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아무튼 세 드 라 베 무용단에 한국인 최초로 입단해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믿음> 그리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에 출연하였다. 모두 시디 라르비 세르카위의 안무작이다. 

 

귀국 후 창작자로서 자리매김

 

프랑스로 떠날 때는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연로하신 부모님 생각에 2006년 귀국을 하였다. 한국에서 진정으로 프로페셔널한 무용단체를 만들어서 해외 진출을 하고자 하는 포부도 있었다.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무용단을 운영하고 싶어서 처음부터 무용수 페이도 지급하는 등의 실천을 했다. 당시 국내 무용단 대부분이 열정페이로 무용수를 썼던 때라 뭐라고 하는 안무가들도 있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당연한 지불이므로 김남진이 앞서간 셈이 되었다.

 

 
〈The Wall〉(2006)

 

<미친 백조의 호수>(2009)

 

<똥개>(2011)

 

<봄의 제전>(2014)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면서 LIG 극장에서 개관 초청공연으로 발표한 〈The Wall〉(2006)을 비롯하여 〈Brother〉(2008), <기다리는 사람들>(2009), <미친 백조의 호수>(2009), 〈Passivity〉(2010), <똥개>(2011), <봄의 제전>(2014), <씻김>(2016)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중에서도 <봄의 제전>은 대표작으로 명명될 수 있다. 


김남진의 <봄의 제전>은 세월호 침몰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는 진혼제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거기에 한정짓지 않고 한국 사회 더 나아가 현대 사회에 전반에 만연한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압제된 상황에 몰아넣어진 학생들은 이상행동을 보이다가 폭력과 따돌림을 자행한다. 위급한 상황에 몰린 학생들은 가느다란 흰색 끈을 생명줄인 마냥 매달리지만 이내 놓쳐버리고 만다. 응급차나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은 위태로운 우리 사회에 대한 경종처럼 들린다.

 

사각형의 선 안에 갇혀 압제된 영혼은 경련하고 절규하고 너부러진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각종 종교가 난립하기 시작한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가 한 무대에서 각각의 성향을 드러낸다. 오바마 대통령, 엘리자베스 여왕,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등 세계 유명 인사들을 조악하게 코스플레한 무용수들은 유튜브 동영상에서 볼 수 있는 어설픈 몸짓으로 ‘We are the world’를 불러댄다. 그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깨는 것은 전염병, 자연재해, 내전 등을 알리는 긴급방송과 폭발음이다. 특히 재현 당시 갑작스럽고도 치명적이었던 메르스에 대한 긴급방송을 첨가함으로써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리와 동떨어진 사태가 아닌 우리 주변의 상황임을 강조함으로써 말이다. 


이번 재현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물을 채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의 춤이다. 무대 중앙에 낮은 턱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물이 채워지자, 무용수들은 물을 튀기고 헤집으면서 또 물에 미끄러지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용수들이 초연 때 물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채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둔탁하게 움직였던 반면, 올해 재현에서는 훨씬 더 견고한 짜임새를 지닌 안무를 자신 있게 펼쳐 보임으로써 작품력을 끌어올렸다. 신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온몸을 던져 물의 저항을 극복하면서 김남진이 요구하는 안무를 기대 이상으로 실현한 여덟 명의 무용수들에게는 박수를 보내야할 것 같다. 그리하여 초연 때 이루지 못한, 모든 재앙과 아픔을 달래는 춤의 살풀이가 제대로 완성되었다.                                                           

 -<춤> 2015년 7월호 

한국 안무가들은 사회적인 문제나 이슈를 작품화할 때 탐구나 고민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반면 김남진은 이러한 소재나 주제를 가진 창작에서 남다른 강점을 지니는데 <봄의 제전>이 그 정점에 선 작품이다. 

 

 

창작할 때 고려하는 3요소

 

김남진은 우리나라 무용 창작의 영역을 확장하는 무용가 중 하나다. 이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창작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그는 “항상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한다. 공감대가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회가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춤에 담고 싶다”고 하면서 자신의 작품에서 이를 실현하고 있다. 그가 창작을 할 때 주요하게 고려하는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재미가 있어야 한다. 둘째 놀라움이 있어야 한다. 셋째 (감동과 같은) 무언가 하나씩 가지고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공연예술로서의 춤 공연에서는 당연한 요소지만 최근 젊은 무용가들이 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연예술로서의 춤은 언제나 관객과의 상호 소통을 통해 발전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국내 무용가들 사이에서는 지원금만 의식한 채 일반 관객에 대한 고려 없이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창작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무용가들에게 창작의 본질에 대한 김남진의 의식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Line〉(2021)

 

시민과 함께 하는 축제를 이끌다

 

최근 몇 년간 김남진의 창작활동이 뜸해진 듯한 느낌은 그가 주로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2017년 부산거리예술축제에서 예술감독, 2019년 영도다리축제에서 총감독, 2020년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예술감독을 맡게 되어서 시민과 함께 소통하는 축제를 운영하느라 각 지역에 머무르곤 했다. 행정적인 업무가 쉽진 않지만 시민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예술표현의 장을 기획한다는 점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호응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은 뜻 깊었다. 다만,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사업 운영과 일정 자체에 많은 차질이 생겨 축제를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김남진은 앞으로 굵직한 창작 작품으로 재도약의 날개를 펼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안무가로서 가장 높은 인지도와 기대를 안고 있는지라 그의 신작을 기대하는 관객이 적지 않을 듯하다. 김남진의 경쟁자는 전성기의 김남진이다. 또 한 번의 전성기를 알리는 작품이 발표되기를 바란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댄스시어터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