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댄스포스트코리아에서는 춤작가라 함은 주로 창작작업을 활발하게 하는 안무가를 다뤄왔다. 그러나 한국춤의 정신을 고수하면서 창작보다는 민족적 정서와 사회참여적인 춤으로 무용계에 기여하는 측면에서 춤작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무용가가 있다. 서정숙이 그러하다. 그녀는 외우내강형(外柔內剛形) 인물로 조용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며 춤뿐만 아니라 사회와 소통해왔다. 또한 소외된 이들과 함께 동행하기 위해 민족춤 계열의 춤을 꾸준히 고수해왔다. 가녀린 외모와 다소곳한 태도에 감춰진 그녀의 춤을 향한 열정과 사회에 대한 정의감의 발현이 더욱 강렬한 이유이다. 다변화된 현대춤 중에서 주목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꼭 우리 춤의 한 부분을 채워줘야 하는 것이 민족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그녀는 50대 중반에 이른 지금 허리세대로서 든든한 중심을 잡고 있으며 2020년 (사)민족춤협회 회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후세에게 새로운 무용계의 미래를 열어주고자 노력하는 모습에 기대를 걸어본다.
<누월>(안무 김지영, 춤 서정숙) ⓒ옥상훈
소리와 춤에 이끌려 시작한 무용
전북 고창 출신인 서정숙은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7살 때 교육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부모님을 따라 이태원에 터를 잡았다. 평범한 아이였으나 초등학교 3학년 때 귀가 길에 어딘가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를 따라 갔고, 그곳에서 국악 하는 분들의 춤과 소리에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집에 오지 않는 아이를 찾아다녔고 마침내 그 장소에서 구경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이후 무용학원 다니는 친구에게 물어 안춘자 무용학원을 찾아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했다. 정규수업으로 전교생이 무용을 배웠던 보성여중에 입학하고 나서는 세종대 무용과 출신의 체육선생님이 만든 무용반에서 무용을 계속했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학교에서 무용을 하며 콩클도 나가고 상도 받았다.
선생님의 선화예고 추천으로 그곳과 관련된 학원을 다니며 긴 준비 없이 선화예고에 입학했다. 학원 다닐 당시 어머니는 경제적 이유로 춤을 반대했지만 한달 동안의 시위 끝에 아버지의 승낙 하에 무용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선화예고를 다니지 않았다면 무용을 하지 않았을거라 회고했다. 선화예고에서는 오은희, 문선희, 황희연 선생에게 한국무용을 배웠고 부전공은 조은미, 최민화 선생에게 배웠다. 세종대에 정재만 선생이 계실 때 86학번으로 입학했고, 86 아시안게임 폐막식에서 바라춤도 추었다. 그러나 대학교 2학년때 정재만 선생은 숙대로 가셨고, 4학년때 양선희 교수가 오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 공백기간에 한영숙 선생이 강사로 오셔서 승무와 살풀이를 배웠다.
불합리한 세상에 눈뜨다
대학교 2학년때 친구가 탈춤 출 수 있는 사람을 구했고, 선화예고 당시 배운 것이 다였지만 그 기회로 면목야학에서 봉산탈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당시 면목동에는 공장을 다니며 배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야학이 여러개 있었는데, 낮에는 어린이집에서 밤에는 적십자에서 후원하는 야학에서 탈춤을 가르쳤다. 부족한 실력을 채우기 위해 따로 전수회관에 가서 봉산탈춤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힘든 사람들을 보고 불평등하고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당시 학내 족벌체제 문제, 독재 타도라는 시대적 분위기로 운동권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대학 재학 시절은 한국사에서 민주화 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고, 이에 열심히 동참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고민으로 조흥동 선생에게 살풀이를 받으며 무용단 시험을 준비했고 서울예술단 시험도 봤으나 실패했다. 그때 한겨레 신문에 조기숙 선생의 ‘춤패’ 인터뷰가 난 것을 보았다. 전혀 모르던 그녀에게 무작정 전화해서 찾아갔고, 만남 후에 ‘춤패 디딤’ 활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당시 김명곤, 박인배, 김경란, 정희섭, 박철민, 문호근 등 대단한 인물들을 만나 문화운동을 했다. 노래패, 춤패, 연극패 등이 모인 집체극을 할 때 문호근 선생님 연출로 같이 할 기회도 가졌다. 서정숙은 현대중공업, 울산중공업 등의 집회현장과 노동자 궐기대회, 데모, 시위, 장례식장에서 춤췄고 이와 같이 사회, 노동자 문제, 불평등의 주제를 갖고 2-3년간 열심히 활동했다. ‘춤패 디딤’ 소속으로서의 20대 중후반은 짧았으나 정의감에 가득찬 시기였다. ‘춤패 디딤’은 조기숙 선생이 대표로 있었지만 주축은 서정숙을 포함해 이중덕, 정금희, 강아림, 강승희, 최인혜 등 6~7명이었다. 이들은 주먹춤, 투쟁춤을 추면서 공동안무로 활동했다.
<쌍승무>(서정숙, 이상연)
민족춤 활동의 시작
서정숙은 ‘춤패 디딤’이 끝나고 인연을 맺은 김채현 선생과 같이 민족춤제전의 실무를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 당시 민예총 관련 인물들을 알게 되었고 민죽춤위원회에서는 김채현 선생과 5년 정도 활동했다. 민족춤 관련 활동이 민예총과 더불어 사라졌다가 장순향 선생이 세월호 터지고 나서 광화문 텐트가 생기고 박근혜 탄핵 당시 광장에서 춤추고 연극 등도 하면서 되살아났다. 장순향 선생은 무용인들도 조직적 활동을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2016년에 (사)한국민족춤협회를 창립했다. 그녀는 사회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인물로, 세월호 시위에서 만났다. 용산 재계발 참사 추모제를 할 때 송경동 시인과 장순향의 만남에서 춤을 추었던 인연으로 민족춤협회를 창립 시기에 초창기 멤버로 일했다.
서정숙은 장순향 선생이 진해문화센터 본부장으로 가면서 겸직이 안되는 문제로 급하게 이사장직이라는 직함을 맡게 되었다. 3년 임기로, 한국민족춤협회 창립 때 춤을 전공한 사람들은 별로 없고 풍물, 마당굿, 탈춤 추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이사장은 춤추는 사람이 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작년 이사장직을 맡은 것이다. 앞으로 서정숙의 한국민족춤협회에서의 계획은 현재 운동권과 제도권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한국민족춤협회가 새로운 무용계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같이 졸업 후 무용할 기회가 없는, 변화없는 환경과 상황들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젊은춤축전도 공모해서 무대, 기획, 영상, 사진까지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기회를 마련하자는 의도를 가졌다. 또한 경연은 동기유발을 위해 상금도 주는 등 젊은이들의 축제, 춤판이라는 춤 환경을 협회에서 마련해줄 생각이다 올해 5회를 맞았는데, 작년까지 정부 지원금 전혀 없이 5일간의 공연을 치뤘다. 텀블벅 진행, 주위의 도움, 협회 이사분들의 십시일반으로 진행이 가능했다.
백기완 선생 영결식에서의 서정숙 ⓒ장성하
전통춤과 창작으로의 귀환
민족춤 활동 당시 노래패, 연극패 뒤에서 공연하다보니 더 춤추고 싶고, 전문성 있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춤패에서 춤으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과 이끌어주는 사람의 부재로 지쳐갔다. 사상적으로는 넓혀졌으나 춤으로서는 충족이 안되면서 자연스럽게 디딤은 해체되었다. 이후 조기숙 선생의 학원에서 강사로 지내다가 동문인 손인영 선생을 만난다. 당시는 손인영 선생의 뉴욕 유학시절로, 그곳에서 프로젝트를 따서 강강수월래를 투어하며 가르치던 시기였다. 한국에서 전공생들 6~7명과 연주하는 인물들까지 15명 정도가 미국 동부지역을 다니며 한달 정도 공연도 했다. 매니저로 장광렬 선생이 함께 했고 손인영 선생와의 인연으로 창작작업을 처음 하게 되었다. 결국 정식으로 춤교육을 받고 제대로 무대에서 공연한 것은 손인영 선생과 함께였다.
김경란 선생님과의 만남은 29~30세 쯤이었고 춤패 디딤 활동을 할때였다. 선생은 문화운동의 핵심 멤버여서 그녀를 선배라 불렀다. 춤패 디딤을 나오면서 멀어졌다가 ‘춤패 불림’의 이은영 선배가 김경란 선생의 춤을 함께 배울 것을 제안했다. 당시 손경순 선생의 예전무용단에서 김경란 선생이 지도한 교방굿거리 춤을 보고 이은영 선배와 같이 배우게 되면서 김경란 선배가 선생님이 되었다. 선생님으로 모시고 전통을 배웠는데, 창작의 미련은 버리지 못했다. 몇 번 창작을 시도했지만 창작 공부와 경험의 부재로 창작은 넘기 힘든 벽이었다. 김경란 선생을 만나면서 창작에 쏠렸던 마음이 전통쪽으로 기울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예종 전통원이 생기면서 전문사무용과 1기를 뽑을 때 02학번으로 입학했다. 이때 매학기 실기시험을 학교 극장에서 공연으로 보면서 실력도 늘었고, 연극원 수업에 들어가 안무도 해주고 연극과와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누월>(안무 김지영, 춤 서정숙) ⓒ옥상훈
춤꾼으로서의 활동
서정숙은 주로 연극, 마당극, 풍물, 국악 공연의 안무를 다수 했다. 자신의 공연활동으로는 김채현 선생의 추천으로 공연을 갖기도 했고, 대학원 시절 양성옥 선생의 추천으로 바리바리촘촘디딤새에 출연해 전통을 가지고 창작했던 <꿈, 태평성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2004년에는 평론가가 뽑은 제7회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에서 <미얄> 작품을 공연했다. 역사 속의 가장 평범한 여성 미얄을 통해 오늘날 우리의 아픔과 웃음, 눈물을 얘기하고자 했다. 또한 미얄을 통해 시공을 넘어 오늘에 이르는 기쁜 숨가쁨을 함께 느껴보고자 했다. 불교제전 행사로 해남에서 했던 공연에서는 <기억의 시가>를 선보였는데, 홀춤을 쌍승무로 재구성했으며 승무를 가지고 세월호 문제를 다뤘다. 천도제를 지낼 때 승무를 춘 것으로 서울교방의 이상연과 함께 했다. 2013년에는 남산국악당에서 했던 마당극 <허생전>의 안무를 했고 2017년에는 인천 동막대동제에서 <동막굿! 춤추다>를 안무하기도 했다. 서정숙이 춤추는 레퍼토리는 장금도, 조갑녀 선생의 민살풀이와 김수악 선생의 교방굿거리, 조갑녀 선생의 승무, 김경란 선생의 검무, 박재희 선생에게서 배운 태평무 등이다. 이처럼 레퍼토리는 전통에 기반을 두지만 주제와 춤은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고 외연을 확장시켰다.
스승의 가르침
그녀는 앞서 언급했듯이 선화예고에서는 오은희, 문선희, 황희연 선생에게, 세종대에서는 정재만, 한영숙 선생에게서 춤을 배웠다. 학교 졸업 후 전통을 보는 눈이 생겼고 김경란 선생은 춤의 안목 등을 곁에서 보고 배우며 지금까지 20년 넘게 함께 한 유일하고 진정한 스승이다. 김경란 선생은 김수악 선생에게서 배웠고, 서정숙은 김경란 선생을 통해서 무대화되기 이전의 조갑녀, 장금도 춤을 배웠다. 이후 서울교방에서 이분들의 춤을 배우는데 교방의 30~40명 선택된 몇 명에 속했다. 특히 장금도 춤을 배우러 갈때는 김경란 선생과 서정숙만 배우러 가기도 했다. 현재 추는 두 선생님들의 춤은 그 춤을 김경란 선생이 정리해서 서울교방의 춤으로 완성한 것이다. 즉, 원형보다는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추는 조갑녀제 김경란류, 장금도제 김경란류의 춤이라 할 수 있다.
서정숙에게 김경란 선생은 춤을 바라보는 춤의 철학, 세계관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춤을 통해 보여주는 활동이 아니라 자유를 주었다. 또한 다양한 미학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주었다. 여성성을 강조하지 않고 기능을 중요시하기보다는 마음을 중요시한다. 이밖에도 한국춤은 마음으로 추며 나를 들여다보고자 하고 진정성과 솔직한 자신이 더해진 것임을 얘기했다. 한국무용에는 반계(45도로 시선을 내려서 보는 것)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정면으로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며 왜 춤을 추는지, 어떤 춤을 추고 싶은지 생각하게 한다. 이처럼 김경란 선생은 각자의 춤을 인정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춤추지 않지만 소통하는 춤은 중요시 한다. 즉,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창작해서 동시대로 살리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춤이란 전승과 보존에 있지 않고 여기에 더해 창작하는 작업까지 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녀는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오롯이 이어가고 있었다.
동시대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춤을 꿈꾸다
서정숙은 선운재라는 개인공간을 가지고 있다. 연습실이 필요해서 혹은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곳으로 고향인 고창에 선운리라는 동네 이름을 따서 지었다. 이 이름의 공간을 가진 것은 8년 정도 되었다. 서정숙의 아버지는 딸이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아버지 생가를 전수관으로 만들어주고 싶어하셨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기에 나중에는 그곳에 선운재라는 이름의 공간을 마련해 전수 및 공연을 하며 살고 싶어하기도 했다.
서정숙이 꿈꾸는 춤이란 시대와 함께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동시대 사람들의 아픔, 고통, 장소, 주제와 동행 해왔다. 그것이 그녀를 광화문 촛불 시위나 세월호 시위 현장에 있게 한 것이다. 또한 춤추는 사람들도 정치와 별개일 수 없고 정치적 노선은 아니지만 대통령, 시장은 중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서정숙이 생각하는 춤꾼이란 사회와 주변을 등한시하고 춤만 춰서는 안되며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책, 행정을 하는 인물도 많이 나와야 함을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을 춤추는 사람 혹은 춤꾼이라고 소개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잘하고 좋아하는 춤을 추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행한다.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고단한 삶의 현장에 동참하며 행동하는 춤꾼으로서의 서정숙은 누구보다 강인하다.
글_ 장지원(무용평론가)
사진제공_ 서정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