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안무가 이나현이 창단한 유빈댄스(UIBIN Dance)는 한자와 영어를 합성해 만든 조어다. 각각 있을 ‘유(有)’와 빛날 ‘빈(彬)’을 사용하는 ‘유빈’의 뜻을 풀이하면 ‘빛이 있다’가 된다. 이나현은 이렇게 단체명을 짓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채로 존재하는 것(힘)이 있으며, 우리가 보는 것 역시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결국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빛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데 도달했다. 빛이 어떻게 비추느냐에 따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기존에 눈에 익었던 것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대상을 어떻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는 결국 빛에 의해 좌우된다는 뜻으로, 움직임을 언어화하는 안무 과정 역시 빛을 어떻게 비추어 대상의 무엇을 혹은 어떻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와 닿아 있음을 생각한다면 매우 의미 있는 작명이라 할 수 있다.
태릉을 떠난 리듬체조 선수
이나현과 무용의 만남은 리듬체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로 태릉선수촌이 훈련지였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훈련차 LA에 갔다가 발레와 재즈댄스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그를 가르친 강사들 중에는 유명 팝 가수의 백댄서도 있었는데, 대회 참가를 위한 안무에만 익숙해 있던 그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나현은 리듬체조 선수로 활동하다 은퇴하고 나면 지도자가 되는, 당연한 미래로만 여겼던 인생 경로에 회의를 느끼고 체조를 그만두게 된다. (이 결심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리듬체조 국가대표 선수로 신수지와 손연재 이전에 이나현이라는 이름을 먼저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체육학과 지원에서 무난한 합격이 예상되었던 이나현이 돌연 전공을 바꾸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모두 반대했다. 어머니는 일반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뒤 공부에 전념하고 있던 그에게 무용을 권유했다. 그는 미국 훈련에서 재즈댄스의 매력에 빠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세 가지 무용 전공 중에서 재즈댄스에 가장 근접한 현대무용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어려서부터 리듬체조를 전공하며 선수 생활을 해온 그였기에 기초 체력이 갖춰져 있고 근력이나 유연성이 뛰어나 무용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리듬체조를 하며 습관이 된, 몸을 사용하는 방식을 모두 바꿔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선수로 활동할 때도 발레 레슨을 받기는 했지만 똑같은 동작을 하더라도 발레와 리듬체조는 호흡이나 액센트가 전혀 달랐는데, 이렇게 같은 동작을 하면서도 몸에 밴 습관을 버리고 움직이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었다.
리듬체조에서 현대무용으로 전향하며 초반에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이나현이 창작이 자신의 몸에 잘 맞는 옷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듬체조가 예술성을 필요로 하는 종목이긴 하나 퍼포먼스에 대해 점수가 매겨지고 그 점수로 동료 선수들과 경쟁하며 순위를 다투는, 결국 스포츠 고유의 속성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기에 이나현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무대로 옮길 수 있는 창작에서 커다란 매력을 느꼈다.
〈Below the Surface〉(2003)
이론 공부를 좀 더 깊이 파고들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가 있는 만큼, 이나현은 실기에 먼저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안무를 시작했다. 동문무용단에 들어가 무대 경험을 쌓으면서 안무 기회를 잡는 일반적인 경로보다 빠른 출발이었다. 1997년 이나현이 젊은안무자 창작공연 무대에서 첫 안무작인 <인간병동>을 선보였을 때 함께 작품을 올린 선생님뻘 안무자들은 그에게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며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안무가로서의 이른 출발은 그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무용수들에게 안무 지도를 하며 함께 작업을 하기에는 자신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후 6년간 이나현은 안무가로 작품을 만들기보다 무용수로서의 활동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2년 정도 국내 무대에서 활동한 그는 1999년 유럽으로 무대를 옮기게 되는데, EBS에서 방영 예정이던 피나 바우시와 윌리엄 포사이드를 소개하는 BBC 다큐멘터리 번역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바우시와 포사이드라는 거장 안무가와의 만남이 그만큼 강렬한 영감이 되어준 것이다.
이나현의 유럽 활동은 네덜란드를 거쳐 오스트리아 린츠주립무용단, 스위스 벤투라무용단, 독일 자르부르켄무용단 등으로 이어졌고, 그 기간 동안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나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에 초청되며 국내 관객들과도 꾸준한 만남을 이어갔다.
표면 아래에서 움직임을 탐구하다
첫 안무작은 앞서 언급한 젊은안무자 창작공연 참가작 <인간병동>이지만 이나현 본인은 자신의 안무세계가 시작된 작품으로 독일에서 만든 솔로작 〈Below the Surface〉를 꼽는다. 이 작품은 2003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솔로탄츠페스티벌에서 초연되어 최우수 무용가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을 통해 국내 관객들 앞에서도 첫 선을 보였다. 2004년에는 스위스 로잔 시테페스티벌(Festival de la Cité)에 초청되었고, 2005년에는 ‘A State of Wonder’라는 제목의 기획공연으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보이지 않는>, <흔적>과 함께 트리플빌로, 또 동아무용콩쿠르 무용스타 초청 갈라 공연의 일부로도 공연되었다. 2008년에는 뉴욕 APAP 기간 중 재팬 소사이어티 초청으로 〈Below the Surface〉 쇼케이스 무대가 진행되어 뉴욕은 물론 전 세계 공연 기획자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나현의 화두는 움직임의 차별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였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던 그는 체격 조건이 좋은 유럽 무용수들 사이에서 묻히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움직임을 크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었고, 무리하게 움직이다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유럽 생활에서 아쉬웠던 점으로 NDT 등 현대무용수들에게 선망의 무대인 무용단과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을 꼽았다. 자주 있는 것도 아닌 오디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상 중이라 응시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안무로 관심을 돌리면서부터는 반대로 무용수로 추구해왔던 움직임에서 벗어나 다른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춤추지 않는 춤, 그러나 춤추지 않는 것이 결국 춤이 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Below the Surface〉는 여태껏 그가 추어온 춤의 익숙한 리듬에서 벗어나 겉으로 보이는 근육이 아닌 몸 속 깊은 곳에 있는 뼈나 내장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다.
<흔적>(2005)
〈Below the Surface〉라는 움직임 탐구를 출발점으로 삼고 이나현은 1인무에서 2인무로, 2인무에서 3인무로, 다시 4인무로, 그다음은 군무로, 조금씩 인원을 늘려가며 확장된 무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떤 특정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메시지를 다듬거나 움직임을 통해 서사를 전개해가는 것보다 서로 다른 두 개의(혹은 그 이상의) 몸이 만났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가 그에게는 훨씬 더 흥미로운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2인무인 <흔적>(2005)과 <여름>(2006), 2인무를 중심으로 6인무를 구성한 <둘만의 고독>(2006), 3인무인 <소녀와 죽음>(2007)과 <겨울>(2008) 등이다.
이나현이 움직임을 만드는 방식은 함께 무대에 오르는 무용수들이 같은 동작을 하며 합을 맞추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몸이 서로 접촉하고 연결되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무용수가 한 명 더 추가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 변화를 의미한다. 작품에 한 명이 더 들어갔을 때 몸의 감각이 한층 더 열려야 할 뿐 아니라 접촉이나 연결에서 비롯되는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변수들을 몸이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 한다.
첫 3인무 작품이었던 <소녀와 죽음>은 원래 이나현이 캐스팅한 세 명의 무용수들로 작업을 시작했으나 움직임과 방향과 힘의 조율 등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느낀 끝에 무용수 한 명이 하차하고 그가 직접 출연하는 것으로 콘셉트가 바뀌었다. 하차 원인이 무용수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었기에 이나현으로서는 그 무용수에게 두고두고 미안함을 느끼는 한편 작품에서 무용수 한 명의 역할과 움직임 범위가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그가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이유
이나현의 <표면 아래(Below the Surface)>는 독특한 춤 언어와 조명,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나현은 빠르고 직선적이며, 날카로운 춤사위로 표현하면서도 묵직하게 균형을 잡아낸다. 정(靜)과 동(動), 강(强)과 약(弱)이 좋은 균형을 만들어냈다. 착시의 효과를 이용해 서서히 표면 아래로 침잠, 의식의 내면으로 잦아 들어가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 김승현, <춤> 2003년 8월호
Fellow Korean Yong-In Lee convinced the panel of judges with her mastery of her body, her presence, diversity, and intensity. She walked away as the competition’s first prize dancer in her own choreography, Below the Surface. I agree with them, but what I remember most is her aestheticism and the amazing suppleness ? though the theatre is small, you actually couldn’t hear her move. To me, in a sense, she’s really the antithesis of her precursor.
- <댄스 유럽> 2004년 5월호
깨끗하면서도 예리한 선을 담고 있는 이나현의 춤과 섬세한 동작적 밀도를 담고 있는 이영일의 춤이 서로 다른 미감의 대비와 어울림을 보여준다. 청량한 선이 돋우러지는 춤의 향연 속에서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이나현의 집중력이 돋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 심정민, <춤> 2006년 5월호
날렵하고 투명한 이나현의 춤들은 집중력의 천착으로 이뤄진 고밀도 동작들을 유발했다. 움직임의 본질적인 의미에 다가가기 위한 몸의 폭발력은 무용수들의 신체를 통해 최대용량으로 분출됐다. 근육의 다양한 움직임과 날카롭고도 정교한 근육의 쓰임새는 이나현이 보여주는 발레테크닉과 합세돼 배가된 춤 효과를 주었다. 안무가의 창조적 욕구를 철저히 발레적인 발 움직임에 담아, 몸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발 자체에서 파생되도록 유도했다.
- 유인화, <춤> 2006년 6월호
이나현은 정형적인 느낌 속에 기발하게 유연한 동작들을 산발적으로 던져 넣는 전문적이며 독특한 춤 언어를 구사한다. 본인이 직접 춤을 잘 추기도 하지만 자신의 춤 구조를 다른 무용가들에게 성공적으로 이입시키는 재주도 빼어나다. 깨끗하고 원초적이며 숨김없는 몸의 건강함이 가장 큰 장점이며, 몸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몸 자체를 만들어 낸 것처럼 보인다. 섬세한 포인트, 발레의 정형적 안정감과 테크노댄스의 파괴적 자유로움을 넘나드는 존재하는 몸의 향연이다.
- 문애령, <몸> 2006년 6월호
*비평문 원문에는 개명 전 이름인 ‘이용인’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본고에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이름인 ‘이나현’으로 통일하였다.
이나현을 향한 위와 같은 평단의 상찬들은 순수한 움직임에 포커스를 두어 완성한 신선하고 독특한 안무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대표작이 된 작품은 이 같은 움직임 위주의 작품들이 아닌 렉처 퍼포먼스 <안무노트> 시리즈다. 작품에 대해 말로 설명하거나 인터뷰를 하거나 심지어 공연 팸플릿에 작품 콘셉트나 안무 의도 같은 것을 쓰는 것도 싫어했던 이나현이기에 렉처 공연을 대표작으로 삼게 된 이 같은 변화가 자신도 놀랍다고 했다.
<시선의 온도>(2017) ⓒ배상현
2010년 다원예술축제인 페스티벌봄의 초청으로 서강대 철학과 서동욱 교수와 협업한 <어떤 모순-신체연구>를 통해 렉처 작업을 진행하며 이나현은 움직임으로만 구성된 공연이 아닌, 그렇다고 대사 등 연극적 요소를 차용하는 것도 아닌 설명이 작품 내부에 개입하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된다. 이후 2016년 국립현대무용단 기획공연 <춤이 말하다>에 참여해 다시 한번 렉처 퍼포먼스로 관객들과 만난 그는 춤이 아닌 말하기에 관심을 갖는 관객들의 반응에 흥미를 느꼈다.
이처럼 안무가의 말하기에 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나현은 현대무용을 어렵고 지루하게 느끼는 관객들이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으며 자신들이 본 것과 안무가의 의도가 일치하는지 여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느라 정작 춤을 못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진단이었다.
<맥베스>(2018) ⓒ배상현
2018년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재개관 페스타에서 <안무노트> 시리즈의 첫 번째 공연을 올린 이나현은 이후 매년 주제를 바꿔가며 관객들과 안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9년에는 첫 번째 공연과 맥이 통하면서도 구성을 달리한 안무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해에는 즉흥에 대한 이야기를, 올해는 신작을 준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관객들과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좀 더 유연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그가 <안무노트>에 집중하느라 움직임 탐구를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올해 7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된 〈16〉은 이나현이 몇 년간 <맥베스>(2016), <시선의 온도>(2017), 〈Hidden Dimension〉(2019) 등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유명 문학작품이나 사회적 이슈를 우회로로 삼았던 시도에서 벗어나 다시 본연의 움직임으로 돌아온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안무노트>를 하며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본 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신의 움직임 논리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제목도 16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오르기에 〈16〉이라고 단순하게 지었다. 16명의 무용수들이 10개의 움직임을 연결시키고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는 과정이 전개되는, 움직임으로 시작해 움직임으로 끝나는 작품이다.
<안무노트>(2019)
〈16〉 이후에도 그의 안무노트는 새로운 작품들로 계속 채워지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서울발레시어터에서 안무 의뢰를 받은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앞두고 있고, 연말에는 전북대에서 그의 지도를 받는 학생들과의 작업도 예정되어 있다.
매번 하나의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더 이상 못 하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새로운 작품 준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이나현, 연습실에 있는 순간이 가장 재미있고 행복하다는 그는 혹시라도 작품을 만드는 것이 본인 한 사람만 좋자고 하는 것은 아닌가,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반성이 들기도 한다고. 움직임에 천착하는 자신의 안무 스타일이 대중 관객과 접점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렇기에 더더욱 관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안무 작업이지만 그것이 혼자만의 만족으로 끝나지 않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관객들과 오래도록 만나고자 하는 것, 안무가로서의 많은 고민 속에 내어놓은 그의 바람에는 매우 단순한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빈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