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화는 한국무용이 창작 춤으로 정점을 향해 변화하고 있던 1985년 경성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했다. 85년은 최은희 교수가 부산 최초의 한국무용 동문단체 ‘춤패 배김새’(이하 배김새)를 창단한 해이다. 하연화에게 배김새는 선택이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한 배김새와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배김새 36년 역사 중 16년을 대표를 맡았고, 대표직을 놓은 후 상임안무와 예술감독으로 배김새와 함께했다. 부산 춤 현장에서 하연화와 배김새는 등호 관계이다.
하연화의 첫 춤 경험은 초등학교 운동회 매스게임 때 부채춤을 배우면서다. 그때의 경이로움과 황홀감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무용을 배우겠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춤을 다시 만났다. 여전히 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했던 상황에서 학교 무용부는 문제를 해결해 줄 탈출구였다. 당시 고등학교 무용부는 지금과 달랐다. 수시로 열리는 무용대회 때면, 단축 수업을 하고 춤만 추었다고 한다. 상도 많이 탔고, 춤에 몰두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경성대학교에서 청소년 예능 교실을 열었는데, 엄옥자, 최은희, 남정호, 정은애 같은 교수들이 학생을 가르치는 구조였다. 하연화는 이곳에서 그를 눈여겨본 최은희 교수를 만나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대학 시절 한국무용제전, 민족춤제전 등 큰 무대를 경험했고, 때마침 경성대가 동래고무 전수학교로 지정된 덕분에 동래고무 이수자가 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배김새를 이끌었다. 배김새는 시대 상황을 주제로 다루고, 사회문제가 발생한 현장에서 춤추었다. 배김새의 이런 활동은 지도교수인 최은희 교수와 채희완 교수의 영향이 컸다. 채희완 교수가 주장한 우리 춤의 정신과 춤의 사회적 역할은 최은희 교수를 통해 영향을 주었다. 매년 부산역에서 열리는 세월호 희생자 추모제에 하연화는 배김새와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배김새는 부산시립무용단이 맡았던 조선통신사 축제에서의 역할을 맡을 정도로 부산 춤판에서 입지가 탄탄하다.
하연화의 예술적 행보는 배김새 역사와 평행선을 이룬다. 배김새의 사회 참여적 춤 활동이 고스란히 하연화 개인에게 이식되었지만, 개인적인 자각의 계기는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평화의 뱃길’에 참여하면서다. 하연화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춤꾼을 모아 평화의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 후쿠오카, 상하이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는 10일간의 여정에 동참했다. 그곳에서 풍물패, 음악가, 미술가, 문인 등 다른 장르 예술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꼭 배김새를 통하지 않더라도 더 많은 사람과 춤과 마음으로 교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평화의 뱃길 이후 하연화의 활동은 봇물 터지듯 활발해진다. 지금도 이어지는 팽목항 걷기, 부산 초량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을 위한 춤, 탄핵 촛불집회 광장 등 부산 지역에서 벌어지는 역사, 노동, 환경 분야의 집회 현장에 그의 춤이 빠지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춤꾼 하연화는 천천히 존재를 알리는 작품을 내놓았다. 1998년부터 창무회 주최로 매년 열리는 ‘내일을 여는 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이 어우러지는 공연으로 김천흥·국수호·정재만·최현·박병천·김진걸·김매자·배정혜·김영실 등 원로·중견이 참여해 권위를 인정받는 행사이다. 하연화는 2002년 창작 춤 <향(香)>, 2013년 <적멸>(하연화, 한수정, 최은희)로 참가했다. 2017년 제23회 창무 국제공연예술제에 올린 <처우>는 티베트 음악에 탈춤을 접목한 작품으로 그가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는다. <처우>는 산자의 시선, 죽은 자의 시선 등 세상을 보는 여러 시선을 표현한 작품이다. 허리춤에 방상씨탈을 매고 끝에 꽃이 달린 굽은 나뭇가지를 든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데, 나뭇가지를 세상을 가르는 ‘꽃칼’이라 이름 지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꽃과 날카롭고 섬뜩한 칼이 결합한 ‘꽃칼’은 연약해 보이는 자신이 아름다운 춤으로 세상의 모순과 슬픔을 자르듯 어루만진다는 의미다.
이런 춤 활동 이면에는 전통춤이 깔려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이수자,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 굿거리춤 전수자는 그의 전통춤 이력이다. ‘전통춤이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다. ‘전통춤은 내 춤을 단단하게 해 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춤이 ‘단단해진다’라는 의미는 ‘꽃칼’과 통한다. 부드러움 속에 견고하고 날카로운 심지가 도사리고 있는 상태, 춤으로 세상의 모순을 베는 굽은 나뭇가지 끝에 핀 꽃의 힘이다. 허투루 흔들리지 않는 우리 춤의 멋과 정신은 <처우>, <나비 날다>, <푸른 눈물> 그리고 <발등 우에 하늘을 두고 배기다>, <각시(覺時-불현듯 알아차리다)>와 같은 창작 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한다. 하연화 안무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전통춤이 깊어질수록 창작 춤이 견고해지는 느낌을 확인 할 수 있다.
여전히 무대와 무대 밖을 부지런히 오가는 그에게 지난 7월 있었던 배김새 36주년 정기공연 <길>에 관해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배김새의 모태인 경성대 무용과가 폐과되었고, 동문 춤패가 더는 새로운 단원을 보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산의 여러 동문단체가 유명무실해졌을 때, 굳건하게 역할을 하며 부산 춤판을 지켰던 배김새가 아닌가. 몇 년 전부터 정기공연에 객원 출연자가 많이 보이는 등 변화의 조짐이 있었는데, 걱정과 궁금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이번 공연 제목이 <길>인 것은 배김새의 역사를 되짚는 회고적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보다 먼저 배김새 스스로 변화를 감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단체 활동을 갈무리하는 회고적 기획을 했다. 앞으로 대규모 창작 작품을 올리기는 쉽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개별성과를 모아서 무대를 만드는 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부산 소재 대학 무용과가 속속 폐과되면서, 동문 춤패는 힘을 잃게 되었다. 더구나, 지향이 비슷한 예술가들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모였다 흩어지는 현실에서 단체의 구심력을 유지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배김새는 온몸으로 시대의 변화를 안고 있었다. 부산 한국무용 창작의 시작 때 배김새의 모습처럼 말이다.
춤패 배김새 활동이 정체하면서 하연화는 오히려 홀가분하게 자신만을 위한 계획을 갖게 되었다. 숙명처럼 함께 한 배김새를 내려놓고 뜻 맞는 이들이 모여 놀고, 작품을 구상하는 작업실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 거기서 생각을 정리하고 춤을 다듬다 보면 <처우> 같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명무류일가’도 잘 지켜 부산 전통춤이 가진 저력을 보이는 공연으로 만들고 싶은 것도 바람의 하나이다. 어릴 적 엄마의 춤을 보고 따라하다가 어엿한 춤꾼으로 자란 딸 소희와 함께 무대에 서는 기회도 자주 만들고 싶다. 이 모두 배김새 활동으로 미루었던 자신을 위한 일들이다. 그러고 보면 하연화는 36년을 숙명처럼 부산 한국 무용 창작 판을 지킨 웅숭깊은 심성의 예술가이다.
글_ 이상헌(춤비평가)
사진제공_ 하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