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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변화로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무용가 이용진


 

인터뷰 막바지에 무용가 이용진(Dance Project 에게로, 이하 ‘에게로’)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한마디로 표현할 만한 정체성은 없지만, 변화에 유연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의외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 춤꾼’이란 말을 유행처럼 사용한 시절이 있었다. ‘독립 춤꾼’이란 특정 단체에 속하거나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활동하는 춤꾼을 뜻한다. 지금은 개인 활동이 당연해 잘 쓰지 않지만, 학연에 얽매이거나 이름난 단체에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만의 방식을 개척한 이용진의 춤 여정을 생각하면서 철 지난 ‘독립 춤꾼’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현실적으로 무용계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기가 여전히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직과 수평>(2018)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한 아이가 중학교에서 우연히 스트리트 댄스를 접하고 곧바로 빠져들었다. 90년대 말은 비보잉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던 시절이라 만화 『힙합』이 참고서였고, PC통신 동호회 활동은 춤을 배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 고등학교 때 카포에이라를 배우려고 8만 원 들고 텔레비전 프로에서 본 브라질 전통무술 카포에이라 고수를 찾아 무작정 서울로 간 적도 있었다. 이용진이 새로운 춤을 만나는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관심 있는 분야를 만나면 고민에 앞서 혼자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정식 코스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주변 모든 춤꾼과 환경을 스승으로 삼았다. 고2 때 안무를 시작했다. 비보이 문화를 활성화하려는 시기라 많은 지자체에서 대회를 열었고, 자신이 안무한 작품으로 구청장상, 시장상, 문화부 장관상까지 휩쓸다시피 했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때는 일반적인 사회관계에 무관심했고, 정규 교육과정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창은 오로지 춤이었다. 

 

 

<회기>(2019)

 

 

춤으로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실용 무용과에 진학했다. 처음 진학한 대학에서 한국 춤을 배웠다. 동양사상과 무술에 관심 있었던 그로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제대 후 경성대 무용학과로 편입해서 현대무용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적극적으로 창작을 하고 싶어서였다. 혼자 연습실에 남아 연습에 몰두했다. 그 와중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체계 없이 몸을 쓴 결과 몸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는 이런 위기마저 혼자 헤쳐 나갔다. 춤추기를 멈추고 몸을 이해하기 위해 학교 도서관에 하루 12시간씩 머물며 해부학 책과 몸을 다루는 수많은 자료를 독파하고, 비디오 영상을 보고 따라 했다. 몸이 어느 정도 돌아오기까지 2년이 걸렸다. 이를 계기로 몸에 관심이 깊어졌다. 2011년 <Guilty>(신인춤 제전 출품)에서 좁은 톱 조명에서 미세한 근육까지 사용하는 움직임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춤이다. 

 


 

2010년 신인춤 제전에 <살아지고 사라지고>로 참가했을 때 의식(생각)을 춤 이미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1년 <Guilty>, 2012년 2인무 <Roots>로 이어지면서 자신의 창작 방식을 찾아갔다. 2012년 부산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신인 작가 발굴 행사인 ‘제6회 새물결 춤 작가전’에 참가한 <더 블라인드(the blind)>는 처음 안무한 3인무 작품이었고, 라이브 반주로 작업하면서 여러 장르와 함께하는 재미를 느꼈다. 이 경험은 2013년 경성대 콘서트홀에 올린 가네쉬 프로젝트 기획공연 <The Good>으로 이어진다. 이 공연은 ‘가무악의 향연, 몸과 소리의 유희’라는 주제 아래 춤, 연주, 마임까지 망라한 다원 공연이었다. 생각한 것을 모두 모아 무대에 올린 이 공연을 하면서 연출 방식을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콘크리트 인간>(2017)

 

 

2015년 다시 참가한 새 물결 춤 작가전에 <흐름>으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생각의 흐름을 이미지화했는데, 아프리카 댄스, 비보잉, 카포에이라 등 그가 거쳐 온 춤 자산이 창작의 거름이 된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무용가 이용진과 에게로의 존재를 부산 춤판에 본격적으로 알렸다. 2017년 이용진 안무로 에게로는 정식 창단 공연 <콘크리트 인간>을 해운대문화회관에 올렸다. <콘크리트 인간>은 메마르고 딱딱하고 감정 없는 현대인을 빗댄 말로, “하루 일을 말끔히 마치고 집에서 편히 잠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지 못하는 원인은 내게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녹여낸 내용으로, 작품의 주제를 ’몸‘, ’의식‘ 같은 춤에 관한 근본적이고 춤꾼 개인에 내재한 고민에서 ’인간‘ 자체로 넓힌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같은 해 부산무용제에서 대상과 안무상을 받았고, 전국무용제에서 은상과 연기상을 받았다.

 

 

<비빔-현상>(2020)

 

 

2019년 에게로가 부산민주공원 공연장 상주단체에 선정되면서 이후 3년 동안 이용진은 창작 실험의 폭을 넓혀갔다. 2019년 선보인 <회귀>는 유쾌한 판타지의 소극(笑劇, farce)으로 부산의 동시대 춤 역사를 끌어들여 지역의 리얼리티를 보여 준 작품이었다. 2020년 기획공연 <비빔-현상>은 비보이팀과 협업한 작품이다. 현대무용과 비보이의 협업이 더는 이제 낯설지 않은데, 이 작품의 변별점은 직접 비보이 생활을 했던 이용진이 누구보다 그들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 경험으로 비보이 춤을 과하지 않게 작품에 삽입해 균형을 맞춘 데 있다. 2021년 작 <수구루지>는 노골적으로 ‘오락 무용’을 표방했다. 이른바 예술 춤이 등한시했던 재미를 전면에 내세운 시도가 기성 무용계가 볼 때 어설프고 진지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기존 어법에 구애받지 않는 춤의 대중화를 위한 실험이었다. 가장 최근(2021년 12월 18,19일) 공연인 <비빔-SEED>는 가수 곡두와 협업으로 무용 작품에서 흔히 보는 춤과 음악의 관계를 재설정하였다. 연극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판소리 너름새를 춤꾼들에게 전이해 표현하거나 비보이의 춤 에너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조절하며, 춤과 음악이 기존 무대에서 맺는 관계를 전복하는 등 그의 안무·연출 방식은 기존 무용공연에서 잘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서두에 인용한 그의 말대로 ‘유연한 변화’가 작품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났다. 2017년 창작한 <사자, who>도 해학적이고 장르 변용에 능한 그의 안무 방식을 잘 보여준다. 북청사자놀음을 모티브 삼은 <사자, who>는 전통 탈춤의 서사와 메타포(Metaphor)를 감각적으로 활용하였다.

 

 

〈사자,who〉(2019)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 물었다. 먼저 ‘거리 춤’ 이야기를 꺼냈다. 이용진이 생각하는 ‘거리 춤’은 움직임부터 거리에 맞아야 하고, 야외에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춤이다. 흔히 거리 춤이라고 하면 ‘장소 특정적’ 개념을 먼저 떠올리지만, 무용수가 거리에서 다치지 않는 움직임이야말로 거리 춤 창작에서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가 분명하다. 그의 ’거리 춤‘ 개념은 이처럼 직접적이고 명쾌했다. 거리 춤 이야기 끝에 무심한 듯 춤추고 싶다는 말을 흘렸다. 3년 동안 상주단체 활동을 하면서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안무, 연출을 시도하면서, 조금 지쳤다고 한다. 춤이 대중을 어떻게 설득할지에 관한 고민을 놓칠 수는 없지만, 정기공연만이라도 작품성을 추구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나서서 춤추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예술가는 본능적으로 관객에게서 도망가려 한다. 관객에게 잡히는 순간 새로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가 지쳤고 춤추고 싶다고 한 것은 예술가의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수구루지>(2021)

 

지금 부산은 이용진 또래의 30, 40대 안무가 겸 춤꾼의 활동이 활발하다. 그들은 각자 뚜렷한 색깔로 존재를 알린다. 이용진의 색은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이는 여러 춤을 두루 거친 경험과 위계에 구애받지 않았던 춤 여정이 낳은 결과이다. 그는 춤을 배우는 과정마다 기술 습득뿐 아니라 몸, 의식, 존재에 관한 철학적 고민도 놓치지 않았고, 그것을 춤으로 명료하게 되새겨 냈다. 자신과 후배들이 춤으로 먹고살기 위해 몇 년 동안 잘 팔린 <사자, who>를 대체할 작품을 개발하려 한다는 말에는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그가 변화에 유연한 것도 무용가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유연한 변화로 존재의 의미를 끝없이 탐구하는 자가 무용가라면 먼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글_ 이상헌(춤비평가)

사진제공_ 이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