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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템포러리 한국무용을 선도한 창작자, 이혜경

이혜경은 이경옥과 함께 컨템포러리한 한국무용으로의 다리를 놓는 선도적인 활동을 펼친 창작자다. 특히 한국 고전을 해체하여 자기만의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조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남다른 창작적 역량을 확인시켰다.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표한 <다.툼>, <꼭두질>, <박>과 같은 작품은 발칙하리만큼 독특한 감각과 절제되고 함축된 의미작용을 모두 갖춘 수작으로 평가된다. 2012년 이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자신의 발자취를 넓히는 활동상을 펼쳤으며 올해 전북도립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어 다시 국내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녀를 9월 중순 전주 모처에서 만났다.

 

 

 

우리 가무악을 좋아했던 아이, 무용가로 자라나다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혜경은 어려서부터 가무악을 좋아하는 끼 많은 아이였다. 아를 지켜본 어머니에 권유로 초등학교 때 농악반에 들어가서 악기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장고춤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춤을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으며 동네 무용학원을 찾게 되었다. 유명한 무용학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화예술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춤에 대한 자질은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화예술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당시 선생들은 지금 창작자로서의 대찬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재수 끝에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로 진학해서 이홍이 교수를 만난 것은 무용가로서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선화예술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소위 ‘배정혜 메소드’를 통해 한국무용의 깊은 호흡과 하체의 힘을 갖춘 점에 대해서 이홍이 교수가 상당히 좋게 보고 인정을 했기 때문이다. 춤을 잘 추고 작품도 좋은 점만 하더라도 배울 점이 많았으나 무용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이 이끌어 주었다고 한다. 공연 때면 주축 무용수로 활약할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 실기조교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서는 양성옥 교수에게서 한국무용의 뿌리인 전통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성옥 교수는 소문난 연습벌레로 새벽 6시면 출근해서 연습을 시작하곤 했는데 그러한 춤에 대한 자세와 함께 조교로서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종합적으로 깨우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한국무용계의 여러 선생들을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네크워크를 형성한 점 또한 도움이 되었다.

 

 


 

창작자로 자리 잡아가기

 

딱 서른이 된 2004년에 첫 창작 작품인 <이매망량>을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올렸다. 첫 작품을 개인공연으로 올린데다가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해 그동안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야 했다. 1부는 양성옥 선생에게 배운 전통춤과 이홍이 선생에게 배운 신전통을 펼쳤으며 2부에는 배정혜 선생의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든 창작춤을 선보였다. 첫 개인공연이다 보니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더욱 발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2008년은 창작자로서 한두 단계 올라선 한 해로서 <구토>, <토별가>, <다.툼>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구토>는 국립무용단이 주최한 안무가페스티벌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세상의 지독한 악취를 시원하게 내뱉는 구토를 표현하기 위해 구토하는 몸짓, 악취를 맡는 행위, 변기에 물 내리는 소리, 목에 변기 뚜껑을 건 모습 등을 제시하였다. 발칙하리만큼 대담한 표현에 한 스승으로부터 ‘꼭 이렇게 해야만 하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펼친 <토별가>는 수궁가 중 상좌다툼을 동시대적인 감각의 창작 춤으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를 버라이어티하게 업그레이드해서 크리틱스초이스에 <다.툼>을 선보였는데 ‘유희와 치밀한 의도, 고전과 현대적 감각처럼 서로 다른 요소들의 숙성된 어울림이 인상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우수안무자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부터 평론가와 무용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 만큼 이혜경에게는 이정표가 될만한 한 해다.

 

 


 

한국 고전을 컨템포러리한 감각으로 재창조하는 한국무용가

 

수궁가를 소재로 한 <토별가>와 <다.툼>에 이어, 2009년에 심청가와 꼭두각시놀음을 중심기재로 한 <꼭두질> 그리고 2010년에는 판소리 흥부가의 박타는 대목을 소재로 한 <박>을 통해 자기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우선 <꼭두질>에 대한 리뷰를 <댄스포럼> 2009년 7월호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꼭두질>의 움직임은 기존 꼭두각시놀음을 단순히 조금 바꿔놓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치 판소리를 리믹스 하듯 꼭두각시놀음의 동작성을 리믹스 해놓고 있다. 춤의 동작성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늘리고 멈추고 끊고 되풀이한다. 맛깔스럽게 맺고 푸는 춤사위에 더욱 강한 악센트를 부여하여 연결구를 딱딱 끊기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서 이혜경은 한국춤의 정형성에 연연하기보다 꼭두각시놀음의 원리와 동기를 일련의 탐색 과정을 통해 해체하고 재구성해놓고 있다. 비유하자면 많은 컨템포러리댄스가 클래식발레나 모던댄스를 해체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전혀 다른 것은 아니지만 새롭고 독특한 느낌을 창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움직임을 실행하는 등장인물들 역시 재배치되어있다. 네 명의 여성무용수는 위에 언급한 새롭고 독특한 움직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전개상의 분위기를 짙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때로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까지 연상시킨다. 뺑덕어멈으로 분한 남자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채 무표정한 표정에 안짱다리로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그 뒤뚱거리는 특이한 행동거지로 인해 웃음을 유발한다. 치마를 잡는 모양새까지 그의 건장한 체격에 의해 미묘하게 변형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한편, 심봉사는 파란 웃옷에 안경을 쓰고 있는 미청년이다. 그는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며 손가락인형을 휘두르기도 하다가, 말미에 안경을 벗고 두 눈을 번쩍 뜨게 된다. 결국, 청이는 한 번도 실제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소리를 통해 지배적인 아이콘으로 작품 내내 존재했다.

 

 

 

아르코예술극장에서 발간한 잡지의 2010년 5월호에 나온 <박>에 대한 리뷰는 다음과 같다.  

 

  … 이혜경은 흥부의 박 속 금은보화에 대한 바람을 현대인의 비현실적인 상상과 집착에 빗댄다. … 가랑이에 보자기를 길게 이어 잡은 모양새로 모두 한배에서 태어났음을 암시하는 … 아홉 명의 흥부 자식들은 여자무용수들이 맡고 있으며 흥부, 놀부, 놀부부인, 흥부첩은 모두 남자가 맡고 있다. 주요 캐릭터를 맡은 남자들은 예술춤의 경계선을 넘어 비보이적이고 곡예적인 움직임으로 대중적 수용력을 높인다. 구성적으로 정돈되고 통제된 작품에서 물구나무와 재주넘기 뿐 아니라 몸을 수평으로 날려 회전하는 등의 움직임을 통해 화끈한 돌파구를 찾아냈다. 한편, 무리의 여자들은 한국춤사위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움직임을 펼친다. 그녀들은 더 나아가 어린아이의 숨김없고 직접적인 반응이나 유희나 놀이를 춤에 반영한다. … 이는 구체적인 표현으로 담겨졌다기보다 어린아이의 반응이나 유희 혹은 놀이의 원리를 분석하여 차분하게 객관화된시켜 제시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컨템포러리댄스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중앙에 놓여있고 매달려있는 직사각형의 구조물은 미니멀한 느낌을 부여한다. 미니멀한 장치 성공여부는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지만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박>에서는 꽤 성공적이었다. 그 구조물은 상상을 펼치는 장면에서 하늘에 뜬 구름을 투영하다가 박 터지는 장면에 이르자 양 옆으로 쪼개지듯 벌어진다. 거기에서 아이들이 왕창 쏟아져 나와 흥부를 에워싸자 흥부는 조명의 도움을 받아 그야말로 하얗게 질려버린다. 자각의 폭소를 일으키는 대반전이다. “지금까지는 흥부의 깨몽이었다.”라는 말은 작품의 관통하는 주제어가 되었다. 이혜경의 <박>은 노력은 하지 않고 달콤하지만 허황된 꿈만을 쫒는 현대인에 대한 일침을 놓고 있다. 그녀의 작품들의 중심 동기인 현대사회를 통찰하는 해학적 비틀기가 여기에도 여실하다.

 

 

 

이혜경은 한국 고전을 해체하여 자기만의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재창조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남다른 창작적 역량을 확인시켰다. 발칙하리만큼 독특한 감각과 함께 절제되고 함축된 의미작용을 갖춘 <다.툼>, <꼭두질>, <박>과 같은 작품을 창작할 때 어떠한 과정을 거치느냐는 물음에 이혜경은 “세련되기보다는 우직하게 접근한다. 의도하는 바를 거침없이 하는 편인데,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구상 단계에서 엄청난 탐구와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안무노트의 양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메모를 엄청나게 한다. 특히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관심이 많아서 대본을 다 외울 정도로 조각조각 분석하곤 한다. (안무 리서치를 방대하면서도 꼼꼼하게 해서) 모든 장면에 대한 구상을 머리에 다 짠 놓은 상태에서 안무 실연에 들어가는데 이후에도 이것저것 시행착오를 거쳐 작품을 완성해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작품의 전체 골조를 탄탄하게 세워가는 이러한 창작 방식은 어찌 보면 정석이지만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정석적으로 창작에 임하는 자세는 젊은 무용가들에게 귀감이 될만하다.

 

고전의 재창조 경향은 2011년 서울무용제 출품작인 <여우못>으로까지 이어진다. 선녀와 나뭇꾼을 원전으로 한 <여우못>은 원전의 뻔한 인물설정이나 전개상황을 자기만의 감각으로 비틀어낸 또 하나의 작품이다. 어느 작품보다 대규모로 만들어낸 노력은 엿보이나, 발칙하리만큼 독특한 감각을 지니면서도 절제되고 함축된 의미작용을 했던 전작들의 비해서는 다소 실망스러움이 없지 않았다. 다분히 수상을 의식한 듯한 작품으로 최연소 대상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의 활동을 거쳐, 다시 국내로

 

<여우못> 이후 국내 활동이 뜸했던 이유는 남편이 독일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어 함께 옮겨갔기 때문이다. 거기서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2013년쯤 핀란드의 작은 축제에 작품을 올렸는데, 그것을 본 독일 다름슈타트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전문트레이너로 러브콜을 보냈으며 이듬해에는 작품 초청까지 하였다. 그 예술감독이 오스트리아 린츠주립무용단으로 옮겨가면서도 또 이혜경을 전문트레이너와 객원안무가로 불러들였다. ‘단원들에게 무겁고 깊이 있는 춤을 추게 하고 싶은데 이혜경의 춤에서 그것을 발견했다’는 이유에서다. 이혜경은 일찍이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에서 자기만의 한국춤 호흡법에 대해 정립한 바 있는데 이것을 교육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서양의 무용수들을 가르치는 데도 별문제는 없었다.

 

이어서 콜롬비아 몸의 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립예술대학, 오스트리아 빈사립예술대학교 등에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2019년에는 독일 올덴부르크 국립발레단에 안무가로 초청되어 라는 작품을 시즌공연으로 올린 바이다. 현재는 한국에 거주하면서 독일을 오가야 하는데 팬데믹으로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올해 초 전북도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것은 또 하나의 도전이자 새로운 방향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는 10월에 농악 바리에이션을 소재로 한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예술감독으로서 역량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글_ 심정민(무용평론가, 비평사학자)

사진제공_ 이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