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춤꾼이 소녀 탈을 쓰고 춤을 춘다. 덧배기 사위가 언뜻 보이지만, 탈춤은 아니다. 사물 장단에 현대무용 호흡이 따라붙는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이 춤이 어떤 형식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 춤 감성의 에너지 넘치는 현대무용 동작은 정적이고 소극적인 살풀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신명으로 강렬한 해원(解冤)의 춤이 되었다. 정기정이 영남 오광대의 덧배기와 현대무용을 녹여 영남 현대무용의 한 전형을 제시한 <소녀상 모심춤>이다. 알려진 것처럼 영남을 춤의 고장이라 부른다. ‘손 한 번 들어 춤 아닌 것이 없다.’라는 말은 영남 사람들에게 춤이 일상적이었다는 의미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한 정기정이 오광대 같은 민속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영남 춤 전통의 일상성 덕분이다.
정기정은 신라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고, 1991년 ADF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NEA기금을 받았다. 80년대 후반 학번인 것을 생각하면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ADF 장학생 선발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현대무용의 최신 경향을 보고 익히면서, 1990년대 대부분을 유럽과 미국의 춤을 경험하는데 할애했다. 이런 노력은 1999년 제1회 차세대 안무가 전에서
“이 시기에 〈Take a Trip〉(2003), 〈Talking about it〉(2004), 〈소풍 가는 길 On the way to a picnic〉(2005) 등을 연이어 발표한다.
정기정이 현대무용으로 정점에 오르려는 과정에 운명처럼 채희완 교수를 만난다. 연분홍을 후원하고 예술적 자문을 아끼지 않았던 채희완 교수는 정기정에게 탈춤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춤 욕심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그는 이내 탈춤의 매력에 빠졌고, 정기정의 현대무용 스타일에 한국적 요소, 더 세밀하게는 영남 춤의 자양분이 더해졌다. 이미 체화한 현대무용의 호흡과 움직임이 탈춤을 만나 장르의 구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안무와 춤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점차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해 갔다.
모든 것이 집중된 서울은 굳이 ‘서울식’을 찾거나 내세울 필요가 없다. 집적의 다양함 자체가 힘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역은 다르다. 갈수록 심해지는 중앙 집중의 영향으로 황폐해가는 지역 무용계가 살길은 지역색을 찾는데 달렸다. ‘로컬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 지역색은 그 지역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것이다. 정기정의 춤은 낙동강 인근의 오광대 전통을 흡수한 춤 형식에 지역의 역사를 담아내면서, 춤에서 로컬 리얼리티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정기정은 최근 수년 전부터 마산오광대 보존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년 마산오광대 정기 공연에서 역할을 맡아 출연하고, 마산의 역사를 담아낸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리 앞 바다는 밤이면 바람 소리와 함께 고양이 울림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괭이 바다’라고 불린다.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영장 없이 마산형무소에 예비 구금시켰던 1681명 중 700명 넘는 사람들을 네 차례에 걸쳐 야밤에 학살해 수장한 장소이다. 창작 춤 <괭이바다>는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을 모티브로, 희생당한 이들의 원혼을 달래는 작품이다. 앞서 소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소녀상 모심춤>도 역사적 사건이 모티브이다. 영남 민속춤 전통과 자신의 현대무용을 접목한 정기정의 춤은 현실 참여 성격의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김지하의 동명 시를 춤으로 만든 <회귀>, 12발 상모와 부포 춤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 <회향>, 클라이맥스에서 보여 준 강렬한 독무는 살(煞)을 푸는 춤의 본보기로 삼을만하다는 평가를 받은 <바랄꽃>은 황석영의 소설 <심청>을 내용을 차용했다. 야외 춤으로 선보인 <춤추는 바다>는 기장 바다를 소재로 창작하였는데, 북청사자놀이의 사자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연출로 바다의 상징이 물고기나 용이라는 인식을 뒤엎으면서 표현의 폭을 확장하였다. 이처럼 정기정은 역사를 담거나 문학에서 소재를 차용하고, 환경과 심상을 구체적인 상징을 이용해 현실화하는 방식으로 창작한다. 무용 작품에서 흔하게 보이는 추상적인 개념에 매달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을 아예 만들지 않는다.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현실을 가리킨다.
정기정은 춤꾼으로도 현역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무용에서 실연자로서 춤꾼은 도구 없이 몸을 직접 써야 하는 까닭에 조로(早老)하는 편인데, 그는 여전히 발레, 현대무용, 한국 창작, 탈춤, 마당극 등 장르와 무대를 가리지 않는다. 50대 춤꾼이 그보다 젊은 춤꾼을 제치고 많은 작품에서 주역을 맡고 있다. 한두 번 등장해서 분위기만 잡는 역할이 아니라 작품 내내 젊은 춤꾼과 같이 춤추는 그런 주역이다. 여러 안무자가 정기정을 찾는 까닭은 한국 춤과 현대무용을 가리지 않고 소화할 수 있고, 어떤 작품에서도 안무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기정의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런데 현역 춤꾼으로서 가치는 다른 춤꾼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의도적 노력으로 이룬 것이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중요한 가치는 지역의 리얼리티를 춤에 담아내는 방식을 보여 준 데 있다. ‘영남형(嶺南形) 현대무용’이라고 이름 붙인 정기정의 창작 방식이 지금은 다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지역의 리얼리티를 담는 춤의 한 전형임은 분명하다. 정기정의 창작이 현란하고 스타일리시(stylish)한 유행에 가치가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자면, 춤 형식에 앞서 무용가 정기정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람이 없으면 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정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