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일은 동시대의 주도적인 경향인 컨템포러리발레를 국내에서는 비교적 일찍 수용하고 실현한 안무가로서 높은 인지도를 확립하고 있다. 작년에 10주년을 맞이한 정형일 Ballet Creative 역시 오랜 기간 꾸준하게 활동상을 펼쳐온 독립적인 창작발레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를 넘은 새로운 연출적 시도로 확장성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50대를 바라보는 무용가로서 발레계에 기여하기 위한 모색과 실천을 펼치고 있다. 다음의 글은 11월 16일과 19일 정형일과의 비대면 인터뷰에 근간한다.
뮤지컬에서 발레로 옮겨간 소년의 관심
1974년 서울에 태어난 정형일은 태권도나 축구 같은 운동을 즐겨 했던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노래 부르고 악기 다루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따로 피아노까지 배웠으며 자연스럽게 뮤지컬 배우를 꿈꾸었다. 고등학교 시절 무용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도 무용을 배우면 음악적 감각을 예민하게 돋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나서다. 원래는 음악적 감각에 도움이 되고자 무용을 시작했으나 훗날 무용 창작을 하는 데 음악적 감각이 도움이 된 셈이다.
학원에 가서 현대무용을 거쳐 발레를 배우게 됐는데 곧바로 발레의 매력에 걷잡을 수 없게 빠져들었다. 체계적인 기본 테크닉에다가 복잡다양하게 엮어지는 콤비네이션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십 대 후반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시작하여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 역시 도전의식을 자극하였다.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점이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든 십 대 소년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정형일은 곧바로 발레를 전공으로 하여 학원에 살다시피 하면서 기량을 향상시켰으며 무용 명문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한양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는 김민희 교수와 정형수 선생에게서 창작발레라는 새로운 영역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창작발레는 현대무용이나 한국무용에 비해 창작의 다양성이나 확장성이 다소 떨어진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김민희 교수는 해외 발레 동향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때론 윌리엄 포사이드 등의 컨템포러리발레 스타일을 작품에 반영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다만 학생들이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정형수 선생은 자기 개발을 엄청나게 하던 분이었는데 미국 창작발레 스타일의 다양한 움직임을 가르쳐줘서 클래스(수업)의 클래스(수준)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립발레단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가다
정형일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1998년부터 2년간 국립발레단에 몸담았다. 발레리노로서는 최고의 직업이라 할 수 있으므로 안주할 법도 한데 좀 더 넓은 예술세계를 접하고 싶다는 열망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거기에 불씨를 던진 계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란 게 없어 해외 무용을 접할 기회가 매우 한정되었는데 미국 유학 중인 친구가 보내준 ABT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전 레퍼토리뿐 아니라 조지 발란신, 안소니 튜더, 나초 두아토 등의 작품 등을 보고 자신이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무조건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미국 뉴욕에 있던 홍성욱(現와이즈발레단 예술감독) 선배의 도움을 받아 무작정 건너가서는 닥치는 대로 클래스나 오디션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할렘발레단에 입단하여 일 년 정도 활동하였다. 당시 할렘발레단 단장인 아서 미첼은 조지 발란신의 손꼽히는 수제자이자 애제자로서 뉴욕시티발레단에 흑인 남성무용수 최초로 입단한 기록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조지 발란신의 창작 스타일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음악성 있는 창작을 선호하였다. 반 박자까지 쪼개서 빠르게 진행하는 데다가 몸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면서 스텝을 꼬고 엮는 안무 방식이 힘들면서도 너무 재미있었다. 놀라운 점은 막상 클래스에서는 기본 테크닉에 충실한 반복 연습이 철저했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서부에 소재한 유진발레단이란 곳에서 주역 자리를 주겠다고 러브콜을 보내와서 그쪽으로 옮겨갔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연간 엄청난 수의 공연을 소화하면서 정말이지 원 없이 춤출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무릎이 심각하게 망가져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정형일 Ballet Creative를 만들기까지
2007년에 귀국한 이유도 처음에는 수술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나 무리를 하지 않고 쉬다 보니 자연치유가 되었다. 이후 여러 창작발레단에서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모교인 한양대학교 동문발레단 글로벌컨템포러리발레단을 비롯하여 발레블랑, 서발레단, 와이즈발레단, 이원국발레단 등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신진예술가 해외연수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2년 동안 유럽을 여러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 유럽에서 NDT, 피나 바우쉬, 모리스 베자르, 빔 반데키부스 등 발레와 현대무용 할 것 없이 유명한 무용가와 무용단의 공연을 관람하였으며 새들레스 웰즈나 떼아트르 드 라 빌 같은 무용 극장에서의 공연도 관람하였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하도 다니면서 보다 보니 순수미술과 설치미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2008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발레뤼스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무용단과 무용가들이 레퍼토리를 재해석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로열발레단의 작품에서 무대미술적인 요소에서 깊은 감흥을 받았으며 자기만의 특색 있는 무대미학을 갖추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창작자로서 필요한 자질을 습득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밟아갔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창작에 대한 열망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었다. 여러 습작을 거쳐 2010년에 한국발레협회 신인안무가전에서 <거울 속의 거울>로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막을 전부 바꾼 데다가 토슈즈를 신지 않고 다양한 동작을 펼쳐 보였다. 공연 후에는 음악적인 부분에서 많은 찬사와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힘입어 이듬해인 2011년 정형일 Ballet Creative를 창단하여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정형일의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무게로부터 자유>(2012), 〈Seventh Position〉(2015), 〈Line of Scene〉(2019), 〈Two Feature〉(2021) 등을 꼽을 수 있다. 2012년 크리틱스초이스에 출품한 <무게로부터의 자유>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정형일은 젊은 발레안무가답게 유미적인 춤 선형을 강조한다. 춤추는 몸의 라인을 강조하면서 둘 셋씩 서로 엮어지는 동작 구성에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다. 무용가들 간의 접촉을 통한 연결은 끊임없이 동작을 만들어간다. 발레의 우아하고 깨끗한 선형에다가 현대무용의 다채로운 동작 구성을 조화시키는 안무는 작금의 발레안무가들 사이에서 주도적인 스타일 중 하나다. 정형일 역시 그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춤> 2012년 8월호
〈Seventh Position〉은 2015년 초연한 후 2017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재연되었으며 2018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한층 다져진 면모를 드러냈다.
2017년 9월 2-3일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정형일의 〈Seventh Position〉은 피에르 보샹이 남긴 발의 포지션들을 모티프로 하였다. 만들어진지 3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무용가들은 양 발끝을 밖으로 180도로 유지하는 포지션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일곱 번째 포지션은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의 탐구력과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상징으로서 이 작품의 제목으로 삼은 듯하다. 50분간 우아하고 정교하게 엮어지는 발레동작이 심미적인 쾌를 불러일으킨다.… <춤> 2018년 1-2월호
〈Seventh Position〉은 정형일 Ballet Creative의 대표 레퍼토리로서 그동안 여러 차례 리바이벌 되어왔는데 2018년 대한민국발레축제를 통해 완성도를 한껏 높였다. 안무 및 연출에 있어 정교함과 세밀함을 보강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무용수들의 실행력이 두드러지게 향상되었다. 음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작들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소용돌이치는 듯한 이미지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떠올리게 한다. 독립적인 젊은 발레단으로서 운영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춤> 2018년 7월호
2018년 서울문화재단 지원으로 초연한 〈Two Feathers〉는 국내외적으로 여러 번 재연되어왔는데 그중에서 2021년 대한민국발레축제도 있다.
〈Two Feathers〉는 음악의 선율을 선형적인 발레 춤사위로 시각화하는 스타일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 <백조의 호수>의 백조와 흑조라는 선악을 대표하는 이분법적인 상징을 입힘으로써 중첩된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이는 전자의 단순한 전개에서 한 단계 상승한 작품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정형일의 최근 작품들 중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성취로 여겨진다. <춤> 2021년 8월호
이러한 작품들은 국내 지원기관에서 지원받거나 크고 작은 축제에 초청받는가 하면 해외 축제나 발레단으로 진출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도쿄시티발레단에 2019년 〈Seventh Position〉과 2020년 〈Two Feathers〉를 수출하였으며, 이 두 작품에 〈Line of Scene〉까지 가세하여 미국 워싱턴시티 댄스페스티벌, 일본 사이 댄스페스티벌, 일본 후쿠오카 프리미어 댄스콜렉션 등에 초청된 바 있다.
올해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제작된 〈Edge of Angle〉은 정형일 안무의 예술적 확장성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춤> 2022년 11월호에 실린 리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월 29일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에서 초연한 〈Edge of Angle〉은 공간이 재료가 되고 신체가 주체가 되어 숨겨진 움직임을 찾는 과정을 표현한다. 정형일의 안무 스타일은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발레의 기술적인 동작과 구도로 시각화하는 것으로, 그동안 일관되게 추구되어 온 점은 확인되나 별다른 변화 없이 항상 비슷한 이미지로 구현되어왔다는 한계도 있었다. 이번 공연은 영상과 조명 등에서 그래픽과 색감을 강조함으로써 보다 풍성한 미장셍을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확장성을 가진다. 기존의 안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시각적인 연출 면에서 확장된 감각을 실현함으로써 고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기하학적인 형태의 다양한 시각 이미지를 통해 춤의 선형에 긴장감과 예리함을 더하고 다양성과 풍성함을 돋구는 연출은 주목할 만하다. 무대디자이너 김태환과 안무가 정형일의 협업으로 도형 그래픽과 안무 구도를 면밀하게 계산해서 만든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한 단계 높은 창작적 성취라고 할 수 있다.
김성민, 김경원, 김은정, 권수민을 필두로 총 열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출연진의 적절한 실행력 또한 작품의 이미지를 확립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 다른 무용 영역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발레의 경우 무용수들의 기량에 따라 안무의 수준이 높아 보일 수도,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독립 발레단으로서 상당히 고무적인 수준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정형일 Ballet Creative의 〈Edge of Angle〉은 안무의 고착성을 뚫을 만한 확장된 연출로서 한 단계 높은 작품성을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