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김옥련 발레단의 대표 가족 발레극 <거인의 정원>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은 2014년 초연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공연한 ‘메이드 인 부산 가족 발레’ 작품으로, 부산에 연고를 둔 민간 발레단의 창작 공연으로는 전례가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안무가이자 발레리나 김옥련이 있다. 그의 춤 여정을 살펴보면 서사무가 <바리데기>가 떠오른다. 아들을 바라던 나라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림받았지만, 아버지(왕)의 병을 고칠 약을 구하는 험난한 길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고도 기어이 죽은 아비를 살려낸 바리데기. 김옥련은 이름만 남은 부산의 발레를 ‘부산 발레’로 악착같이 지켜 낸, 그래서 꺼져가는 부산 발레를 회생시킨 부산 발레의 바리데기라고 부를 만한 무용가이다.
김옥련이 본격적으로 발레에 입문한 계기는 고등학교 입학식 날 우연히 눈에 들어온 무용실 때문이었다. 넓은 마룻바닥과 창가에 기다랗게 늘어선 Bar가 있는 텅 빈 무용실을 보는 순간, 춤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선배를 따라 발레를 배우기 위해 처음 갔던 곳은 황창호 발레 학원이었다. 황창호는 송범의 제자로 국립발레단의 전신인 한국발레단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1969년 부산에 발레 학원을 열어 김정순(전 신라대 교수), 민병수(부산대 교수), 이원국, 김용걸 등을 키워냈으며, 부산 최초의 민간 발레단 부산창작발레단을 창단한 부산 발레의 스승 격인 인물이다. 김옥련은 황창호 선생을 통해 민간 발레단 운영의 고충을 알게 되었고, 대규모 창작 발레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으며, 한국적 소재 발굴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대학 시절 조숙자 교수에게서 다양한 테크닉과 클래식 레퍼토리를 배웠고, 신정희 교수는 소극장 창작 발레 공연과 서울 진출이라는 값진 경험을 갖게 해주었다. 대학 2학년 때 생애 처음으로 VTR로 ABT의 <돈키호테>를 접했다. 세계적인 발레단의 기량과 공연 규모에 감동해 사흘을 공연 영상만 보았다고 한다. 이 모두 김옥련 춤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 발레를 지켜 낸 원동력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꿈꾸었던 무용 교사가 되었지만, 1년 6개월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 자리를 박차고 나온 이유는 배움에 대한 열망과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열정, 그리고 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직장을 나와 곧바로 이화여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서 발레블랑 활동으로 더 넓고 치열한 세상에 자신을 던졌다. 대학원을 마치고 러시아 유학 기회를 잡아 준비하던 중 든든한 지지자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다. 이 일로 김옥련은 부산으로 돌아와 대학과 예고, 사회단체에서 발레를 가르치는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동인 단체 그랑발레를 창단(1991년)한다. 동인 단체 공연을 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찾아가는 발레 공연’을 기획하였다. 당시 발레는 물론 춤에 관한 이해가 아예 없었던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을 찾아가 설득하였는데, 무료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불통 자체였다. 어렵게 한 두 곳 학교를 찾아 장소에 상관없이 공연하기를 4년이 지나 단원들의 반대로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동인 단체 활동 기간 다양한 형식의 무대를 경험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공연을 올리는데 많은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고, 이것은 새롭고 다채로운 작품을 구상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4년 영국 연수는 시각과 사고의 폭을 넓힌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특히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발레를 즐기는 문화는 큰 깨우침을 주었고, 여러 면에서 수십 년의 차이를 실감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춘 공연을 기획하고, ‘가족 발레’를 구상하고 실행한 그였기에 영국인이 발레를 즐기는 방식에서 남다른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김옥련은 자기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1995년 김옥련 발레단(이후 ‘발레단’)을 창단한다. 의지는 충분했지만, 아이디어를 실현할 동지가 필요했다. 역량 있고 믿을 수 있는 연출가, 대본 작가, 작곡가, 무대 디자이너와 함께 시리즈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때마침 만난 연출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10년 동안 버티고 해낼 자신이 있다면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요구하였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지금까지 예술적 동반자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호흡이 잘 맞는 예술적 동지를 만난 김옥련은 무서운 기세로 작품을 만들어 간다. 2002년 <가자, 숲속으로>는 해마다 주제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가족 발레’ 개념을 만들어 낸 작품이었고, <숲속 발레>로 지금까지 이어진다. 가족 발레는 2014년 <거인의 정원>으로 폭을 넓혀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2012년 공연장 상주단체로 선정되면서 선보인 <운수 좋은 날>은 발레를 기반으로 다양한 춤과 노래가 더해진 ‘발레컬’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상의 <날개>,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 문학과 발레를 접목한 다양한 발레컬 작품을 발표하였다. 관심은 문학에서 그치지 않았다. <해운대 연가-최치원>, <시인 김민부>, <윤흥신 찾기>, <부산시민 장기려> 등 부산과 관련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발레단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분홍신 그 남자>를 포함한 몇몇 작품에서는 타 장르 예술가와 협업해 다양한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었다.
김옥련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발레단으로 부산 발레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발레컬’, ‘가족 발레’ 같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까지 했다. 극장을 벗어나 백화점, 바다, 지하철 공간을 무대 삼아 공연하였고, 발레를 보기 어려운 시설이나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가 <꿈꾸는 비상>, <별>, <아테네로 풀어쓰는 발레 이야기>, <별별별 별이야기>, <발레 나들이 공연>으로 관객을 만났다. 미래의 관객이 될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놀이형 발레 교실을 열었고, 관객 개발을 위해 발로 뛰는 공격적인 홍보를 쉼 없이 감행하였다. 덕분에 발레단 공연은 언제나 만석이며 두터운 관객층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만 해도 김옥련이 부산 발레 판에 끼친 영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편, 이 모든 성과를 오롯이 김옥련이 이루어 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그렇게 발버둥 치듯 치열할 때 부산 무용계는 그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같은 것 말이다. 그를 믿어주는 아주 소수의 동반자만 있었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기를 쓰고 하는지’, ‘부산에서 발레를 해서 이룰 게 뭐가 있어?’라고 비아냥대는 말을 듣거나, 차가운 무관심의 시선을 견뎌야 했던 김옥련은 부산 춤판, 부산 발레의 아픈 손가락이며,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바리데기 같은 존재이다. 결국 바리데기는 죽은 목숨을 살리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젊은 민간 발레단의 활동이 그나마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아마 김옥련의 맹목에 가까운 활동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부산 발레가 다시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더 늦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의지를 가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얼마나 큰지를 증명해 보인 김옥련은 ‘부산 발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김옥련